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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심판결을 아래와 같이 변경한다.
가. 피고 2는,
1) 2017. 4. 3. 펴낸 ‘(도서명 생략)’ 제1판 제1쇄의 내용 중 별지 2 목록 ‘당심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내용’란 기재 부분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위 도서를 출판, 발행, 인쇄, 복제, 판매, 배포 및 광고하여서는 아니 되고,
2) 2017. 10. 13. 펴낸 위 1)항과 같은 제목의 도서 제2판 제1쇄의 내용 중 별지 3 목록 ‘당심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내용’란 기재 부분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위 도서를 출판, 발행, 인쇄, 복제, 판매, 배포 및 광고하여서는 아니 되고,
3) 원고 재단법인 5.18기념재단, 원고 사단법인 5.18민주유공자유족회의 소송수계인 5·18민주유공자유족회, 원고 사단법인 5.18구속부상자회의 소송수계인 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 원고 사단법인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의 소송수계인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에 각 15,000,000원, 원고 5에게 10,000,000원 및 위 각 돈에 대하여 2018. 1. 18.부터 2022. 9. 14.까지는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12%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나.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은, 피고 2와 공동하여, 위 가.의 3)항 기재 각 돈 중 원고 재단법인 5.18기념재단, 원고 사단법인 5.18민주유공자유족회의 소송수계인 5·18민주유공자유족회, 원고 사단법인 5.18구속부상자회의 소송수계인 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 원고 사단법인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의 소송수계인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에 각 4,000,000원, 원고 5에게 2,500,000원 및 위 각 돈에 대하여 2018. 1. 18.부터 2022. 9. 14.까지는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12%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다. 원고들의 피고 2에 대한 나머지 청구를 기각한다.
2. 소송총비용 중 원고들과 피고 2 사이에 생긴 부분은 원고들이 10%, 피고 2가 90%를 각 부담하고, 원고들과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 사이에 생긴 부분은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이 전부 부담한다.
3. 제1항 중 금전 지급을 명한 부분은 각 가집행할 수 있다.
○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에 대하여: 주문 제1의 나.항과 같다.
○ 피고 2에 대하여: ① 2017. 4. 3. 펴낸 ‘(도서명 생략)’ 제1판 제1쇄(이하 ‘이 사건 회고록 1판’이라 한다) 중 별지 2 목록 기재 각 표현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이 사건 회고록 1판을 출판, 발행, 인쇄, 복제, 판매, 배포 및 광고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주문 제1의 가. 3)항과 같다.
○ 피고 2는 2017. 10. 13. 펴낸 위와 같은 제목의 책 제2판 제1쇄(이하 ‘이 사건 회고록 2판’이라 하고, 위 1판과 2판을 특별히 나누어 지칭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위 도서들을 아울러 ‘이 사건 회고록’이라 한다) 중 별지 3 목록의 ‘1심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내용’란 기재 표현을 각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이 사건 회고록 2판을 출판, 발행, 인쇄, 복제, 판매, 배포 및 광고하여서는 아니 된다.
2. 피고들의 항소취지
제1심판결 중 피고 망 소외 1 및 피고 2의 각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그 취소 부분에 해당하는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3. 원고 5·18단체들의 피고 2에 대한 부대항소취지
제1심판결 중 피고 2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금지를 명하는 부분에 해당하는 원고 5·18단체들 패소 부분을 취소한다. 피고 2는 이 사건 회고록 1판 중 별지 2 목록 순번 1-12 기재 표현 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위 도서를 출판, 발행, 인쇄, 복제, 판매, 배포 및 광고하여서는 아니 된다.
가. 당초 원고들의 청구
제1심에서 원고들은 광주지방법원 2017가합55560 사건으로 피고 2와 피고 망 소외 1에 대하여 ① 별지 2 목록 기재 각 표현들(원고 5는 그중 ‘헬기사격이 있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취지로 표현한 부분 등 자신의 유족으로서 추모 감정이 훼손되는 등의 불법행위 부분에 한정하여)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이 사건 회고록 1판을 각 출판, 발행, 인쇄, 복제, 판매, 배포 및 광고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취지의 청구(이하 같은 취지의 청구를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라 한다) 및 ② 위 해당 표현들로 인한 인격권 등 침해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청구를 하였다.
이어 원고 5·18단체들은 추가로 같은 법원 2018가합50128 사건으로 ③ 별지 3 목록 기재 각 표현들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이 사건 회고록 2판의 출판 등 금지청구와 ④ 위 해당 표현들로 인한 인격권 등 침해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청구를 별도로 하였다.
나. 제1심의 판단
제1심 법원은 원고들의 청구에 대하여, (1) ①, ③에 해당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 중 별지 2, 3 목록 각 ‘1심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기한 항목의 ‘내용’란 기재 각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를 인용하고 나머지 출판 등 금지청구(별지 2, 3 목록의 ‘1심 판단’란에 ‘유지’라고 표기한 부분)는 기각하였고, (2) ②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와 ④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는 중복소송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후소인 ④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 부분의 소를 각하하고, ③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를 일부 인용하였다.
다. 양 당사자들의 불복 범위와 이 법원에서의 청구감축 등
피고들은 ①, ③에 해당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와 ②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 중 각 피고들 패소 부분에 대하여 항소하였다. 다만 항소심 진행 중 원고들이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에 대한 출판 등 금지청구를 모두 취하함에 따라, 피고 2에 대한 ①, ③에 해당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 및 피고들에 대한 ②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 중 각 피고들 패소 부분(원고들이 청구를 감축하고 남은 부분으로만 한정)만 다투는 것으로 되었다.
출판 등 금지청구와 관련하여, 원고들은 항소심에 이르러 앞서 본 바와 같이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에 대한 ①, ③에 해당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의 소를 취하하였다. 원고들은 또, 피고 2에 대한 ①에 해당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 중 제1심에서 청구가 기각된 별지 2 목록 순번 1-12에 해당하는 표현(이른바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계엄군’ 관련 표현 부분) 부분에 대하여 불복하여 부대항소하는 한편, 피고 2에 대한 ③에 해당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 중 제1심에서 청구가 기각된 부분에 대한 소를 취하하였다.
손해배상청구와 관련하여, 원고들은 항소심에 이르러 ②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 중 피고 2에 대하여는 제1심에서 인용된 금액과 그에 대한 지연손해금의 지급을 구하는 것으로,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에 대하여는 상속지분의 범위에서 일부 금액과 그에 대한 지연손해금의 지급을 구하는 것으로 각 청구취지를 감축하였고, 원고 5·18단체들은 중복제소에 해당한다고 하여 제1심에서 각하된 ④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모두 취하하였다.
라. 소결
따라서 이 법원이 심판할 대상은 (1) 피고 2에 대한 ①에 해당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의 당부(제1심에서 인용 또는 기각된 부분 전부), (2) 피고 2에 대한 ③에 해당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 중 제1심에서 인용된 부분의 당부 , (3) 피고들에 대한 ②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당심에서 감축된 청구)의 당부로 한정된다.
2. 기초사실
가. 원고 5·18단체들(그 전신인 임의단체들 포함)과 그 일부 소송수계인들의 지위는 아래 표와 같다. 아래 표 ‘법정단체’란 기재 각 단체는 5·18유공자법 제55조에 따라 설립된 공법상의 특수법인으로서, 위 법(2021. 1. 5. 법률 제17883호로 개정되어 2021. 4. 6. 시행된 것) 부칙 제3조, 제6조에 따라 ‘기존원고’란 기재 각 사단법인의 권리·의무와 회원들을 그대로 승계하였고, 기존 사단법인은 해산 간주되었다.
순번명칭설립 시기목적 1재단법인 5.18기념재단1995. 1. 13.1.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기념사업 및 추모사업 2. 5.18민주화운동 정신의 계승 발전을 위한 학술, 연구 문화사업 3.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기념, 계승하기 위한 장학사업 4. 제1항의 목적사업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수익사업 5. 각호에 관련된 부대사업 2임의단체5.18민주유공자유족회1980. 5. 31.? 기존원고사단법인 5.18민주유공자유족회2004. 6. 18.5.18민주화운동의 위대한 민주정신과 숭고한 대동정신을 기념하고 계승·선양하며 조국통일의 실현에 이바지하고 회원이 상부상조하여 자립과 복지증진에 기여함 법정단체5·18민주유공자유족회2022. 5. 12.? 3임의단체5·18구속부상자회1984. 10. 5.5.18민주화운동의 위대한 민주정신과 숭고한 대동정신을 기념하고 계승, 선양하며 조국통일의 실현에 이바지하고 회원이 상부상조하여 자립과 복지증진에 기여함, 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업을 수행 1.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사업 1. 5.18민주화운동 정신계승 및 선양사업 1. 5.18민주화운동공로자의 상부상조를 통한 친목도모 기존원고사단법인 5.18구속부상자회2004. 8. 19.1. 5.18민주화운동공로자와 그 유족의 복지증진 및 권익신장 법정단체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2022. 3. 4.1. 타 민족민주 운동 단체와의 연대사업 4임의단체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1982. 8. 1.? 기존원고사단법인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2003. 9. 8.5.18민주화운동의 위대한 민주정신과 숭고한 대동 정신을 기념하고 계승·선양하며 조국 통일의 실현에 이바지하고 회원이 상부상조하여 자립과 복리증진에 기여함 법정단체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2022. 3. 2.?
나. 원고 5는 가톨릭 신부이고, 2016. 9. 무렵 사망한 고(故) △△△ 신부(가톨릭 세례명 ‘□□’, 이하 사회 일반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소외 2’라 한다)의 조카이다. 소외 2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성당에서 봉직하였는데, 1989. 2. 3. 방영된 ♧■■ 다큐멘터리 ‘(제목 생략)’에 출연해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하였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였고, 이어 1989. 2. 22. 열린 제13대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이하 ‘국회 5·18특위’라 한다)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자신이 1980. 5. 21. 오후 1시 30분에서 2시 사이에 ◎◎◎성당 부근에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이후 1995년 무렵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에 대한 형사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같은 내용의 진술을 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이 목격한 헬기 사격에 관한 공개 발언을 했다.
다. 피고 망 ○○○(이하 ‘소외 1’이라 한다)은 이른바 12·12, 5·17 군사반란과 5·18 관련 내란 행위 등을 통하여 헌법에 따라 설치된 국가기관의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대한민국의 실권을 장악한 뒤, 그 상태에서 유신헌법과 이른바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제11, 12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각 대통령 임기를 모두 마친 뒤인 1996. 12. 16. 서울고등법원에서 위 12·12, 5·17 군사반란과 5·18 관련 내란 행위 등과 관련하여 반란수괴, 내란수괴 등의 죄로 유죄판결을 받아 무기징역형에 처해졌고(96노1892 판결), 위 판결은 1997. 4. 17.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되었다(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이하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이라 한다). 소외 1은 1997. 12. 22.자로 특별사면·복권되었다가 이 사건 항소심 소송계속 중인 2021. 11. 23. 사망하였다.
라. 피고 2는 소외 1의 아들로서 출판사인 (출판사명 생략) 등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사람이다. 소외 1은 별지 2 목록 기재 각 표현들이 포함된 이 사건 회고록 1판을 집필하였고, 피고 2는 출판자로서 이를 발간·배포 및 판매하였다. 이 사건 회고록 1판의 주요 목차는 아래와 같다.
(주요목차 생략)
마. 원고들은 소외 1과 피고 2를 상대로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허위사실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이 사건 회고록 1판의 출판 및 배포금지 가처분을 신청하였다(광주지방법원 2017카합50236호). 위 법원은 2017. 8. 4. 원고들이 삭제를 구한 별지 2 목록 기재 각 표현들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이 사건 회고록 1판을 출판 및 배포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가처분 결정을 하였고, 위 결정은 2017. 8. 12. 확정되었다.
바. 이에 소외 1과 피고 2는 위 가처분 결정에서 출판 등 금지의 해제조건으로 정한 각 표현들이 인쇄된 부분만을 검게 가리는 방식으로 이 사건 회고록 1판을 수정하였고, 피고 2는 2017. 10. 13. 위와 같이 수정한 이 사건 회고록 2판을 발간·배포 및 판매하였다(위와 같이 검게 가린 부분을 제외하고는 목차를 포함하여 이 사건 회고록 1판과 내용이 같다).
사. 원고 5·18단체들은 이 사건 회고록에 대한 추가 검토를 거쳐 이 사건 회고록 2판에도 여전히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허위사실이 담겨 있다는 이유로 다시 소외 1과 피고 2를 상대로 이 사건 회고록 2판에 대한 출판 및 배포금지 가처분을 신청하였다(광주지방법원 2017카합50489). 위 법원은 2018. 5. 14. 별지 3 목록 중 순번 2-29를 제외한 나머지 표현들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이 사건 회고록 2판 역시 출판 및 배포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내용의 가처분 결정을 하였고, 위 결정은 2018. 5. 31. 확정되었다.
아. 검찰은 2018. 5. 3.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 장면을 목격하였다는 소외 2의 말은 계엄군의 진압 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악의적인 주장이고, 소외 2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다’라는 취지의 표현을 하여 사자인 고 소외 2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공소사실로 소외 1을 광주지방법원에 기소하였다. 위 법원은 증거조사 등을 거쳐 인정되는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2020. 11. 30. 위 공소사실을 일부 수정하여 소외 1에 대하여 사자명예훼손으로 유죄를 인정하고, 소외 1을 징역 8개월에 처하되 다만 그 형의 집행을 2년간 유예하는 판결을 선고하였다(이하 ‘관련 형사사건’이라 한다).
자. 위 판결에 대하여 피고인(소외 1)과 검사 모두가 항소하여 광주지방법원에서 항소심(2020노3208 사건)이 진행되었는데, 그러던 중 2021. 11. 23. 소외 1이 사망하였다. 위 법원은 2022. 1. 10. 소외 1에 대한 공소를 기각하는 결정을 하였고, 위 결정은 2022. 1. 18. 확정되었다.
차. 소외 1의 사망 당시 유족은 별지 1 기재와 같다. 그중 자녀 4명(피고 2, 소외 3, 소외 4, 소외 5)은 모두 상속을 포기하였다. 이어 배우자 피고 1과 동순위로 상속하게 된 손자녀 11명 중 8명도 상속을 포기하여, 결국 소외 1의 상속인으로는 배우자인 피고 1과 손자녀인 소외 5, 소외 6, 소외 7 등 4명만 남아 망 소외 1의 소송을 수계하게 되었다. 그런데 원고들은 이 사건 변론종결 후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중 손자녀에 해당하는 소외 5, 소외 6, 소외 7에 대한 소를 취하하였다.
위와 같은 상속관계를 종합하면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의 상속재산에 대한 지분은 3/9이다(이하 피고 2와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을 합쳐서 부를 때는 편의상 ‘피고들’이라 한다).
[인정근거] 다툼 없거나 이 법원에 현저한 사실, 공지의 사실, 갑 제13, 14, 15, 21, 22, 33, 36, 39, 45, 56, 57호증, 을 제1호증(가지번호 있는 것은 가지번호 모두 포함, 이하 같다)의 각 기재, 변론 전체의 취지
3. 당사자들의 주장
가. 원고들
1) 원고 5·18단체들
소외 1은 이 사건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① 5·18은 북한군, 공작원, 간첩 등의 개입으로 벌어진 폭동이다, ②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사격은 없었다, ③ 5·18 당시 국군은 폭력시위 등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발포한 것이고 무고한 시민을 향해 총구를 겨눈 것이 아니다, ④ 소외 1 자신은 5·18의 발단에서부터 종결에 이르기까지 관여한 바가 없기 때문에 학살에 대한 책임이 없다, ⑤ 1980. 5. 21. 옛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기 전 시위대가 운전한 장갑차에 계엄군 병사가 치여 사망하였다, ⑥ 5·18 당시 ‘암매장’이 있었다는 것은 유언비어이다, ⑦ 5·18 당시 시위대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비전향 장기수, 좌익사범, 간첩 등을 탈출시키기 위해 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하였다는 내용 등의 허위사실을 포함시켰고, 피고 2는 출판자로서 위와 같은 허위사실이 포함된 이 사건 회고록을 출판 및 배포, 판매하였다.
이로써 소외 1과 피고 2는 5·18민주화운동 관련 희생자들의 유족, 부상자, 공로자 등으로 구성되어 5·18민주화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계승, 선양하려는 목적으로 활동하는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하고 저해하였다.
2) 원고 5
소외 1은 원고 5의 삼촌이자 같은 가톨릭 사제로서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소외 2의 헬기 사격 관련 증언을 두고 ‘계엄군의 진압 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주장’이라고 폄하하고, 심지어 소외 2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모욕함으로써 그 유족인 원고 5의 고인에 대한 추모감정을 훼손하였고, 피고 2는 출판자로서 위와 같은 내용이 포함된 이 사건 회고록을 출판 및 배포, 판매하였다.
3) 구체적인 청구의 내용
가) 각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
따라서 원고들은 이 사건 회고록의 출판자인 피고 2에 대하여 , 인격권에 기한 방해배제청구권의 행사로서 별지 2 목록 기재 각 표현 및 별지 3 목록 기재 각 표현 중 ‘1심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각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원고 5는 그중 헬기 사격 관련 쟁점 표현들에 국한하여 청구원인으로 삼고 있다) 이 사건 회고록의 출판 등 금지를 구한다.
나) 손해배상청구
또한 소외 1과 피고 2는 위와 같은 허위사실과 심히 모욕적인 표현들을 담은 이 사건 회고록을 집필, 출판, 배포함으로써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 등 법인으로서의 인격권을 침해하고, 소외 2의 유족인 원고 5의 추모감정을 훼손하는 등의 정신적 고통을 가하였으므로, 피고들은 공동하여 원고들에게 그에 대한 위자료를 지급하여야 한다.
나. 피고들
피고들은 이 사건 소송에서 ‘어떤 표현행위가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볼 수 있는가’와 관련하여 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쟁점을 망라적으로 거론하며 다투고 있다. 그중에는 원고들의 주장 취지와는 맞아 떨어지지 않는 다분히 교과서적인 주장도 꽤 있다(예컨대 피고들은 "사회로부터 받는 객관적인 평가로서의 명예와 주관적인 명예감정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언급도 하나, 원고 5·18단체들은 단체 결성의 목적, 구성원들의 특성, 저명성, 그리고 5·18민주화운동을 기리기 위해 그동안 벌여 온 활동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이 사건 회고록의 표현이 그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로서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 등을 저해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단순히 그들 단체나 구성원들의 명예감정이 침해되었음을 청구원인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따라서 피고들의 진술 중 법적 쟁점을 형성하지 않는 것까지 하나하나 개별 판단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되, 그 언급의 취지만큼은 아래와 같이 의미 있는 주장들을 형성하는 배경들로 이해하여 반영하기로 한다.
1) 원고들을 특정하여 지칭한 바 없음(이른바 ‘피해자 특정의 문제’)
소외 1은 이 사건 회고록에서 원고들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어떤 표현을 한 사실이 없다.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관하여 일정한 견해를 표명하였을 뿐이다. 특정한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지도 않았는데 공적 사안인 5·18민주화운동에 관하여 원고 5·18단체들과 반대되는 견해를 언급하기만 하면 해당 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연결시킨다면 이는 피해자 특정의 법리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이다.
2) 일정 규모 이상의 집단에 대한 명예훼손은 판례 법리상 인정되지 않고, 법인에 대한 명예훼손에는 이르지 않았음
이 사건 회고록의 5·18관련 표현들이 설령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대법원은 개개인을 특정할 수 없는 큰 집단에 대한 명예훼손은 인정하지 않고 있으므로, 그것의 허위 여부와 관계없이 집단에 대한 명예훼손은 성립할 수 없다. 또한 법인에 대한 명예훼손은 자연인에 비해 성립 요건을 엄격하게 보아야 한다. 이 사건 회고록의 집필과 출간으로 인해 원고 5·18단체들의 목적사업 수행에 어떤 영향을 미칠 정도로 사회적 명성과 신용이 훼손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3) 의견표명과 사실적시는 구별되어야 함
진리의 검증은 자유로운 토론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 소외 1은 5·18민주화운동에 관하여 자신이 확보할 수 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석을 가미하여 일정한 견해를 표명한 것뿐이다. 5·18에 대한 해석을 원고 5·18단체들만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를 법적으로 재단함으로써 역사적 사건을 특정한 방향으로만 해석하여야 하는 제한을 두게 되면 다른 의견이 ‘숨 쉴 공간’이 없어져 표현의 자유가 본질적으로 훼손될 수 있다.
4) 표현이 갖는 의미는 책임주의 원칙에 따라 문언의 범위 내에서 해석하여야 함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 쓴 표현의 허위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해당 표현이 갖는 문언의 통상적인 해석 범위 내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여야 하는데, 원고들과 제1심은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 일정한 방향으로 해석을 가미하여 소외 1이 실제로 하지도 않은 표현을 우회적으로 암시하였다고 단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는 책임주의 원칙에 반한다.
5) 각론의 허위성 관련 주장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 적시한 사실관계는 모두 그가 확보한 객관적인 자료들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으로서 허위라고 보기 어렵다. 설령 일부 과장되거나 사실과 다른 부분이 섞여 있더라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이를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허위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6) 귀책사유 관련 주장(손해배상청구 관련)
가) 고의·과실 부존재
원고들이 문제 삼는 표현들 중 일부가 설령 허위라고 하더라도 집필자인 소외 1이나 출판자인 피고 2 입장에서 그것이 허위라는 점에 대한 인식이나 과실이 없었다. 원고들이 주장하는 사실관계 중 일부는 이 사건 회고록 집필 이후에 구체적인 증언들이 더 나오면서 밝혀진 것들도 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한 허위의 인식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나) 위법성조각사유
이 사건 회고록의 집필 및 출간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그의 인생 전반, 그리고 그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되돌아보고 후세에 기록으로 남기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는바, 원고들이 문제 삼는 이 사건 회고록의 각 표현들은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서 집필 경위나 참조한 자료의 내용 등을 고려하면 그것이 진실하다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으므로 위법성이 조각된다.
4. 이 사건의 쟁점
가. 총론적 쟁점들
위와 같은 주장을 종합하여 보면, 이 사건에서 원고들의 각 청구의 당부를 가리기 위해서는, 각 주제별로 개별 판단이 필요한 쟁점들(사실의 적시 여부, 허위성, 고의·과실과 위법성 등의 쟁점들) 이외에 모든 주제에 공통되어 그 당부를 우선 일단락지어 놓는 것이 바람직한 성격의 이른바 ‘총론적 쟁점들’이 있다. 그중 일부는 각론에 관련된 세부 판단과 연결해서 살펴보아야 하는 내용도 없지 않으나, 판결 이유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이를 따로 떼어 정리하는 것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것에 해당하는 총론적 쟁점으로는, ①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 서술한 5·18민주화운동 관련 표현들이 ‘원고 5·18단체들에 관한 것’임을 수용자 입장에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인지[이른바 ‘피해자 특정의 문제’로서 그 표현의 내용을 주위 사정과 종합하여 볼 때 그 표시가 피해자를 지목하는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이면 된다고 보는 대법원의 확립된 판례(대법원 2002. 5. 10. 선고 2000다50213 판결 등 참조)에 비추어 이 사건의 경우를 따져보아야 한다], ② 만약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이 사건 회고록의 표현들이 허위사실일 경우, 그것을 출판물에 인쇄하여 배포함에 따라 법인인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 등이 훼손되는 결과가 발생할 것이라고 볼 수 있는지, ③ 이와는 별도로 원고 5의 청구와 관련하여, 만약 ‘계엄군의 헬기사격’과 관련한 이 사건 회고록의 표현들이 허위사실로 인정될 경우, 그것으로써 망인인 소외 2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훼손되거나 또는 유족인 원고 5의 사회적 평가 내지 고인에 대한 명예감정, 추모감정을 침해하게 되어 불법행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는지[서울고등법원 2000. 1. 20. 선고 98나44705 판결은 사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표현과 관련한 인격권 침해의 내용을 위와 같이 정리하여 그 유족이 하는 정정보도 등 청구의 당부를 판단하였고, 대법원은 그러한 원심의 판단 기준을 수긍하고 그대로 유지하였다(대법원 2001. 1. 19. 선고 2000다10208 판결 참조)], ④ 저자인 소외 1과는 별도로 출판자인 피고 2에 대해서도 허위사실 적시에 따른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등으로 정리하여 볼 수 있다.
나. 각 주제별 표현들(각론)과 관련한 쟁점들
이 사건 회고록에 나타난 각 표현행위들로 원고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 또는 유족으로서의 추모 감정 등이 훼손되었는지 여부에 관한 개별적 판단에 관하여는 각각 ① 의견표명이나 단순한 논평에 해당하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표현들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을 무엇으로 확정할 수 있는지, ② 위와 같이 확정한 적시 또는 암시 사실이 각 허위인지, ③ (만약 허위라면) 그 허위사실의 적시가 법인인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 등을 저해하는 것과 개별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는지, ④ ‘계엄군의 헬기 사격’ 관련 표현들에 관해서는 그것이 소외 2의 조카인 원고 5의 유족으로서의 추모감정 등을 훼손하는 내용인지 등을 원고들의 출판 등 금지청구와 손해배상청구의 당부 판단에 공통된 쟁점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와 관련해서는, ⑤ 위 각 표현들이 허위라는 점 및 그 표현으로 각각 원고들의 명예 등 인격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고의 또는 과실이 있었는지, ⑥ 피고들이 주장하는 명예훼손 특유의 위법성조각사유(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서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항변)가 인정될 수 있는지 등을 추가로 판단하여야 한다.
이처럼 원고들은 허위사실 적시로 인한 명예훼손 등을 이유로 출판 등 금지청구와 함께 손해배상청구를 하고 있는바, 출판 등 금지청구의 법적 성격은 인격권에 기한 방해배제청구권이므로 허위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인정되면 해당 표현의 삭제를 명할 수 있고 표현행위자의 고의·과실 또는 위법성은 따로 요하지 않으나(대법원 2013. 3. 28. 선고 2010다60950 판결 등 참조), 이를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려면 위와 같이 고의·과실, 위법성 등의 요건이 추가로 인정되어야 한다.
5. 판단
가. 총론적 쟁점들에 관하여
1) 피해자 특정 여부
공표된 사실적 주장에 의하여 피해를 받은 자라 함은 그 공표내용에서 지명되거나 그 공표내용과 개별적인 연관성이 있음이 명백히 인정되는 자로서 자기의 인격적 법익이 침해되었음을 이유로 그 침해상태의 배제를 구할 이익이 있는 자를 가리킨다(구 언론기본법 및 방송법상의 정정보도명령 청구권자의 범위에 관한 대법원 1986. 1. 28. 선고 85다카1973 판결, 대법원 1991. 1. 15. 선고 90다카25468 판결 등의 취지를 인격권에 기한 방해배제청구권을 행사하는 이 사건에 적용할 수 있도록 가다듬었다).
명예훼손에 의한 불법행위가 성립하려면 피해자가 특정되어 있어야 하지만, 그 특정을 할 때 반드시 사람의 성명이나 단체의 명칭을 명시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사람의 성명이나 단체의 명칭을 명시하지 않거나 또는 두문자나 이니셜만 사용한 경우라도 그 표현의 내용을 주위사정과 종합하여 볼 때 그 표시가 피해자를 지목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이면 피해자가 특정되었다고 할 것이다(대법원 2002. 5. 10. 선고 2000다50213 판결 등 참조).
앞서 본 기초사실 및 갑 제1 내지 5, 12, 13, 21, 22, 30 내지 34, 36, 37, 38, 45, 48, 53, 56, 57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실 및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원고 5·18단체들의 명칭을 직접 명시하지는 않았더라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표현들은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 사실적 주장의 대상으로 원고 5·18단체들을 묵시적으로나마 지목하고 있다는 점을 이 사건 회고록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특정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가) 소외 1은 이 사건 회고록의 5·18민주화운동 관련 서술에서, "◁◁◁ 공장에 집결해 수백 대의 차량을 끌고 나간 사람들(406쪽)", "시위대는 (중략) 공수부대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졌다(470쪽)", "특수훈련을 받은 게릴라 수준의 공작원들(524쪽)", "총기를 든 시위대의 공격(518쪽)",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520쪽)", "그들은 왜 (중략) 교도소 공격에 집착했을까(522쪽)",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사살된 사람들(522쪽)" 등의 표현을 함으로써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을 (자신의 시각에서 하는 부정적인 평가를 더해) 직접 지목하였다. 또한 "계엄군의 진압 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사람들(480쪽)", "헬리콥터에 장착한 화기의 성능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482쪽)", "광주가 계속 신화의 영역에 있기를 원하며 불편할 수도 있을 진실이 더 이상 드러나길 바라지 않은 세력(541쪽)", "사람들은 (중략) 나에게 5.18사태의 진실에 관해 물었다(381쪽)" 등의 표현을 함으로써 자신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서술하고자 하는 사실적 주장과는 반대되는 사실 인식을 가지고 있는 어떤 한 무리의 사람들을 여러 차례 지목하였다. 소외 1이 지목한 사람들은 대체로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과 그 유족, 관련 연구자, 5·18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등으로 좁혀볼 수 있을 것이다. 그중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과 그 유족들은 원고 5·18단체들의 구성원들이기도 하다. 소외 1이 원고 5·18단체들 개개의 명칭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위와 같이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과 자신의 사실적 주장과 반대되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무리를 포괄적으로나마 언급한 이상, 통상적인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을 접하는 일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그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법인인 원고 5·18단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밖에 없다.
나) 원고 5·18단체들은 소외 1, 소외 9 정권 당시의 임의단체 시절에서부터 정부의 인가를 받은 민법상의 사단법인을 거쳐, 현재는 5·18유공자법에 따라 설립·운영되는 법정단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 1995. 12. 21. 제정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5·18민주화운동법’이라 한다)은 정부로 하여금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하여야 한다(제5조)고 규정하였는데, 원고 5·18단체들은 오랫동안 5·18민주화운동의 책임자 처벌, 진상규명, 참여자들의 명예회복과 관련한 활동을 주도하면서 위 기념사업의 한 축을 담당하여 왔고, 정부도 예산지원 등의 방법으로 원고 5·18단체들을 후원하여 왔기 때문에 원고 5·18단체들의 존재 및 활동에 관한 사실은 우리 사회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다. 비록 개개 단체 명칭까지는 아니더라도 ‘5·18 관련 단체들’로 묶여서는 상당한 수준의 저명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 5·18유공자법 제96조는 5·18민주유공자나 그 유족 또는 가족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영리단체를 조직하거나 그 밖에 단체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제1항), 원고 5·18단체들과 유사한 명칭을 사용하여 오인 우려가 있는 단체를 설립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제2항). 그리고 이러한 취지의 규정은 2002. 1. 26. 법률 제6650호로 5·18유공자법이 제정된 이래 계속 유지되어 왔다(제정 당시의 광주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제68조 등 참조). 이처럼 오래 전부터 아무나 5·18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를 설립하거나 표방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현재의 원고 5·18단체들은 종전 단체의 지위를 승계하여 이제 법정단체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특정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언급은 전부 그 역사적 사실을 기념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들을 지목하는 것으로 평가해야 하는가’라는 피고들의 의문제기는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온당하지 않다. 5·18민주화운동에 관련된 허위사실의 적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원고 5·18단체들을 지목하는 것으로 해석하더라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잠재적인 피해자가 무한정 생길 수 있는 등의 부작용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라) 오히려 앞서 본 여러 사정에다가, 5·18민주화운동 관련 사실관계가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에 미치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고려하면(예를 들어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 속에는 북한군 특수요원이 섞여있었다’라는 사실적 주장은 곧바로 참여자들과 그 유족으로 구성된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직결되는 문제가 된다), 이 사건 회고록에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사실관계를 언급하면서 특별히 5·18단체들의 명칭을 직접 거론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일반 독자들 입장에서는 그 사실관계에 대한 언명 자체가 5·18단체들에 대한 평가를 내포하고 있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2) 5·18민주화운동 관련 허위사실의 적시가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 등을 훼손하는지
민법 제764조에서 말하는 명예란 사람의 품성, 덕행, 명예, 신용 등 세상으로부터 받는 객관적인 평가를 말하는 것이고 특히 법인의 경우 그 사회적 명예, 신용을 가리키는데 다름없는 것으로, 그 명예를 훼손한다는 것은 그 사회적 평가를 침해하는 것을 말한다(대법원 1988. 6. 14. 선고 87다카1450 판결). 법인의 목적사업 수행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법인의 사회적 명성, 신용을 훼손하여 법인의 사회적 평가가 침해된 경우에는 그 법인에 대하여 불법행위를 구성한다(대법원 1999. 10. 22. 선고 98다6381 판결). 표현행위가 명예훼손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할 때에는 사용된 표현뿐만 아니라 발언자와 그 상대방이 누구이고 어떤 지위에 있는지도 고려해야 한다(대법원 2018. 10. 30. 선고 2014다61654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
앞서 본 기초사실 및 위 1)항에서 든 증거들에 의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실 및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은 이 사건 회고록의 집필 과정에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여러 가지 사실을 주장하였는데, 그중 허위사실이 포함되어 있을 경우 그러한 내용이 담긴 이 사건 회고록을 사회 일반에 배포하는 것으로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하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봄이 타당하다.
가) 원고 5·18단체들은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의 유족, 부상자 또는 참가자로서 국가유공자인 사람 등으로 구성된 단체이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임의단체로 결성되어 활동하던 시절을 지나 정부가 인가한 사단법인을 거쳐 5·18유공자법에 의해 설립, 운영되는 법정단체(통상 ‘공법단체’라고 부른다)로서 현재는 일정한 법적,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고 있는 법인들이다.
나) 5·18민주화운동이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 원고 5·18단체들의 구성원이 그동안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로서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이 지체되어 받아 온 각종 불이익과 극심한 정신적 고통 등을 감안하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허위사실의 주장을 널리 유포시키는 것은 위와 같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이제 법정단체로서 자리 잡은 5·18단체들의 지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위험이 있는 행위임이 명백하다. 특히 5·18단체들의 역사성과 현재 법정단체로서의 지위를 고려하면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이들 단체를 법적으로 보호하여야 할 필요성과 가치도 충분하다.
다) 원고 5·18단체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소외 1의 대통령 재임 당시 임의단체로 있을 무렵 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군사반란과 내란으로 집권한 소외 1 정권의 치부를 드러내기 위한 활동을 용기 있게 지속해왔고, 그로인해 5·18민주화운동의 실상과 이른바 ‘쿠데타’로 집권한 소외 1 정권의 반헌법적 성격이 우리 사회에 제대로 알려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져 자유민주적 헌법 질서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의 민주정부에서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12·12, 5·17 군사반란과 5·18 관련 내란 행위에 합당한 법적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은 5·18민주화운동 당시는 물론이고 그로부터 1987년 헌법 개정에 이르기까지 원고 5·18단체들(그 전신까지 포함)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지속적으로 위와 같이 군사반란 및 내란 세력에 맞서 싸운 시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 구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수차 개정을 거쳐 현재는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로 시행되고 있다, 이하 ‘5·18보상법’이라 한다) 및 1995년 5·18민주화운동법이 각 제정되어 포괄적인 명예회복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내내 억울하게 ‘폭도’라는 누명을 써왔다. 원고 5·18단체들이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 결과 현재는 상당 부분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이 규명되었고, 관련자들은 그 명예가 회복되어 국가유공자로 등록되거나 일정한 배상과 보상을 받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원고 5·18단체들의 구성, 그동안의 활동 경과 등을 고려하면, 허위사실을 유포함으로써 5·18단체들의 지난한 진상규명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염려가 있는 표현행위는 그 사회적 해악과 위험성이라는 측면에서 통상적인 법인, 단체의 활동에 대한 사실 왜곡 행위와 같은 평면에 놓고 비교할 수 없다.
라) 더군다나 그 표현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라 소외 1이라는 점은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소외 1은 내란이라는 정을 모르는 다수의 계엄군을 이용하여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광주시민과 학생들을 잔혹하게 유혈진압하였다는 범죄사실로 내란수괴죄의 유죄 확정판결을,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상무충정작전)’의 계획, 승인, 실행과 관련해서는 내란목적살인죄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장본인이다. 그러한 범죄전력이 있는 사람이 스스로 허위사실을 적시하여 5·18민주화운동의 성격을 왜곡하는 행위를 한다면, 피해자단체의 성격을 가진 원고 5·18단체들의 구성원들로서는 분노·격정·회한 등의 감정을 느끼고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게 될 것임은 누구라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다만 이 사건은 자연인인 그 구성원들이 직접 원고가 된 사건이 아니라 원고 5·18단체들이 법인으로서 명예훼손을 당하였는지가 쟁점인 사건이므로 구성원들이 받을 정신적 고통을 그대로 단체에 투영할 수는 없겠으나, 만약 법인에게도 자연인의 감정에 비견할 수 있는 어떤 ‘평온함’이라는 상태가 있다면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사실 적시로 그 평온함에 꽤나 격렬한 수준의 동요가 찾아 올 것임은 분명하다. 자연인이 받는 정신적 고통과 유사하게 단체 활동의 평온함에 격렬한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표현행위 역시 직·간접적으로 그 단체들의 이후 상태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해당 단체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마) 법과 정치의 영역에서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5·18민주화운동이 어느 정도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찾게 되었지만, 우리 사회를 동서로 가르는 지역주의와 이념에 따른 극단적 진영주의 등의 영향으로 5·18민주화운동의 입법, 사법, 정치, 역사적 의미에 관한 시민사회의 합의를 부정하고, 이를 폄훼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원고 5·18단체들의 순수성과 정당성, 공공성 등에 대한 부당한 시비와 공격도 늘 뒤따랐다. 소외 1의 5·18관련 표현들을 위와 같은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 놓고 보면,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이라는 형식을 띤 어떤 사실적 주장이 허위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그에 따르는 파장은 만만치 않을 수 있다. 즉 이 사건 회고록의 출간이 일종의 ‘방아쇠’와 같은 역할을 함으로써 그동안 공론의 장에서 합리적 시민들의 상식에 입각한 집단지성 앞에 겉으로 내놓고 표출하지 못하던 5·18단체들에 대한 부당한 시비와 공격, 폄훼가 봇물 터지듯 재발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소외 1의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허위사실 적시는 결코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3) 고 소외 2에 대한 ‘헬기 사격’ 관련 허위사실 적시가 유족인 원고 5에 대한 불법행위가 되는지
진실에 부합하지 아니하는 표현행위를 함으로써 망인의 사회적 평가와 아울러, 그의 유족인 원고 자신의 사회적 평가 내지 고인에 대한 명예감정, 추모감정을 침해하여 명예를 훼손하면 불법행위 책임이 있다(사망한 소외 10 전 대통령이 과거 재임 당시 제주 4·3사건과 관련하여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였다는 내용의 신문 보도를 허위사실 적시로 인정하고, 이 전 대통령의 유족에 대한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한 서울고등법원 2000. 1. 20. 선고 98나44705 판결의 취지 및 이를 그대로 수긍한 대법원 2001. 1. 19. 선고 2000다10208 판결 등 참조).
사람은 생존한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는 것이므로(민법 제3조), 이미 사망한 사람에 관하여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표현이 직접 망인에 대한 불법행위가 된다거나, 그로 인해 이미 사망한 사람에게 어떤 민법상의 권리가 발생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만약 망인과 일정한 혈연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생전의 그 사람과 긴밀한 교류를 바탕으로 망인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설정하여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것을 자신이 갖는 정체성의 한 부분으로 삼아 온 유족이 있다면, 해당 망인에 관하여 허위 사실을 적시하는 행위는 간접적으로나마 유족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해시키고, 유족으로써 마땅히 가져야 할 명예감정이나 추모감정을 침해하여 불법행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다.
앞서 본 기초사실 및 당사자들 사이에 다툼이 없거나 갑 제13, 14, 15, 39, 52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실 및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헬기 사격’ 관련 쟁점과 관련하여 허위사실을 적시하거나 망인이 된 소외 2에 대한 심히 모욕적인 표현을 하였다면, 이는 일정한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망 소외 2와 생전에 긴밀한 교류를 하고 망인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설정하여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삼아 온 원고 5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해시킬 뿐만 아니라, 유족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망인에 대한 명예감정, 추모감정을 부당하게 훼손하여 그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것으로서, 원고 5에 대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것이다.
가) 원고 5는 소외 2의 뒤를 이어 가톨릭 사제가 되어 같은 교구에서 함께 봉직하였다. 광주 남구 ◇◇동 소재 ☆☆자매원이라는 가톨릭 계열 사회복지단체의 대표이사직을 고인으로부터 물려받는 등 직계가족에 버금갈 정도의 밀접한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지내왔다.
나) 사회적인 의미의 혼인을 하지 않는 가톨릭 사제의 특성상 소외 2의 경우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혈족인 자녀를 둘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조카로서 자신의 뒤를 이어 가톨릭 사제가 되어 같은 교구, 같은 사회복지단체에서 함께 일한 원고 5에 대하여 세속적인 자녀 이상의 긴밀한 정서적 감정적 교류를 하여 왔을 것임은 능히 추단할 수 있다.
다) 원고 5는 이 사건 회고록이 출간되자 그중 ‘헬기 사격’과 관련하여 소외 2를 언급한 부분에 관해 친족인 고소권자로서 직접 소외 1을 사자명예훼손으로 수사기관에 고소하는 등 망인의 사후 유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그 사건은 제1심에서 유죄판결이 선고되었으나, 그 항소심에 이르러 소외 1이 사망함에 따라 공소기각으로 종결되었음은 앞서 본 바와 같다).
라) 그 밖에도 원고 5는 소외 2의 생전 또는 사후에 지속적으로 그와의 밀접한 관계를 다수의 언론 매체 등을 통하여 공표하는 등(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소외 2의 아바타"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망인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을 공공연하게 표방하였다.
마) 이 때문에 허위사실로 소외 2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그에 대한 심히 모욕적인 표현을 할 경우, 이것이 원고 5에 대한 사회적 평가의 훼손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추단하기에 무리가 없다. 또한 원고 5의 고인에 대한 명예감정이나 추모감정은 여느 직계비속이 부모에 대하여 갖는 심리상태에 못지않을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수한 형태의 명예감정이나 추모감정도 직계존비속 사이에서 형성되는 것 못지않게 법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
바)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언론중재법’이라 한다) 제5조의2 제3항은 사망한 사람에 대한 언론중재법상의 구제절차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망인의 배우자와 직계비속을 기본적으로 거시하고, 직계비속이 없는 경우에는 형제자매가 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피고들은 원고 5가 위 범위에 속하지 않으므로 소외 2에 대한 명예훼손 또는 인격권 침해에 관하여 이 사건 소를 제기할 자격이 없다는 취지로 주장한다. 그러나 언론중재법에 따른 구제절차를 수행할 자격이 없다고 하여, 망인과의 특별한 관계를 내세워 자기의 고유한 인격권 침해를 이유로 민사상의 권리구제를 청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피고들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
4) 출판물에 의한 허위사실 적시와 출판자의 책임
아래에서 다시 보는 바와 같이, 원고들의 청구 중 일부 내용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는 인격권에 기한 방해배제청구의 성격을 갖기에 고의·과실, 위법성 등 귀책사유를 요하지 않으므로, 만약 이 사건 회고록의 내용 중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부분이 허위사실로 밝혀질 경우 그 부분을 삭제하지 않고는 출판 등을 하지 말아야 할 의무는 피고 2의 귀책사유와 무관하게 출판자로서 당연히 수인하여야 할 성질의 것이다.
다음으로 손해배상청구에 관하여 살피건대, ① 피고 2는 이 사건 회고록에 ‘펴낸이’로 이름을 올린 사람으로서 그런 경우 통상 직접 또는 자기 아래에 편집자나 감수자를 두어 해당 도서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검토한 뒤 최종적인 출판, 배포, 유통, 판매를 결정하게 되는 지위에 있는 점, ②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저자가 건네 준 글을 그대로 출판하여 허위사실 적시의 결과가 발생하였다면 그 자체로 출판자가 응당 하여야 할 일을 다 하지 않은 과실이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점, ③ 그가 저자인 소외 1의 자녀(장남)인 점을 고려하면 전직 대통령인 아버지가 ‘회고록’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하는 도서의 내용에 관하여는 다른 보통의 출판물에 비해 그 내용이나 진실성, 배포 시 파급효과 등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보아야 하는 점, ④ 통상적으로 출판자가 도서의 배포와 판매를 맡아 하고, 출판자가 수령한 판매수익 중 이른바 ‘인세’라는 명목으로 저자에게 배분하거나 각종 비용에 충당하고 남는 이익은 출판자에게 귀속되는 도서출판 업계의 유통구조상, 피고 2는 출판자로서 이 사건 회고록의 출간에 따른 경제적인 이익을 공동으로 향유하게 되는 사람이기도 한 점 등의 제반 사정을 고려하면, 만약 이 사건 회고록의 내용 중 5·18민주화운동 관련 부분이 일부라도 허위라서 그로 인해 원고들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발생시켰다면, 저자인 소외 1과는 별개로 귀책사유가 부인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피고 2는 저자인 소외 1과 공동으로 원고들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져야 한다.
나. 각 개별표현들(각론)에 관하여
1) 전제되는 법리
개별 표현들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의 확정과 그 허위성 등을 판단함에 있어 기준으로 삼을 법리들은 아래와 같다.
○ 명예훼손이 성립하려면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만한 구체적인 사실의 적시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사실의 적시란 반드시 사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경우에 한정할 것은 아니고,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표현에 의하더라도 그 표현의 전 취지에 비추어 그와 같은 사실의 존재를 암시하고, 또 이로써 특정인의 사회적 가치 내지 평가가 침해될 가능성이 있을 정도의 구체성이 있으면 족하다(대법원 2006. 5. 12. 선고 2004다35199 판결 등 참조).
○ 사실을 적시하는 표현행위뿐만 아니라 의견 또는 논평을 표명하는 표현행위도 그와 동시에 묵시적으로라도 그 전제가 되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면 그에 의하여 민사상의 명예훼손이 성립할 수 있고(대법원 2001. 1. 19. 선고 2000다10208 판결 등 참조), 일정한 의견을 표명하면서 그 의견의 기초가 되는 사실을 따로 밝히고 있는 표현행위의 경우에도 적시된 기초 사실만으로 타인의 사회적 평가가 침해될 수 있는 때에는 명예훼손이 성립할 수 있다(대법원 2009. 4. 9. 선고 2005다65494 판결 등 참조).
○ 책에 쓴 사실적 주장이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이 되려면 적시된 사실이 특정인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것으로서 허위이어야 하는데, 그 허위 여부의 판단에서는 일반 독자가 그 책의 내용을 접하는 통상의 방법을 전제로 그 글의 전체적인 취지와의 연관 아래에서 글의 객관적 내용, 사용된 어휘의 통상적인 의미, 문구의 연결 방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독자들에게 주는 전체적인 인상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하고, 여기에다가 그 책 내용의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속에서 당해 표현이 가지는 의미를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대법원 2012. 11. 15. 선고 2011다86782 판결 등의 취지 참조).
○ 명예는 생명, 신체와 함께 매우 중대한 보호법익이고 인격권으로서의 명예권은 물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배타성을 가지는 권리라고 할 것이므로, 사람의 품성, 덕행, 명성, 신용 등의 인격적 가치에 관하여 사회로부터 받는 객관적인 평가인 명예를 위법하게 침해당한 자는 손해배상(민법 제751조) 또는 명예회복을 위한 처분(민법 제764조)을 구할 수 있는 이외에 인격권으로서 명예권에 기초하여 가해자에 대하여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침해행위를 배제하거나 장래에 생길 침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침해행위의 금지를 구할 수도 있다. 인격권 침해를 이유로 한 방해배제청구권으로서 삭제 청구의 당부를 판단할 때는 그 표현내용이 진실이 아니거나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이 아닌 기사로 인해 현재 원고의 명예가 중대하고 현저하게 침해받고 있는 상태에 있는지를 언론의 자유와 인격권이라는 두 가치를 비교·형량하면서 판단하면 되는 것이고, 피고가 그 표현이 진실이라고 믿은 데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등의 사정은 형사상 명예훼손죄나 민사상 손해배상책임을 부정하는 사유는 될지언정 삭제를 구하는 방해배제청구권을 저지하는 사유로는 될 수 없다(대법원 2013. 3. 28. 선고 2010다60950 판결 등 참조).
○ 법인도 자신들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위법한 표현행위 등에 대하여 부작위청구권을 행사하는 권리주체가 될 수 있다(대법원 2006. 5. 26. 선고 2004다62597 판결 등 참조).
2) 인정사실(=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12·12, 5·17 군사반란 및 5·18 관련 내란과 그에 맞선 광주시민·학생들의 민주화운동 전개 과정)
이 사건 회고록의 집필을 통하여 소외 1이 명시적으로 적시하거나 또는 간접적 우회적인 방법으로 암시한 5·18민주화운동 관련 사실의 허위성 여부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 판단의 기초가 되는 실제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12·12, 5·17 군사반란 및 5·18 관련 내란 사건(헌정질서 파괴 범죄로 평가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있다)의 개요와 위와 같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맞서 헌법제정권력인 국민들의 저항권 행사라는 입법적·사법적·정치적·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전개 과정을 우선 살펴보기로 한다.
아래 각 사실은 소외 11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피격 사망에서부터 광주시민들의 저항권 행사를 무력으로 제압한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의 실행 및 이에 뒤이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라 한다)를 통한 정권 장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관하여, 당사자들 사이에 다툼이 없거나 이 법원에 현저한 사실,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공지의 사실, 그리고 그동안 여러 대법원 확정판결로 인정된 사실 및 갑 제12, 13, 21, 22, 30, 31, 32, 37, 38, 40 내지 43, 48호증, 을 제1, 121 내지 124, 179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인정되는 사실 중 논란의 여지가 없거나 적은 부분만을 정리한 것이다.
가) 소외 11 전 대통령 시해 사건과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12·12 군사반란
소외 1은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이른바 ‘정규육사’ 1기)로 졸업한 이래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대리 겸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대통령 경호실차장보, 국군보안사령관 등의 직책을 차례로 거치면서 권력의 동향과 정국의 향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앙정보부장 소외 12는 1979. 10. 26. 서울 ▷▷동 안전가옥에서 소외 11 당시 대통령과 연회를 하던 도중 권총으로 소외 11 전 대통령을 쏘아 사망하게 하였다(이하 소외 12에 의한 소외 11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을 ‘10·26 사건’이라 한다).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서거에 따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소외 1은 10·26 사건을 수사할 계엄사령부 소속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이 되었다.
소외 1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10·26 사건과 관련하여 이재전 대통령경호실 차장을 직무유기혐의로 구속하였는데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소외 13 육군참모총장(이하 ‘소외 13 총장’이라 한다)이 위 사람을 석방하는 등 10·26 사건의 책임자 처벌 범위에 관하여 두 사람의 의견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소외 1이 독단적으로 처리한 일에 대하여 소외 13 총장이 나무라거나 주의를 주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1979. 11. 무렵에는 이른바 ‘정치군인’들을 전역시켜야 한다는 군(軍) 내의 여론과 관련하여, 소외 13 총장이 군인으로서의 품위를 잃은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정리하겠다고 말하는 등 소외 1과 같이 정치와 관련된 보직에서 상당기간 근무한 일이 있는 장교들은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소외 1, 소외 9, 소외 14, 소외 15, 소외 16, 소외 17, 소외 18, 소외 19, 소외 20, 소외 21, 소외 22, 소외 23, 소외 24, 소외 25, 소외 26 등 이른바 ‘신군부 세력(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피고인들 중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이들’로서 이하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이라 한다)은 소외 13 총장을 배제하고 자신들이 군의 실권을 장악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점에 집단적 또는 개별적, 순차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에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자신들을 지지하거나 그에 동조하는 군인, 공무원 등을 규합·확산하고 그에 대한 반대세력을 약화·동요시키기 위해 1979. 12. 12.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또는 보안사령부 소속 군인들을 시켜 소외 13 총장을 군법회의법 등으로 정한 절차를 무시하고 총장 공관 주변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등의 실력행사를 거쳐 위법하게 체포하였다. 소외 27 육군참모차장, 소외 28 수도경비사령관, 소외 29 특전사령관 등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위와 같은 행위를 군사반란으로 인식하고, 이를 저지 또는 진압하기 위해 일선 부대에 정식 지휘계통을 통하지 않은 누군가의 출동명령에는 일절 응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한편, 자신들이 지휘할 수 있는 몇몇 부대들을 출동시켜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소외 18의 사무실인 제30경비단장실에 모여 일종의 ‘지휘부’를 구성한 상태에서 군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자신들의 사사로운 영향력을 이용해 서울 인근, 수도권 등지에서 전격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였다.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 측 병력은 병기를 휴대한 채 서울로 진주하여 소외 27, 소외 28, 소외 29 등 군내 반대세력들을 제압하고, 국방부와 육군본부, 중앙청 등을 모두 점령하였다. 이어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당시 소외 30 대통령이 머물던 공관 주변을 군인들로 에워싸는 등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소외 13 총장 체포에 대한 대통령의 사후 재가를 받아냈다.
나)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등의 군사반란과 내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위와 같이 12·12 군사반란에 성공한 뒤, 소외 9는 수경사령관에, 소외 14는 제3군사령관에, 소외 15는 육군참모차장에, 소외 26은 특전사령관에, 소외 25는 국방부장관에, 소외 24는 육군참모총장에 각 취임하여 군의 지휘권을 명실상부하게 장악하였다. 소외 1은 보안사령관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다시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여 정보기관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군을 포함한 국가권력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1980. 5. 초부터 소외 1의 지시에 의하여 보안사 정보처장 소외 31과 소외 19, 소외 20, 소외 21 등이 비상계엄의 확대, 국회해산, 비상대책기구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을 준비했다. 위 소외 21 등은 소외 1, 소외 9, 소외 14, 소외 15, 소외 16, 소외 26 등과 회동하여 이를 검토하고, 소외 24, 소외 25에게도 이를 설명하여 그들의 협조를 받기로 하였다. 이와 함께 소외 21 등은 예비검속대상자, 권력형 부정축재를 이유로 재산을 몰수할 대상자, 정치활동을 금지할 대상자 등을 선정하였다.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1980. 5. 17.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 그들로 하여금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건의하는 결의를 하도록 하였다. 군부의 의견이 있는 것을 내세워,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상대로 같은 날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강압하고 병기를 휴대한 병력으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한 상태에서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여 국무위원들을 강압·외포시키는 등의 폭력적 불법수단을 동원하여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의결·선포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5. 18. 01:45 무렵부터는 무장한 군인들을 국회의사당에 배치·점거하여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5. 20. 무렵에는 일부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물리력으로 저지하는 등 일련의 군사반란 및 내란 행위를 감행하였다.
다) 5·18민주화운동의 전개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유혈 진압
한편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포함한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의 실행을 모의할 당시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여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진압을 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를 그 진압에 투입할 것을 계획하였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전 미리 전국의 대학과 주요 보안목표에 계엄군을 투입하는 조치를 취해놓았다.
위와 같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계엄군 배치 계획에 따라 특전사 7공수여단 병력들이 1980(이하 이 항에서는 모두 1980년을 의미하므로 연도 기재를 생략한다). 5. 18. 01:10 무렵 M-16 소총 등을 휴대한 채 ♡♡대학교와 ●●대학교를 점거하였다. 5. 18. 10:00 무렵에는 200여 명의 학생들이 공수부대원들의 학생에 대한 구타를 비난하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는 등 시위를 하였다. 그러자 위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의 강제 해산을 시도하며 이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와 머리 등을 무차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하여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5. 18. 10:30 무렵 다른 학생 600여 명과 함께 광주시내 중심지로 이동 집결하여 "계엄 해제, 소외 1 퇴진, 소외 32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경찰 병력과 격렬한 공방을 벌이는 등 시위가 광주 시내 중심가로 점차 확산되었다. 위 공수부대원들은 5. 18. 16:00 무렵 시위대와 맞서고 있는 경찰을 지원하기 위해 금남로 일대로 이동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를 해산시키면서 인근 점포나 골목, 건물 안까지 시위대를 추적하여 체포하고, 그 과정에서 시위에 참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시민들을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심지어 머리를 때리거나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 등을 벗기고 기합을 주기도 하는 등의 과잉진압을 하여 광주시민 405명을 연행함과 동시에 8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5. 19. 00:50 무렵 11공수여단 병력들이 M-16 소총 등을 휴대하고 광주에 증파되었다. 이들은 차량에 탑승하고 배속 받은 장갑차의 선도로 광주시민들 앞에서 위력시위를 하였다. 그런데 청각장애인 소외 33(남, 23세, 최초 사망자)이 전날 계엄군의 진압봉에 맞아 부상을 입고 국군광주통합병원에 후송되었다가 후두부열상 등으로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면서, 5. 19. 10:00 무렵 일반 시민들까지 대규모로 시위 학생들에 가세하여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항의하였다.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은 이들을 소총 개머리판과 진압봉으로 무차별 가격하고 심지어는 일부 부대원들이 착검한 총을 휘두르는 등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광주 시민들이 부상을 입었고, 그중 소외 34(남, 34세)가 전두부열상 등으로 사망하였다(2번째 희생자, 그에 관하여는 실제로 총상으로 사망하였음에도 사망 원인에 관한 검시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5. 19. 16:30 무렵에는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계엄군의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 의해 포위되자 총기를 발포하였고, 그로 인해 당시 고등학생이던 소외 35가 총상을 입었다.
5. 20.에도 오전부터 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와 시민·학생들 사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가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혀진 채 구타를 당하는 등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계속되었고, 이를 목격하고 격분한 택시기사들은 5. 20. 오후 무등경기장 앞으로 일제히 모여 200여 대의 택시에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금남로 방향으로 행진하는 차량시위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흥분한 일부 시민들이 트럭, 버스 등을 타고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기도 하였다. 3공수, 7공수, 11공수여단 병력은 이에 맞서 최루탄과 진압봉을 사용한 강경진압을 계속하였고, 5. 20. 23:00 무렵 광주역 앞에서는 3공수여단 12, 15대대 병력이 시위대의 차량 돌진에 대응, 발포하면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5. 21. 12:00 무렵 3공수여단 병력은 ♡♡대학교 앞에서 차량 돌진 등을 시도하는 시위대에 발포하여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광주시민이 총상으로 사망하였다. 5. 21. 13:00 무렵에는 전남도청 앞에서 11공수여단 병력이 장갑차와 버스를 이용하여 접근해 오는 시위대에 일제 사격을 시작하였다. 이어 인근 건물 옥상에 배치된 병력까지 시위대를 향하여 집단 발포하여 소외 36(남, 26세) 등이 총상으로 사망하는 등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위와 같은 집단 발포 직후에는 전남도청 주변뿐 아니라 전남대 부근에서도 계엄군의 총기 사격이 이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집 앞에 나와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던 소외 37(여, 23세)이 총격을 받고 쓰러져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광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경찰서, 지소, 파출소 등에서 총기와 실탄을 확보하여 무장 저항을 시작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은 전남도청 부근 일대에서 이들과 수차례 총격전을 벌였다. 시민과 학생들의 무장 저항이 격해지자 계엄군은 5. 21. 저녁 무렵 병력을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시키되, 광주의 저항 움직임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시 외곽 봉쇄작전에 주력하기로 하였다. 시 외곽 봉쇄 과정에서 계엄군은 아래 표와 같이 시위대뿐만 아니라 시위와 무관한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무차별 총격을 가해 어린이를 포함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부대명 각 생략)일시(장소 각 생략)내용피해 ?5. 21. 22:10 무렵?차량에 나눠 타고 목포 쪽에서 광주 쪽으로 이동하던 시위대에 총격시위대 버스 2대 전복 ?5. 22. 01:00 무렵?외곽으로 빠져나가려는 시위대에 총격소외 38 사망 ?5. 22. 08:30 무렵?그곳을 빠져나가려는 승용차에 총격소외 39 사망 5. 22. 16:00~17:00?시위대에 총격소외 40 등 6명 사망 ?5. 23. 05:30 무렵 10:00 무렵?시위대에 총격소외 41 등 2명 사망 ?5. 23. 09:00 무렵?광주에서 화순 방향으로 향하던 미니버스에 집중사격소외 42 등 7명 사망 ?5. 24. 13:30 무렵?시위대에 총격하고 이어 주변 지역에 무차별 총격놀이터에서 놀던 소외 43(남,11세)와 저수지에서 놀던 소외 44(남,12세) 사망 ?5. 24. 13:55 무렵?공수부대 간 오인사격으로 계엄군 9명이 사망한 것과 관련, 그 일대를 수색하면서 마을 주민들에게까지 총격소외 45 등 사망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전남도청을 근거지로 항쟁 지휘부를 구성하고, 자체적으로 치안 유지 활동을 벌였으며, 여러 차례 시민 궐기대회를 개최하는 등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반민주적인 정권장악 시도와 공수부대의 발포, 강경진압 등에 저항하는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자 소외 1, 소외 24, 소외 25 등은 이를 무력으로 조속히 진압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육본 작전지침으로 광주 재진입작전 계획(소위 ‘상무충정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소외 46 전교사 사령관으로 하여금 이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위 작전계획은 다소간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최대한 신속하게 위 항쟁 지휘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5. 26. 23:00 무렵부터 공수여단 특공조의 침투작전이 시작됐다. 이를 필두로 계엄군 병력은 5. 27. 04:00 무렵 전남도청 후문을 넘어 최후 항쟁을 결의하고 남아 있는 무장 저항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하면서 전남도청 건물에 진입하였고 5. 27. 05:21 이를 완전히 점령했다. 또 다른 병력은 5. 27. 05:06 광주공원을, 5. 27. 04:46 ■■빌딩과 ◆◆호텔을 각각 점령했다. 이어 5. 27. 06:20 ♧☆☆ 건물을 치열한 총격전 끝에 확보하여 모두 295명의 저항 시민을 체포하였다. 그 교전과정에서 소외 47 등 광주시민과 학생 18명이 사망하였다.
라) 국보위를 통한 정권 장악과 소외 1의 두 차례 대통령 재임
위와 같이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제압한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1980. 5. 27. 대통령 자문기구 형식으로 국보위 및 그 산하의 상임위원회를 설치했다. 이어 소외 1은 5. 31. 그 상임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국보위는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등 중요한 국정시책을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과 내각에 통보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국보위는 사실상 국무회의의 기능을 대신하였고, 그 산하 상임위들 역시 행정 각 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직접 수행하였다. 이로써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국보위를 통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행정 각 부를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소외 1은 1980. 8. 27. 유신헌법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하였고, 이어 개헌을 거쳐 만들어진 이른바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1981. 2. 25.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8. 2. 24.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3) 구체적 판단
가) 북한군, 공작원, 간첩 등 개입설 (= 삭제를 명하는 부분은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손해배상액 산정에 포함)
⑴ 이 사건 회고록의 관련 표현들(‘순번’란의 표시는 별지 2, 3 목록의 각 ‘순번’을 기준으로 한다, 이하에서도 모두 같다).
순번쪽내 용판 단 1-10p.406◁◁◁ 공장에 집결해 수백 대의 차량을 끌고 나간 사람들의 정체에 의문이 가는 것이다. 특히 일반시민이 장갑차를 몰고 이동했다는 건 해명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전개된 일련의 상황들이 지금까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북한 특수군의 개입 정황이라는 의심을 낳고 있는 것이다.삭제 1-16p.485그 험하게 훼손된 시신들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살해된 것인지는 제대로 확인된 바가 없다. 대한민국 국군이 대한민국 국민을 상대로 그처럼 잔인무도한 살인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살인기계로 훈련받은 자들의 소행이라는 의심을 버릴 수 없다.삭제 1-18p.522교도소 습격은 북한의 고정간첩 또는 5.18을 전후해 급파된 북한 특수전 요원들이 개입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삭제 1-19p.5235.18사태의 현장사진 중에는 대한민국의 군인 모습과는 두발 모양은 물론 행동이 전혀 다른 군복 차림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광주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장면이 있다. 얼른 보면 계엄군이 연행되어 온 시위대원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진 속 군복 차림의 사람들은 외모로 볼 때 대한민국 군인이 분명히 아니었다. 장발을 하고 어설픈 군인 복장을 한 그들이 만약 광주 시민군이었다면 왜 같은 광주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가.삭제 1-20p.5245.18사태 기간 중 두드러지게 활동했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그 정체에 의문을 갖게 하는 사람들은 역시 군의 특수장비를 능숙하게 운용하고 군사전문가 같은 작전능력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중화기는 전문적인 훈련이나 교육을 받아야만 다룰 수 있다. 물론 시위자들 중 군대에서 전문병과에 복무한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런 경험을 가진 전역 군인들이 유독 광주지역에만 그렇게 많이 있었을까. 시위대는 ◁◁◁ 공장에서 장갑차를 탈취해 끌고 나왔다. 그 시절은 일반 시민 가운데 차량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적었다. 특히 장갑차는 훈련받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몰고 다닐 수 있는 장비가 아니다.삭제 1-21p.524피살경위를 알 수 없는 참혹한 모습의 시신을 끌고 다니며 계엄군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는 수법 등도 고도의 심리전 훈련을 받은 전문가가 조직적으로 개입되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해준다. 광주 효천역 부근에서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과 보병학교 교도대 간에 벌어졌던 오인 사격 사건에도 특수훈련을 받은 게릴라 수준의 공작원들이 투입되었을 것이라는 증언이 있다.삭제 1-22p.527~528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다음날인 5월 22일 오전,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 등에는 그동안 시위 현장에서 볼 수 없었던 일단의 젊은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추측들은 엇갈리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 수백 명을 헤아리는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나타났던 것만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목격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복면을 하고 나타났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들의 정체에 관해서는 지금까지도 온갖 억측과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그 당시 시민군 측이 방송을 통해 광고했던 내용처럼 광주시민들의 투쟁을 지원하려고 서울서 내려온 ♧●대생이 맞을 거라는 얘기가 있고, 한편으로는 북한의 특수부대원들이라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기도 한다.삭제 1-23p.530당시 북한 간첩들에게 지령하는 무전 교신들은 우리 군당국에 의해 포착되고 있었는데, 북한 공작원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정황들은 여러 곳에서 감지되었다는 진술들이 있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1-24p.530♧●대생으로 소개됐다는 500~600명의 정체, 조직적으로 움직인 수백 명 규모의 집단이 실재했느냐의 여부, 복면한 사람들의 정체 그리고 5.18사태에 북한은 어느 정도 개입했었는가 하는 문제들에 관해 내가 이글에서 확신을 갖고 새삼 강조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다.유지(사실적시 불인정) 1-25p.5315.18사태 때에는 북한의 특수요원들 다수가 무장하고 있는 시위대 속에서 시민으로 위장해 있을 터였다. 군당국이 무전교신을 포착함으로써 북한 간첩들이 시위현장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었지만 그들을 색출하기 위해 병력을 투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민들 속에 섞여 있는 북한 특수부대원들을 찾는다고 대규모 군 병력을 투입한다는 것은 시가전을 한다는 의미다. 내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내전이 벌어진다면 북한에 전면 남침의 초청장을 보내는 것이 된다.삭제 1-26p.532지금 와서 5.18사태 때 북한이 개입한 상황을 왜 밝혀내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니까 하는 얘기일 뿐이지 그 당시에는 내가 아닌 그 누구라 하더라도 정상적인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시민 속에 숨어 있을 것으로 보이는 북한 특수부대원들을 잡기위해 시가전을 각오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계엄군이 치밀한 계획 아래 정교한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광주를 수복할 수 있었는데, 북한의 특수요원들이 그때까지 광주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삭제 1-27p.532북한의 5.18광주사태 개입과 관련한 진상을 규명하는 일은 아쉽지만 미완의 과제로 남겨놓을 수밖에 없었다.유지(사실적시 불인정) 1-28p.5331990년대 이후 탈북자들 가운데에는 광주사태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것은 북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 당시 북한의 특수요원으로 광주에 침투했던 사람에게 직접 얘기를 들었다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2006년에는 자신이 직접 북한의 광주 작전에 참전했던 북한 특수부대원이었다는 사람이 탈북해서 그 사실을 털어놨다는 언론보도도 있었다. 이들의 발언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한 것이어서 지어낸 말로 보기는 어렵다.삭제 1-29p.533~5345.18사태 당시 광주 현장에 있던 군 관계자들의 증언이나 진술, 기자의 목격담 이외에 관련 자료나 정황 증거 등을 들어 ♧●대생으로 알려졌던 600명의 시위대가 북한의 특수군이라는 주장이 몇몇 연구가들에 의해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지난 10여 년간 집중적인 조사와 연구, 출판활동 등을 통해 5.18광주사태와 관련된 진실을 규명해나가고 있는 소외 48 시스템공학 박사는,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 아니고 북한의 특수군을 투입해서 공작한 ‘폭동’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소외 48 박사는 검찰과 국방부의 수사기록, 안기부의 자료, 5.18관련 단체들의 기록물, 북한 측의 관련문서와 영상자료들을 면밀히 조사분석한 결과 그러한 결론을 얻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북한 특수부대원이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탈북군인과 귀순한 북한 요인들의 증언으로 그러한 주장은 뒷받침됐다고 말하고 있다.삭제 1-32p.540~541배후조종에 의한 폭동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배후가 바로 ‘북한’이라고 특정特定하는 또 다른 주장이 있다. 소외 48 시스템공학박사와 재미 역사학자인 소외 49 목사 등은 연구·저술을 통해 광주사태는 북한 특수부대에 의한 도시게릴라 작전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하거나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방대한 양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피해자 측이 만든 자료들, 북한의 문서와 영상자료들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북한의 특수부대원들이 벌인 ‘도시게릴라전’이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탈북한 북한 고위층 인사들과 군인들의 생생한 증언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주장이다.삭제 1-33p.541소외 48 박사는 5.18때 북한의 특수공작원으로 침투했다가 돌아가 그 뒤 북한의 정부와 군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수백 명의 인물을 사진분석을 통해 실명으로 밝히고 있고 그 내용이 특정 보도매체와 출판물, 인터넷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있지만 주요 언론매체들은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고 있다. 독자나 시청자들의 정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언론매체들, 여론의 향배를 좇을 수밖에 없는 정치권은 그렇다 하더라도 학계에서조차 ‘민주화운동’이라는 정통적 역사 인식에 대한 어떠한 ‘수정주의적’접근도 금기禁忌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광주가 계속 신화의 영역에 있기를 원하며 불편할 수도 있을 진실이 더이상 드러나길 바라지 않는 세력이 엄존한다는 것은 뚜렷이 피부로 느끼고 있다.삭제 2-29p.485국군 공수부대 병력은 사람의 살을 도려낼 만큼 예리한 칼을 휴대하지 않았다.삭제 2-33p.5185.18사태 때 계엄군은 광주시내는 물론 광주시 외곽 등 여러 곳에서 흉기 또는 총기를 든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공격 양상이 가장 집요했던 것은 광주교도소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곳은 모두 여섯 차례나 무장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 170명, 강력범 300여 명을 포함해 총 2,64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2-33p.518수용자들을 자극해 교도소 내 폭동을 유발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북한이 광주에 있는 여러 고정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시키라"는 지령을 내리는 것이 우리 정보당국에 의해 포착되었다.삭제 2-34p.519~520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처음 습격한 것은 5월 21일 12시경이었다. 당시 교도소는 31사단 병력이 경비하고 있었는데 무장시위대는 총을 난사하며 공격해 왔다. 그러자 전교사는 교도소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3공수여단을 긴급증파했었다. 시위대는 이날 저녁 7시 20분경 교도소 주변에 매복해 있다가 31사단 병력과 교체된 3공수여단 병력에게 기습 총격을 가해왔다. 3여단 15대대장의 임무 교대 중 바로 옆에 있던 무전병이 저격을 당했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권총을 차고 한눈에 고위 지휘관인 것을 알고 잠복해 있던 무장시위대가 저격을 한 것인데 빗나가서 바로 곁에 있던 무전병이 맞은 것이다.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는 그처럼 대담하게 나오기 어렵다.삭제 2-36p.521~522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했다는 사실은 광주사태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교도소를 습격해 수감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은 전쟁 수행 중의 점령군 또는 혁명적 상황에서 혁명군이 취하는 교과서적인 작전이다. 5.18 당시 그들은 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까지 그처럼 교도소 공격에 집착했을까.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미전향 장기수들, 엄중한 정치범들, 간첩들을 해방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고 단언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삭제 2-37p.5225.18사태가 수습된 뒤, 특히 ‘민주화’ 이후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진술을 담은 기록물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때의 활약상에 따라 적지 않은 ‘민주화 유공 보상금’도 지급되었다. 그런데 자신이 교도소를 공격했다고 나선 사람은 없다고 한다.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사살된 사람들이야 죽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살아 도망간 사람들도 있을 텐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그렇다면 교도소 습격을 주도하고 참여했던 사람들은 왜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우리 국민 앞에 나설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삭제
⑵ 위 표현들 중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표현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관계 요지
일반 독자가 통상의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에서 위 각 서술 부분을 접하는 상황을 전제로, 위 각 표현의 객관적인 내용, 문구의 연결 방법, 글 전체의 취지와 맥락, 그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등을 종합하여 저자가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사실적 주장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일 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다만, 위 표의 ‘판단’란에 ‘유지(사실적시 불인정)’라고 표기한 부분은 단순한 의견의 표명이거나 의문의 제기, 시중에 회자되는 풍문이나 다른 사람의 발언을 단순 소개하는 것으로서 그 내용이 진실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수준에 이르지 않은 것 등에 해당하여 구체적 사실적시라고 보기 어려우므로 공표 사실의 정리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이하 각 주제별 판단에서도 모두 같다].
▷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는 그 무렵 남파된 북한군이나 공작원, 특수요원들이 섞여 있다. 그들은 장갑차 탈취, 고도의 심리전 전개, 직접 시민들을 살해하고 계엄군의 소행으로 전가하는 등의 활동으로 시위를 격화시켜 광주에서의 상황을 악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계엄군의 과잉진압으로 희생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일부 사망자의 경우 사실 계엄군이 아니라 고도로 훈련된 북한군 특수요원이 의도적으로 살해하고서 광주시민과 학생들을 자극하기 위해 계엄군이 한 것처럼 뒤집어씌운 것이다.
▷ 시위대가 유독 광주교도소에 대한 집요한 공격을 감행한 것은 그곳에 수감된 미전향 장기수, 정치범, 간첩들을 구출하라는 북한의 지령에 따른 것이다.
⑶ 허위성
앞서 본 인정사실 및 갑 제1 내지 9, 21, 22, 24, 30, 37, 38, 47, 53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한 위 사실적 주장들은 모두 허위임이 증명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다만, 위 표의 ‘판단’란에 ‘유지(허위성 입증 부족)’라고 표기한 부분은 일응 구체적 사실적시에는 해당하지만, 북한군 개입설 등을 단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기 어렵거나 이 사건에서 원고가 제출한 증거만으로 그것이 허위임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려워 삭제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아래 각 주제별 판단에서도 모두 같다].
㈎ 위와 같은 ‘북한군 개입설’ 관련 사실적 주장은 앞서 인정사실에서 본 5·18민주화운동의 전개 과정과 그에 대한 입법적, 사법적, 정치적, 역사적 평가들과는 양립할 수 없다. 북한은 같은 민족으로서 통일을 지향하는 대상임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무너뜨리고 적화통일을 꾀하는 반국가단체로서의 성격도 엄연히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북한군이 배후에 있는 민주화운동’이라거나 ‘북한 공작원들이 고도의 심리전을 통해 유발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헌정질서를 지키려는 저항권 행사’라는 식의 명제는 그 자체로서 형용모순의 진술이 되고 만다. 만의 하나라도 이 사건 회고록에 기술된 북한군, 공작원, 간첩 등의 개입설이 진실이라면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우리 사회의 확립된 평가는 모두 수정되어야 할 정도이다(5·18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애써 부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북한군 개입설’에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두 사실적 주장이 갖는 위와 같은 모순관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떻게든 5·18민주화운동이 북한과 관련된 것처럼 의혹을 불러일으키면, 그 효과로서 5·18민주화운동을 이념대립의 한 가운데로 끌어다 놓을 수 있고, 그렇게만 하면 오랜 기간 원고 5·18단체들의 노력 등으로 확립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에 균열을 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다. 그 반사적 효과로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에 대한 법적, 역사적 평가까지도 뒤집어보려는 욕망이 깔려 있을 것으로 보이고, 소외 1이 과거에 스스로도 의문을 제기했던 ‘북한군 개입설’을 굳이 회고록에 다시 끌고 온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 그렇지만 위와 같은 배경에서 그동안 ‘북한군 개입설’을 제기했던 사람들은 아래와 같이 모두 허위사실 적시에 따른 민·형사상 책임을 졌다.
- 소외 48은 2002년 무렵 ‘북한군 개입설’을 담은 내용의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였다가 사자명예훼손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형을 선고받았다(광주지방법원 2002고합594). 그에 대한 항소와 상고는 모두 기각되어 위 판결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 소외 48은 2014년 무렵 자신이 운영하는 시스템클럽 웹사이트에 북한군 개입설을 바탕으로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로서 당시 보도사진 등에 나오는 광주시민들을 북한군 특수요원이라고 지목하는 내용(한 사람 한 사람마다 번호를 붙여 ‘♧◆’라고 지칭하는 내용) 등의 게시물을 올렸다가 제1심에서 유죄 판결을 선고받고(서울중앙지방법원 2016고단2095 등), 항소심에서도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2년에 처하는 판결을 선고받은 뒤(서울중앙지방법원 2020노804), 대법원에 상고하여 현재 심리가 진행 중이다(대법원 2022도3281).
- 소외 48과 소외 50 회사는 2015년 무렵 북한군 개입설을 장황하게 설명한 유인물을 발행하였다가 법원으로부터 발행 및 배포금지 가처분결정을 받았고(광주지방법원 2015카합636), 그 가처분이의 사건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가처분결정이 인가되었다(2015카합749).
- 북한이탈주민인 소외 104는 2017년 무렵 비슷한 맥락의 ‘북한군 개입설’을 바탕으로 자신이 5·18민주화운동 당시 남파되었던 탈북군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라면서, 5·18민주화운동을 전후하여 소외 32 전 대통령과 북한의 당시 지도자였던 소외 51 사이에 모종의 내통이 있었고, 그러한 내통의 결과로 북한군 특수부대가 광주에 파견되어 평범한 시위를 폭동으로 바뀌도록 배후에서 조종을 했다는 취지의 글을 ‘(도서명 5 생략)’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가, 사자명예훼손으로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의 형을 선고받았고(서울서부지방법원 2019고단3767), 위 판결에 대한 검사와 소외 104의 항소가 모두 기각된 뒤 그대로 확정되었다(같은 법원 2020노767).
㈐ 소외 1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보안사령관이자 군의 실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군사반란 및 내란 행위자들의 수괴로서 군(軍) 내에서 오가는 대부분의 정보를 언제라도 파악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 그런 소외 1 자신이 2016. 6. 무렵 월간 (잡지명 1 생략)과 가진 인터뷰에서 ‘5·18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침투와 관련된 정보보고를 받은 적이 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전혀(없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어서 북한특수군 600명이 광주현장에 존재하였다는 소외 48의 주장에 대한 소외 1의 태도를 확인하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도 "어디로 왔는데?"라고 반문하면서 "난 오늘 처음 듣는데"라고 말하였다. 이른바 ‘북한군 개입설’을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는 물론 그 이후부터 위 인터뷰 당시까지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는 취지로 발언한 것이다. 그 인터뷰 당시 동석하였던 소외 1의 배우자 피고 1은 "광주사태 때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주장은 소외 48이 한 것인데, 그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 그 주장을 우리와 연결시키면 안 된다"라는 취지의 발언까지 하였다.
㈑ 소외 48 등이 제기하는 ‘북한군 개입설’이 대부분 전제하고 있는 사실은 5·18민주화운동을 전후하여 광주의 상황을 악화시킬 의도로 약 600명 가까이 되는 북한군, 공작원, 간첩 등이 일제히 광주로 잠입하여 시민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 직전에 대부분 다시 광주를 빠져나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수의 북한 사람이 단기간에 광주에 잠입하였다가 단 한 명도 발각되지 않고 소기의 임무를 수행한 뒤 다시 조용히 광주를 빠져나간다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실현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가설이다. 이 사건 회고록을 집필한 소외 1 자신도 위 (잡지명 1 생략) 인터뷰 당시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사건 회고록에 반영된 북한군, 공작원, 간첩 등 개입설의 대부분은 소외 48 등의 위 주장과 매우 흡사한 설명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위와 같은 비합리적인 가설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믿을 만하지 않다.
㈒ 미국 중앙정보국이 2017. 1. 무렵 비밀해제문서로 공개한 미국국가안전보장회의 1980. 5. 9.자 비밀문건에는 ‘현재 북한은 한국의 정치 불안 상황을 빌미로 어떤 군사행동도 취할 기미가 없다’라는 취지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1980. 6. 6.자 문건에도 ‘소외 51은 남한에 위협이 되는 북한의 어떤 행동도 현재의 남한 상황에서 소외 1을 돕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난 한 달 동안 반복된 북한의 입장은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군의 눈에 띄는 어떤 행동도 소외 1로 하여금 북한의 도발위협을 이유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이는 결국 소외 1을 돕는 행위라는 것을 직시하고 있다’라는 취지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1980. 5. 13. ‘우리가 가진 정보에 따르면 북한에서 평소와 다른 부대이동을 볼 수 없으며, 한국에 대한 모종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믿을 만한 움직임이 없다’라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 당시 중앙정보부 ★★이었던 소외 40은 1980. 5. 10. 무렵 "북괴는 최근 한국 내 사태를 결정적 시기로 판단 1980. 5. 15. ~ 1980. 5. 20. 남침을 결정했다"라는 취지의 첩보를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입수하였는데,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실질적인 영향력이 미치고 있던 당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에서는 위와 같은 대북특이동향에 대해 검토를 한 뒤, 해당 첩보는 북한의 일반적 남침 가능성을 제기한 것에 불과하므로 첩보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 국군 보안사령부가 1989년 국회 5·18특위 청문회에 대비해 작성한 ‘검거 및 훈방인원’ 통계에 의하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검거된 인원은 2,699명인데, 당시 검거된 사람 중에 북한 특수군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전남경찰국에서 작성한 이른바 ‘광주사태 진상’이라는 문서에는 북한군 관련 내용이 전혀 없고,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이른바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역시 광주시민과 학생들로 구성된 저항 세력의 활동을 시간대별로 세세하게 기재하면서도 북한군, 공작원, 간첩 등의 활동에 관한 내용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정보수집을 담당한 형사 및 현장 경찰관들은 전남지방경찰청의 5·18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팀에 "당시 관계기관이나 현장 경찰관들 사이에 북한 관련 첩보는 전혀 거론된 바 없었다"라는 취지로 진술하였다.
㈕ 광주에서의 시위 진압과 전남도청 항쟁 지휘부를 공격하는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 과정에서 수많은 우리 국민이 죽거나 다치는 희생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만약 그런 상황에서 당시 위와 같은 정부기관들에 북한군, 공작원, 간첩 등의 활동으로 의심되는 정황에 관한 정보가 있었다면, 이를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이 ‘유혈진압의 불가피성’을 강변하는데 활용하였을 것임에도 그러한 사실이 전혀 없다.
㈖ ‘북한군 개입설’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도 확고하게 그러한 정황조차 전혀 없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2013. 5. 30. ‘5·18 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음’이라는 내용이 담긴 문서를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소외 52 전 국무총리는 2013. 6. 10. 국회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라는 취지로 발언하였다.
㈗ 칼로 잔혹하게 난도질당한 희생자들과 관련하여 북한군 특수부대 침투설을 제기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아래와 같은 반례들이 있다. 당시 전투교육사령부(이하 ‘전교사’라 한다)에서 작성한 ‘전교사 작전상황일지’ 및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자료에서 ‘7공수여단이 착검하고 시위를 진압했다’라는 취지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7공수여단 소속 중사가 도망가는 시위대를 착검한 채 쫓아가는 사진도 있다. ‘1980. 5. 22.무렵 공수부대원이 연행한 시위대를 칼로 찔렀고, 부상자를 즉시 병원으로 후송했으나 사망하였다’라는 취지의 증언을 한 군인도 있다. 또한 1980. 5. 23. 오전 ▼▼동 1번 버스 종점부근에서 공수부대가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광주지검의 검시 결과 당시 사망자들 중에는 총 11명의 자상 사망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⑷ 원고 5·18단체들과의 개별적 관련성
앞서 본 바와 같이 5·18민주화운동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12·12, 5·17 군사반란과 5·18 관련 내란 등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맞선 헌법제정권력인 시민들의 숭고한 저항으로 법적, 정치적, 역사적 평가가 내려져 있다. 원고 5·18단체들은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과 그 유족으로 구성되어 그 정신을 계승하고 선양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립·운영되는 단체들이다. 소외 1은 출판물을 통해 위와 같이 허위의 ‘북한군 개입설’ 등을 마치 근거가 있는 것인 양 서술하였다. 그러한 허위사실의 적시는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하는 것으로서 해당 원고들과 밀접한 개별적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소외 1은 별지 2 목록 순번 1-33 항목의 표현에서 마치 ‘북한군 개입설’이 민주화운동이라는 정통적 역사 인식에 대한 일종의 수정주의적 접근으로서, 공론의 장에서 상호 경쟁하며 양립할 수 있는 하나의 견해이자 시각인 것처럼 기술하였다. 물론 과거의 어떤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토론은 활발하게 이뤄져야 하고 그와 관련된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겠지만, 그러한 자유에도 일정한 내재하는 한계가 있다. ‘북한군 개입설’은 그동안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법적, 정치적, 역사적 평가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허위이고, 그러한 허위사실의 적시는 표현의 자유의 범위를 명백하게 일탈한 것이다. 소외 1은 이로부터 더 나아가 마치 원고 5·18단체들이 5·18민주화운동 관련 사실에 대한 토론 자체를 봉쇄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기까지 하였다.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드는 것’에 비견할 수 있는 이러한 모습은 소외 1의 허위사실 적시로 인한 불법성의 정도를 평가할 때 반드시 고려하여야 할 요소이다.
⑸ 피고들의 귀책사유(손해배상청구 관련)
살피건대, ① 5·18민주화운동 당시 소외 1은 군 정보기관의 수장이자 군사반란 및 내란 세력의 수괴로서 당시 군이 파악할 수 있었던 정보는 대부분 확보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던 점, ② 미국 정보기관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 군의 정보기관이 수집한 정보에 의하더라도 북한군의 개입 정황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 점, ③ 소외 1 스스로가 앞서 본 (잡지명 1 생략) 인터뷰에서 ‘북한군 개입설’ 등에 대해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였던 점, ④ 이 사건 회고록의 해당 부분에서 인용한 소외 48 등의 견해 역시 여러 차례 허위사실이라는 사법적 판단을 받은 점, ⑤ 소외 1의 배우자 피고 1이 ‘자신들을 소외 48과 연결시키지 말라’는 취지의 언급까지 한 것으로 보아, 소외 1과 그 가족은 소외 48의 북한군 개입 관련 주장이 대부분 허위로 판명난 것을 대체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저자인 소외 1과 출판자인 피고 2가 위 ‘북한군 개입설’ 등이 허위라는 점을 과실 없이 알지 못하였다고 볼 수 없고, 피고들이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도 어렵다.
⑹ 소결론
원고 5·18단체들의 출판 등 금지청구는 위 ⑴항의 표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각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범위 내에서, 손해배상청구는 해당 부분을 허위사실로 적시하여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한 범위 내에서 각 받아들일 수 있다.
나) 계엄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에 관한 부분(= 삭제를 명하는 부분은 원고 5·18단체들 및 원고 5에 대한 손해배상액 산정에 포함)
⑴ 이 사건 회고록의 관련 표현들
순번쪽내 용판 단 1-4p.379헬기를 이용한 기총소사까지 감행했다는 등 차마 말로 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들이 더해져 전해지고 있다.삭제 1-13p.480이러한 주장은 헬리콥터의 기체 성능이나 특성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이거나 아니면 계엄군의 진압 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주장일 뿐이다.삭제 그가 제시한 사진도 가짜였다. 목사라는 사람이 무슨 이유로 가짜 사진까지 가져와서 허위진술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소외 53 목사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그러한 거짓말을 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목사가 아니라 가면을 쓴 사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유지(소외 53 목사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원고들과의 관련성이 없음) 1-14p.482헬리콥터의 기총소사에 의한 총격으로 부상한 사람들을 목격했다는 진술도 헬리콥터가 정착한 화기의 성능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임이 소외 54 항공단장의 진술로 증명되었다.삭제 1-15p.484그러나 소외 2는 그 후에도 자신의 허위주장을 번복하지 않았다. 미국인 목사라는 소외 53이나 소외 2나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일 뿐이다.삭제(심히 모욕적인 표현 포함)
⑵ 위 표현들 중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표현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관계 요지
일반 독자가 통상의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에서 위 각 서술 부분을 접하는 상황을 전제로, 위 각 표현의 객관적인 내용, 문구의 연결 방법, 글 전체의 취지와 맥락, 그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등을 종합하여 저자가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사실적 주장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일 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는 표현 부분은 사실 적시라는 측면보다는 심히 모욕적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아래에서 다시 본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를 이용한 기총소사는 없었다.
▷ 그럼에도 소외 2는 헬기의 성능이나 특성을 잘 몰라서거나 아니면 계엄군의 시위 진압 활동을 왜곡하기 위해 헬기 사격을 목격하였다는 거짓말을 하였다.
▷ 소외 2 이외에도 ‘헬기에 의한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끔찍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⑶ 허위성
앞서 본 인정사실 및 갑 제10, 11, 13 내지 17, 23, 24, 34, 38, 39, 52호증, 을 제21, 24, 73 내지 77, 을 제79호증의 7, 8, 을 제240호증의 22, 23, 24, 132, 145, 149, 165, 166, 168, 172, 175, 186, 190, 192, 207, 208, 210 내지 215, 을 제254 내지 291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한 위 사실적 주장들은 모두 허위임이 증명되었다(소외 2는 국회 5·18특위 청문회에서부터 줄곧 1980. 5. 21. 무렵의 헬기 사격에 관한 목격담만 언급하였으나, 소외 1은 5·18민주화운동 과정 전반에서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취지로 폭넓게 주장한 점, 이 부분 표현의 허위성과 관련해서는 소외 2의 조카인 원고 5 뿐만 아니라 원고 5·18단체들도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허위성 증명의 대상을 1980. 5. 21. 무렵의 헬기사격이 있었는지에만 국한하지 않고,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계엄군의 진압 과정 전반에 헬기사격이 과연 있었던 것인지를 기준으로 허위성 여부를 판단한다).
㈎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피고인이었던 소외 15에 대한 유죄 확정판결에서 인정된 사실 중에는 그가 "1980. 5. 25. 오후 소외 55 작전참모부장과 함께 광주에 내려가 전교사 사령관 소외 46(육군소장)에게 광주 재진입작전 계획을 직접 전달하는 한편, 위와 같이 광주 재진입작전이 논의되던 중인 같은 해 5. 23. 12:30 무렵 소외 56 전교사 부사령관에게 무장 헬기 및 전차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조속히 진압할 것을 지시하였다"라는 부분이 있다. 아래에서 다시 보는 바와 같이 ■■빌딩에 난 총탄 흔적이 헬기 사격에 의한 것이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라 한다)의 감정결과가 있는 것까지 더하여 보면, 적어도 1980. 5. 27. 무렵 실시된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에 무장 헬기가 동원되었고, 그 과정에서 헬기를 이용한 기총소사(이는 하늘을 나는 기체에 장착되거나 거치된 총기로 땅에 있는 표적을 향해 집중 사격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빌딩에 남아 있는 총탄 흔적의 개수와 밀도 등을 고려하면 그것을 ‘기총소사’라고 표현하는 데에 아무런 무리가 없다)가 있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 소외 2는 1989. 2. 2. 방영된 ♧■■ 다큐멘터리 ‘(제목 생략)’에서 최초로 헬기 사격에 대한 목격담을 이야기한 이래, 1989년 국회 5·18특위 진술, 1994년 출간한 자신의 책 ‘(도서명 2 생략)’, 1995년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 수사과정에서의 검찰 진술 등에서 여러 차례 1980. 5. 21. 무렵 헬기 사격을 목격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그 진술 내용들을 보면 내용이 구체적이고 목격 전후의 사정과 연결이 자연스러운 데다, 긴 시간 여러 차례에 걸쳐 자세히 진술하였음에도 모순되거나 오락가락하는 부분이 없다. 그가 생애 동안 별다른 흠결 없이 신도들을 잘 이끌고 사회에 봉사하며 살아 온 성직자이고, 2008년 무렵에는 로마 가톨릭 교황으로부터 최고위 사제를 뜻하는 ‘몬시뇰’의 칭호까지 부여받은 사람인 점, 1989년 무렵은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 규명 노력이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할 무렵으로서(우리 국민 중에는 ♧■■ 다큐멘터리 ‘(제목 생략)’을 통해 1980년 광주에서의 실상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꽤 많다), 그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초기 국면에 굳이 실제 경험하지도 않은 사실까지 거론하여 사실관계에 관한 쟁점만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없는 점, 위와 같은 최초 발언시기에는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은 다른 목격자들의 진술도 아직 나오기 전이고, 반대로 헬기 사격을 부인하는 군인들의 입장도 발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증언이나 반대되는 증언을 의식하면서 일부러 진술을 짜 맞출 이유도 없는 점, 소외 2의 위와 같은 목격 증언이 사실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당시의 헬기 출동 기록, 실탄 보급 기록, 작전 수행 명령 등이 존재하는 점, 소외 2의 진술 내용을 종합하면 당시의 헬기 가격은 시위대를 향한 직접 발포가 아니라 ●●대학교 뒷산 또는 광주천변 방향으로의 위협사격이었을 가능성도 있어서 반드시 그에 따른 희생자가 있을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1980. 5. 21. 무렵의 헬기사격에 관한 소외 2의 목격담은 그 자체로는 허위 개입의 여지가 매우 적고, 충분한 신빙성이 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출동한 공격용 헬기는 AH-1J(일명 코브라), 500MD, UH-1H이다. 각 헬기의 외관과 장착무기는 아래 표와 같다.
㈑ 1980. 5. 21. 무렵 헬기사격을 보았다는 아래와 같은 목격진술이 있는데, 이는 아래에서 다시 보는 바와 같은 이유에서 충분한 신빙성이 있고, 소외 2의 진술과도 부합한다.
성명장소헬기 기종목격내용 소외 53① 광주 시내 ② 광주 남구(이하 생략) 자택 옥상500MD15:15경 광주 영공에서 헬기가 군중들을 향해 사격하는 장면을 목격하였고, 16:30경 집으로 와 옥상에서 헬기 사격을 보았다. 소외 57광주 남구(이하 생략) 소외 53 자택500MD17:00 전후로 소외 53와 함께 헬기가 사격하는 장면을 보았다. ‘드르륵 드르륵’하는 소리가 났고,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하는 것이 아니라 M16 소총을 자동 상태로 놓고 광주천을 향해 위협 사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외 58광주 북구(이하 생략) 자택 마당500MD14:00경 노란색 비표를 한 헬기가 왼쪽에 장착된 7.62㎜ 기관총으로 ‘따다다다다다’하는 소리를 내며 10초에서 20초가량 사격하는 장면을 보았다. 소외 59전남도청 부근 도로불상오후 전남도청 앞 발포가 있은 후 ‘땅땅땅’하는 소리가 나 공중을 보니 헬기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헬기 여러 대가 오르락내리락하였고, 직감적으로 헬기가 사격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나무 밑으로 몸을 숨겼다. 소외 60광주 동구 (이하 생략)부근 도로UH-1H13:00~14:00경 금남로 총격을 피하여 ♠♠♠호텔 통로로 걸어가고 있던 중 헬기가 전남도청 쪽에서 광주공원 쪽으로 가다가 ‘두두두두두’하는 소리와 함께 20초가량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 소외 61광주 동구(이하 생략) ◀◀◀호텔사거리 부근 도로불상14:00~14:30경 헬기 1대가 ‘따르륵 따르륵’하는 소리를 내며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이 ♧◎◎ 쪽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헬기가 내렸다가 뜨는 장면을 보았다. 소외 62광주 동구(이하 생략)자택 옥상500MD13:00~14:00경 헬기가 소총보다는 강한 ‘타타타타’하는 연발음을 내며 사격하는 것을 보고 옥상 물탱크 뒤로 몸을 숨겼다. 소외 63광주 동구 ▶▶▶성당500MD13:00경 피해자와 함께 헬기가 불로교 다리 위에서 광주공원 방향 하천 쪽으로 ‘탕탕탕탕’하는 소리로 사격하는 장면과 불꽃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았다.
- 소외 53은 1990년 발간한 자신의 저서 ‘(도서명 3 생략)’과 1995. 5. 11. 기자회견 및 검찰 진술에서 5. 21. 오후 광주 상공에서 500MD 헬기에 의한 기관총 사격이 있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고, 그 진술은 소외 2의 진술에 부합한다. 소외 53은 목사로서 위와 같은 진술 과정에서 소외 2와 특별한 교류가 있었다거나 그 내용을 상의하였다는 사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당시 찍었다는 사진에도 500MD로 보이는 헬기가 보여 위 진술의 신빙성을 더한다(피고들은 해당 헬기의 기종 특성 등을 거론하며 그 사진을 믿을 수 없다고 하나, 소외 53이 다른 시기에 해당 헬기의 사진을 찍었을만한 특별한 계기를 찾을 수 없는 점, 소외 53도 사격 순간에 발생하는 섬광을 찍지 못하여 실망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는 점, 사진을 찍은 방향이나 프로펠러의 위치에 따라 사진 속 헬기의 모습은 조금씩 다르게 나올 수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피고들이 드는 사정만으로 사진의 증명력이 상쇄된다고 보기 어렵다).
- 위 목격자들이 각 헬기를 보았다는 장소를 현재의 지도에 표시하면 아래와 같은데, 해당 위치는 모두 소외 2가 헬기 사격을 목격하였다는 ▶▶▶성당과 멀지 않은 곳인 점, 현재와 달리 당시에는 위 일대에 ■■빌딩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던 점, 공중에 떠서 돌아다니는 헬기의 특성상 여러 방향, 여러 각도에서 헬기를 목격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점, 군이 헬기 위협사격의 적합 장소로 예시한 광주천변이나 ●●대학교 뒷산 등과도 그리 멀지 않은 점 등을 종합하면 위 목격자들의 진술은 신빙성이 있다.
(지도 생략)
- 목격자 중 소외 58은 5·18민주화운동 기간 전에 502항공대 소속 정비병으로 근무하다 제대한 사람이므로, 그가 500MD 헬기의 사격을 목격하였다고 하는 진술은 더욱 신빙성이 있다(비록 그가 각 항공대별 비표의 종류 등에 관하여 당시의 객관적인 기록과 일부 어긋나는 진술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당시 목격한 헬기의 소속 항공대에 대한 착오로 귀결될 뿐, 헬기 사격을 목격하였다는 그 진술 자체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사정으로 보기는 어렵다).
㈒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계엄군의 진압작전 등으로 광주 상공을 비행하였던 항공기의 조종사, 부조종사 또는 그 부대의 지휘관, 탄약관 등 군인들은 국회 5·18특위의 헬기 사격에 대한 진상규명 시도가 있은 이후부터 줄곧 헬기사격이 있었던 사실을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부 군인들은 기관총, 벌컨포 등에 사용되는 실탄을 헬기에 장착하고 출동한 것은 사실이라는 진술(소외 64, 소외 65, 소외 66, 소외 67, 소외 68, 소외 69 등), 교신 과정에서 ‘위협사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들었으나 이내 끊어져서 정확한 명령권자는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진술(소외 67), 헬기에 쓸 탄약을 불출하였는데 그중 일부가 소비된 상태로 나머지를 회수한 적이 있다는 진술(소외 70) 등을 하였다. 이러한 일부 군인들의 진술을 앞서 ㈎항에서 본 바와 같은 사정(신군부 세력의 일원인 소외 15가 무장헬기 동원을 지시하였고, 육본 작전참모 소외 55가 전교사 사령관 소외 46에게 헬기 사격을 지시한 적이 있다고 진술하는 등의 사정)과 결합하여 보면 당시 계엄군 소속이었던 군인들의 진술에 따르더라도 무장 헬기가 탄약을 싣고 광주로 출동하였고 (적어도 위협사격에 한정하여서는) 명령계통으로 사격 지시가 있었으며, 그중 일부 탄약이 소비된 정황까지 있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 5·18민주화운동 전후로 작성된 군 관련 문서에서 확인되는 아래와 같은 내용들에 의해서도 소외 2와 헬기 사격 목격자들의 진술의 신빙성은 뒷받침된다. 즉, ① 전교사가 작성한 ‘전투상보(충정작전결과)’에 따르면, 당시 광주에 앞서 본 세 가지 종류의 헬기(AH-1J, 500MD, UH-1H)가 모두 무장을 한 상태에서 출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점, ② 상황에 따라 헬기로 ‘광주시내 하천, 임야 및 산’ 등에 위협사격을 실시하여도 좋다는 취지의 지침도 있었던 점, ③ 전교사가 작성한 경고문(안)에도 방송을 종료한 즉시 ‘벌컨위협사격 실시로 양민경고 분리 및 위압감과 공포감 효과 달성’이라는 문구가 있는 점, ④ 5·18민주화운동 이후 군이 작성한 교훈집에도 (최소한 위협사격에 해당하는) 헬기사격이 있었음을 전제로 상황 분석을 시도한 내용이 있는 점 등이 목격자들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한다.
㈔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진행되던 도중인 1980. 5. 22. 소외 71 전교사 사령관의 후임으로 온 소외 46 전교사 사령관은 1994. 12. 12. 검찰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지상으로 총격을 가한 사실이나 화염방사기, 크레모아 등을 사용하여 시위진압을 한 사실이 있는가요"라는 질문에 "당시에는 헬기 사격 보고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국회) 광주특위를 앞두고 각종 자료를 검토해보고 관계자들에게 확인해본 결과 민가나 시민을 향해 기총사격을 한 적이 없고, 다만 ●●대 뒷산에서 위협사격을 한 적은 있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비록 자신이 전교사 사령관으로 임명되기 전의 상황을 그렇게 보고받았다는 취지이기는 하나, 당시 소외 46의 지위나 역할 등에 비추어 볼 때 적어도 헬기를 동원한 위협사격이 있었던 사실은 분명하게 뒷받침된다.
㈕ 광주도시공사는 광주 동구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에 있는 ■■빌딩을 매수하여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총탄흔적을 발견하였다. 광주광역시는 그 총탄흔적 등에 관한 법안전감정을 국과수에 의뢰하였고, 국과수는 2016. 12. 16. 광주광역시에 "■■빌딩 건물 외벽에서 구경 5.56mm 또는 0.3인치 탄환에 의한 탄흔으로 유력한 흔적 35개를 확인함, ■■빌딩 10층에 위치한 ■■방송 내부의 기둥, 천정 텍스, 바닥 등지에서 최소 150개의 탄흔을 식별하며, 발사 위치는 호버링 상태(hovering, 헬리콥터가 공중에 정지해 있는 상태)의 헬기에서 발사되었을 가능성이 유력하게 추정됨"이라는 감정결과를 회신하였다. 그 뒤 광주광역시가 한 추가 감정 의뢰에 대한 국과수의 회신, 관련 형사사건에서 한 국과수 감정결과 등까지 종합하여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정, 즉 ① 국과수가 탄흔을 만들어낸 총격의 방향과 종류를 추정하기 위해 동원한 방법(■■빌딩 10층 바닥 및 기둥의 탄흔 분포가 밀집된 형태인 점에 비추어 보면, 그 탄흔 대부분이 단일한 총격에 의하여 생성되었다고 보이므로, 탄흔의 분포 형태를 분석하여 총격이 내부와 외부 중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 추론하고, 탄흔의 탄도 연장선에 있는 탄흔을 매칭하여 각도를 계산하는 방법)은 충분히 과학적인 접근 방법으로 평가할 수 있고 특별히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거기에 맞춰나간 것이라는 정황은 찾을 수 없는 점, ② ■■빌딩 10층에 밀집되어 있는 탄흔을 평면적으로만 본다면 출입문 쪽에서 지상군에 의한 내부 총격에 의해 발생하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빌딩 내부에서 계엄군과 시민 저항세력 사이의 총격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으므로, 국과수가 분석한대로 외부에서 방사형의 총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게 더욱 설득력이 있는 점, ③ 무엇보다 기둥에 분포하는 탄흔들은 금남로 쪽을 바라보는 방향에만 집중되어 있고 출입문이 위치한 그 뒷면에는 탄흔이 남아 있지 않아 내부 총격전보다는 건물 외부로부터의 총격에 의해 탄흔이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점, ④ 당시 ■■빌딩 주변에 그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으므로 바닥에 남아 있는 탄흔이 위에서 아래로 쏜 것에 의해 발생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면(실제로 국과수의 분석에 의하면 대부분이 하향 탄흔이라는 점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이는 헬기 사격에 의한 것 이외에 다른 가능성을 상정할 수 없는 점, ⑤ UH-1H 헬기에 거치된 M60 기관총의 경우 유효 사격각도가 위로는 6.5°, 아래로는 82°, 좌우로는 ±88°까지 가능하므로 바닥의 탄흔 분포 및 하향 사격각도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데, 5·18민주화운동 당시 해당 헬기가 탄약을 실은 상태에서 광주로 출격한 사실은 군 기록에서도 확인되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빌딩에 남아 있는 총탄흔적의 상당수는 헬기사격에 의하여 발생한 것임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고, 5·18민주화운동 당시가 아니라면 광주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빌딩에 그와 같은 총탄흔적이 생길법한 다른 사건이 있었을 것을 쉽게 상상할 수도 없다.
㈖ 계엄군의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이 실행될 무렵 마지막 저항군 상황실장으로 전남도청에 남아 있던 소외 72는 UH-1H 기종의 헬기가 ■■빌딩을 향해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하였고, 인근 ♥♥교회 부근에 있었던 소외 73도 ■■빌딩과 그 맞은편 ♧☆☆ 쪽으로 향하는 같은 기종의 헬기가 세 번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광주 재진입작전이 실행된 1980. 5. 27.은 비가 오지 않아 육안으로 헬기를 목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점, UH-1H 헬기가 기관총 사격을 할 때의 통상적인 모습(M60 기관총을 진행방향과 수직이 되도록 측면에 거치하여 옆으로 쏘는 모습)과 그들이 묘사한 사격 장면이 대체로 일치하는 점, 두 목격자들이 지목한 헬기 기종이 앞서 본 탄흔 분석에서 호버링 상태에서 ■■빌딩을 향해 하향 사격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추정한 기종(UH-1H 헬기)과 동일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위 진술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
㈗ 1995년 무렵 있었던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당초 수사과정에서 검찰이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에 관한 법원의 공식 판단은 내려지지 않았다. 소외 1의 관련 형사사건에서는 검찰이 그 뒤에 확인된 증거들까지 모두 종합하여 계엄군에 의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전제로 소외 1을 소외 2에 대한 사자명예훼손으로 기소하였다. 해당 사건의 제1심 법원은 다각도의 심리를 거쳐 1980. 5. 21. 무렵과 5. 27. 무렵(이는 공소사실과 직접 관계는 없으나 5. 21. 무렵의 헬기사격이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간접사실로서 판단한 것이다) 적어도 두 시기에 걸쳐 계엄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소외 1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선고하였다. 위와 같은 검찰의 입장 변화와 그에 따른 관련 하급심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이 법원은 당초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수사결과에 굳이 얽매이지 않고 지금까지 나온 모든 소송자료들을 바탕으로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에 관한 심리를 진행한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채증법칙을 위반하거나 자유심증주의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⑷ 심히 모욕적인 표현에 해당하는 부분
소외 1은 위와 같은 허위사실의 적시 이외에 소외 2에 대하여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는 표현도 하였다. 소외 2의 성직자로서의 삶과 생전 가톨릭 내에서의 지위 등은 앞서 본 바와 같은데, 그러한 종교인에 대하여 허위사실에 터잡아 ‘파렴치하다’거나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사실적 주장을 더욱 강조하여 서술하는데 필요한 범위를 넘어 심히 모욕적인 표현으로 상대방을 경멸 또는 조롱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소외 2에 대한 모욕이 된다. 이는 망인인 소외 2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해함과 더불어 앞서 본 바와 같이 망인과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한 특별한 유대를 갖고 그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내세우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삼고 있는 원고 5의 망인에 대한 합당한 명예감정과 추모감정을 침해하였다는 측면에서도 단순한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과는 별개의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⑸ 원고 5와의 관련성
위 ‘가.항 총론적 쟁점’의 ‘3) 고 소외 2에 대한 ‘헬기 사격’ 관련 허위사실 적시가 유족인 원고 5에 대한 불법행위가 되는지’ 부분에서 본 바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면 위와 같은 허위사실의 적시 및 망인에 대한 심히 모욕적인 표현들은 소외 2에 대한 명예훼손 또는 모욕이 됨과 동시에 원고 5의 유족으로서의 명예감정과 추모감정을 훼손하는 것으로서 원고 5와 관련성이 충분하다.
⑹ 원고 5·18단체들과의 관련성
살피건대, ① 소외 1은 이 사건 회고록 중 별지 2 목록 1-4 해당란 기재 표현에서 소외 2 이외에도 헬기에 의한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서술하여 단순히 소외 2만을 지목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5·18 관련자들이 마치 근거 없는 헬기 사격설을 거론하는 것처럼 표현한 점, ② 앞서 총론적 쟁점 중 ‘피해자 특정’과 관련한 부분에서 본 것과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가해자에 해당하는 소외 1이 자신과 다른 사실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전제로 놓고 서술하는 것만으로도 일반 독자들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간접적, 우회적으로 원고 5·18단체들을 지목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은 점(원고 5·18단체들은 법정단체이고 유사한 명칭을 사용하는 단체 설립 자체가 법적인 제한을 받고 있기에, 그 밖에 달리 어떤 다른 사람이나 단체를 겨냥한 발언이라고 상정하여 볼 대상 자체가 마땅치 않다), ③ 원고 5·18단체들은 소외 2가 계엄군의 헬기 사격 관련 증언을 처음 하였던 1989년 무렵부터 현재까지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점을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이른바 ‘자위권 발동론’을 반박하는 중요한 사정으로 들면서 진상규명 노력을 계속하여 왔던 점, ④ ■■빌딩의 리모델링 과정에서 다수의 탄흔이 발견되고 그것의 유래를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원고 5·18단체들은 계엄군에 의한 헬기 사격이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는 전제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던 점, ⑤ 소외 2를 사자명예훼손의 피해자로 하는 소외 1에 대한 관련 형사사건의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도 원고 5·18단체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하였고, 그러한 모습은 언론 매체 등을 통하여 널리 알려져 ‘계엄군에 의한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 여부’가 원고 5·18단체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진상규명 관련 주제임을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계엄군에 의한 헬기 사격이 있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이야기는 헬기의 성능이나 특성을 몰라서 하는 얘기이거나 악의적인 거짓말’이라는 취지의 표현이 앞서 본 바와 같이 허위로 밝혀진 이상, 그러한 허위사실의 적시와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판 사이에는 개별적 관련성이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⑺ 피고들의 귀책사유(손해배상청구 관련)
살피건대, ① 5·18민주화운동 당시 소외 1의 지위는 군 정보기관의 수장이자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의 수장이었으므로 군(軍) 내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정보는 모두 받아볼 수 있는 상태에 있었던 점, ② 앞서 본 바와 같이 군의 공식기록에는 무장 헬기의 출격 기록과 위협사격 등을 지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점, ③ 소외 2가 1989년 무렵부터 계엄군에 의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증언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계엄군 소속 헬기 조종사들이 그 진술에 집단 반발하여 성명서를 내는 등의 소동이 있었으므로, 이 법원이 앞에서 인정한 사실을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 집필 과정에서 무관심이나 착오로 알지 못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한 점, ④ 이 사건 회고록의 ‘책임정리’자로 이름이 올라가 있는 소외 74는, 소외 1이 퇴임 직후 이른바 ‘5공 청산’의 흐름에 휩쓸려 회고록을 준비할 여유를 갖지 못하다가 1997년 사면복권 이후부터 틈틈이 회고록 저술을 위한 구술을 하는 등의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고, 특히 5·18과 관련된 부분은 ‘소외 1이 직접 경험한 바가 없으므로’ 그 때까지 나와 있는 모든 자료들을 망라적으로 살펴보고 그중 터무니없는 것들을 뺀 나머지를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라고 설명한 점(을 제169호증 참조), ⑤ 일단 소외 1이 적시한 사실이 허위라고 이 법원이 판단한 이상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음은 피고들이 증명하여야 하는데, 피고들은 막연히 그 표현이 진실이라고만 주장하고 있을 뿐 적시사실이 허위였음을 전제로 하여서는 별다른 주장과 증명을 하고 있지 않은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저자인 소외 1과 출판자인 피고 2가 위 ‘헬기 사격은 거짓말’이라는 취지의 표현이 허위라는 점을 과실 없이 알지 못하였다고 보기 어렵고, 피고들이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도 어렵다.
⑻ 소결론
원고들의 출판 등 금지청구는 위 ⑴항의 표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각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범위 내에서, 손해배상청구는 해당 부분을 허위사실로 적시하여 원고들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유족으로서의 추모감정을 침해하는 등 정신적 고통을 가한 범위 내에서 각 받아들일 수 있다.
다) 계엄군의 총기 사용 및 비무장 민간인 살상행위 등을 무장 시위대의 폭동에 대한 이른바 ‘자위권 발동’ 차원으로 설명한 부분(= 삭제를 명하는 부분은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손해배상액 산정에 포함)
⑴ 이 사건 회고록의 관련 표현들
순번쪽내 용판 단 1-3p.27더욱이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삭제 1-6p.382우리 국군은 국민의 군대다. 결코 선량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눌 일은 없다.삭제 1-7p.3831980년 5월 광주에서도 계엄군은 죽음 앞에 내몰리기 직전까지 결코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았다.삭제 1-30p.535광주사태에 관한 사실관계를 철저히 검증하고, 그 성격을 재조명할 수 있는 충분한 동력이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1950년 북한의 남침 때 수백만 명의 인명피해를 무릅쓰며 싸웠던 것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이었듯이 5.18사태 당시 정부와 계엄군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던 무장혁명 세력과 맞섰던 일도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정당하고도 불가피한 조치였음이 오래지 않아 명백히 밝혀질 거라 믿는다.삭제 1-31p.539무엇이 진실인가. 헌법적 정통성을 지닌 소외 30 대통령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폭동인가,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한 폭동인가 아니면 북한 특수부대가 공작한 폭동이었는가?삭제 2-2p.380~381장갑차와 군용 트럭에 수천 정의 총기로 무장한 시민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공수부대의 자위권 발동이었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삭제 2-5p.381광주 문제를 말하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써야 했던 대한민국 군인들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삭제 2-7p.382무엇보다 나는 세상이 나를 단죄하기 위해 ‘무고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눈’ ‘국민을 학살한’ 군대라는 오명을 덧씌운 대한민국 군인들의 명예를 되찾아줘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삭제 2-16p.399광주에서 시위대와 계엄군 간의 충돌이 유혈사태로 번지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원인은 시위대가 무장을 하게 된 데서 찾을 수 있다.삭제 2-17p.3995월 19일 오후 3시 30분경 시위대에 의해 ♧■■를 경비하던 31사단 병력이 M16소총 1정과 실탄 15발을 탈취당했다.삭제 바로 다음날인 20일 밤 11시에는 2,000여 명의 시위대가 광주세무서 별관 무기고를 습격해 카빈 17정을 탈취했다. 광주에서 무기가 대량으로 탈취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유지(허위라는 점에 대한 입증 부족) 2-18p.403무기고 습격이 5월 21일 오후 1시 이후에 시작됐다고 하는 시민군 측의 주장과 달리 그날 오전부터 이미 무기고 습격이 진행됐다는 기록들이 있다. 소외 75 나주읍 ♣♣파출소장은 1980년 7월 16일 전남합동수사단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5월 21일 10:00경 난동분자 4명이 탄 짚차를 선두로 뒤따라 4~50명이 GMC에 분승하고 파출소앞에 이르러 뒤따라오던 GMC가 파출소 안으로 돌진, 기물을 파괴하고 (중략)" _1980.7.16. 진술조서, 5.18사건 검찰 수사기록 84,527~84,528면유지(단순 인용문 또는 허위라는 점에 대한 입증 부족) 2-19p.403~404전남 영암경찰서 ♧○지서 예비군 무기고가 공격받던 상황에 대해 소외 76 (소속부대 1 생략)대장은 1995년 6월 15일 검찰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5월 21일 10:30경 영암지역으로 들어오자마자 길목에 있는 ♧♧경찰서 ♧○지서 예비군 무기고에 들어가 무기를 탈취한 것입니다… 영암지역에서는 무기가 피탈된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상황이 없었는데 무기가 피탈된 시간과 장소를 순서대로 말씀드리면 5월 21일 10:30경 나주군과 영암군의 경계 지점인 ♧○지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최초로 무기가 피탈되었고 ♧♧경찰서 시종지서 직원들이 인근 야산에 수백 정의 총기를 숨겨놓았는데 시위대들이 5월 21일 11:30경 주민들의 제보를 받아 숨겨놓은 총기를 찾아갔으며 (중략)" _1995.6.15. 진술조서, 5.18사건 검찰 수사기록 30,323~30,325면유지(단순 인용문 또는 허위라는 점에 대한 입증 부족) 2-22p.423엄격하게 말하자면 무장시위대의 공격에 노출된 계엄군에게 ‘자위권 발동’지시는 불필요한 조치다. 각개 병사가 임무 수행상 정당방위 목적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삭제 2-25p.472~473관계법령들이 규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광주에 출동한 계엄군은 계엄사령관이나 상급 작전지휘권자의 자위권 발동지시가 없더라도 당연히 ‘정당방위권’과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것은 경찰관이 경찰관직무집행법 제11조 규정에 따라서 무기를 사용함에 있어 상급 지휘관의 지시나 승인이 필요하지 않은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유지(일반적인 법리를 설명한 것으로 사실적시로 보기 어려움) 따라서 설령 광주에 출동한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이 소외 24 계엄사령관의 지시 이전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 또한 광주에 출동한 각 부대의 자위권 발동 시기가 다른 것은 각 부대가 처했던 상황이 서로 다른 것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소외 24 계엄사령관의 자위권 발동 지시 이전 시점에서 특전사 3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발포한 것은 형법 제21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정당방위권의 행사였으며 상부나 어느 누구의 발포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삭제 2-26p.475학살은 과연 있었는가유지(소제목으로 전후에 관련된 서술이 없어, 사실적시로 보기 어려움)
⑵ 위 표현들 중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표현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관계 요지
일반 독자가 통상의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에서 위 각 서술 부분을 접하는 상황을 전제로, 위 각 표현의 객관적인 내용, 문구의 연결 방법, 글 전체의 취지와 맥락, 그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등을 종합하여 저자가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사실적 주장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일 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계엄군이 집단 발포를 하기 전부터 이미 방송국, 세무서, 경찰서 등 무기가 있을만한 곳을 습격하여 무장을 하였다. 광주에서 많은 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위와 같이 시위대가 먼저 무장을 했기 때문이다.
▷ 위와 같이 무장한 시민과 학생들은 ‘폭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격렬한 시위를 벌였기 때문에 광주에 출동한 계엄군은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곤봉, 대검, 총기 등을 사용한 유혈진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 총기를 탈취하여 계엄군을 공격하는 등의 격렬한 시위를 벌인 사람들은 선량한 국민이라고 할 수 없고 대한민국의 전복을 꾀하는 무장혁명세력이었다. 계엄군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그에 맞서 싸웠을 뿐이다.
⑶ 허위성
앞서 본 인정사실 및 갑 제21, 22, 24, 29, 30, 32, 37, 38, 40, 41, 42호증, 을 제61, 121 내지 124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한 위 사실적 주장들은 모두 허위임이 증명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이 1979. 12. 12.과 1980. 5. 17., 5. 18.을 각 전후해 그것이 군사반란 또는 내란이라는 정을 모르는 일선 부대 병력과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 등 병기를 휴대한 군인들을 이용해서 벌인 일련의 군사반란 및 내란, 내란목적살인 등의 행위는 이미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과 5·18민주화운동법에 의하여 모두 ‘헌정질서 파괴범죄’로 규정되었다. 5·18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광주 시민과 학생들이 위와 같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에 맞서 싸운 일련의 행위는 헌법제정권력인 국민들이 헌정질서 파괴범죄에 대항한 정당한 저항권 행사로 평가되었다. 그런데도 소외 1은 본인 스스로가 그 군사반란과 내란의 수괴였으면서도 위와 같은 우리 사회의 합의된 법적, 정치적, 역사적 평가를 정면으로 거슬러 여전히 광주 시민과 학생들을 무장혁명을 통해 대한민국의 전복을 꾀했던 폭동세력인 것처럼 묘사하고, 계엄군의 유혈진압은 정당한 자위권의 발동이었다는 식의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과 내란 행위에 이용된다는 정을 모르고 광주에 투입되어 뜻하지 않게 ‘손에 피를 묻히게 된’ 일반 계엄군 병사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나, 소외 1은 그러한 차원에서 일선에 투입된 계엄군 병사 개개인의 책임을 부인하는 취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행위에 따른 책임 자체를 광주 시민과 학생들의 무장저항에서 비롯된 것처럼 거꾸로 전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확정판결에서 이미 소외 1 등 신군부 구성원들의 정당행위, 정당방위·과잉방위, 긴급피난·과잉피난 등 위법성조각사유에 관련한 주장(위 적시사실과 비슷한 맥락에서 ‘광주에서의 시위가 폭력적인 양상으로 변하고 일부 시민들이 무기를 드는 등의 상황이 벌어져 군으로서도 이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취지에서 하는 주장)을 명백히 배척하였다. 이로써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무장저항행위에 대한 규범적 판단은 마쳐진 상태이다. 소외 1이 이 부분에서 하는 사실적 주장은 결국 위 대법원 전원합의체 확정판결에서 정립한 사실관계의 기본틀을 반대로 서술하는 것이다.
㈐ 소외 1은 1980. 5. 21. 13:00 무렵 전남도청 앞에서 있었던 집단발포를 기준으로 그보다 앞서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했다는 일부 기록이나 진술이 있는 점에 집착하며, ‘시위대가 먼저 무장을 하여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교묘하게 사안의 전체적인 구도를 바꾸려고 시도한다. 그렇지만 앞서 본 인정사실에 따르면 위 시점 이전에도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곤봉 폭행과 대검 사용, 산발적인 총기 발포로 이미 희생자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앞서 본 대법원 전원합의체 확정판결에서도 ‘계엄군이 난폭하게 광주시민의 시위행위를 진압한 행위’ 그 자체를 내란죄의 구성요건인 폭동의 내용으로서의 폭행·협박에 해당한다고 인정한 바 있다. 따라서 군사반란 및 내란 세력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일선 계엄군의 잔혹행위(그것이 총기를 사용한 것이었는지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를 저지하기 위한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저항행위는, 그 과정에서 설령 총기로 무장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평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인용하고 있는 무기피탈 시각과 관련한 일부 기록과 진술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이 사건 회고록의 표현 중 소외 1이 위와 같은 기록이나 진술을 단순 인용한 부분은 허위성이 명백히 밝혀지지 아니하여 ‘유지’로 판단한 것은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다), 광주 시민과 학생들의 위와 같은 저항행위가 지닌 정당성 자체가 소멸된다고 볼 수 없다.
㈑ 소외 1의 위 사실적시는 위와 같이 큰 틀에서 군사반란 및 내란 세력과 그에 저항한 광주 시민과 학생들 사이의 관계를 뒤바꾸어 서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5·18민주화운동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과도 어긋나는 부분이 많다.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1980. 5. 초 무렵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하였다.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여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 투입을 사전에 계획했다.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대학교 정문 앞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진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곤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시위자들을 가격하여 부상을 입히고, 도망가는 시위자를 점포나 건물 안까지 추격하여 대량으로 연행하는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는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이 미리 공수부대를 훈련시키면서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고자 했던 계획과도 맞아 떨어진다. 이와 같은 난폭한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수차례 발포함으로써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자 일부 시민의 무장저항이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을 되짚어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 서술한 것처럼 계엄군이 단순히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유혈진압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 소외 1에 대한 형사 확정판결로 인정된 내란목적살인의 점의 범죄사실의 요지는,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귀중한 국민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시급하게 광주 재진입작전을 강행하지 아니하면 안 될 상황이나 또는 광주시민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있다고 볼 수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위를 조속히 진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계엄군에게 광주 재진입작전을 강행하도록 함으로써 다수의 시민을 사망하게 하였다"라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보면 광주의 비극은 소외 1이 내란목적살인의 범죄를 꾀하고 그 정을 모르는 계엄군을 이용하여 그 범죄를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지, 무장혁명세력의 폭동에 대항하여 어쩔 수 없이 계엄군이 자위권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 앞서 인정사실에서 본 것과 같이 계엄군은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장을 시작한 1980. 5. 21. 무렵 이전에도 총을 쏘아 어린 고등학생에게 총상을 입혔고, 광주역 쪽으로 지원을 나가는 계엄군 병력을 막아선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많은 시민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러한 총격에 의한 부상 외에도, 시민 저항세력의 무장 이전에 이미 공수부대원으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가 사망한 청각장애인 소외 33(최초 희생자), 계엄군이 방망이로 구타하여 사망한 소외 34(2번째 희생자) 등의 시민 희생 사례가 발생하였다.
이어 1980. 5. 21. 13:00 무렵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당시에는 계엄군 쪽으로 돌진해오는 장갑차 또는 버스에 총격을 가한 외에 산발적으로 흩어진 시위대, 피신하였다가 부상자 등을 부축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오던 시위대를 향하여도 사격을 가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그 무렵 집에서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던 임신부가 총을 맞고 사망하는 사례도 발생하였다. 이후 광주 봉쇄작전 과정에서 계엄군은 단순히 버스를 타고 국도로 이동 중인 버스에 총격을 가하거나, 시위대와 관계없는 민가의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시위와 무관한 사람들을 향해서까지 사격을 가함으로써 무장하지 않은 시민이나 어린이까지 희생된 사례가 많이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소외 1은 ‘학살은 없었다’라고 강변하는 서술을 반복하고 있는 바, ‘학살’이라는 단어의 평가적 성격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실제 상황과는 너무 거리가 먼 사실적 주장이라서 허위라고 보기에 무리가 없다.
㈔ 광주 시민과 학생들의 무장과 관련한 사실관계 중 위 표 순번 2-17 중 ‘삭제’로 표기한 부분은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허위로 보고 삭제를 명한다.
당시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대장이었던 소외 77은 1995년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1980. 5. 19. 방송국 경계병이 무기를 빼앗긴 것과 관련하여, "저희 병사들 중 1명이 소총을 뺏겨 시위대가 그 총을 아래로 던져버리는 일이 있었다. 나중에 시위대가 물러간 뒤 잃어버렸던 소총을 아래에서 되찾았는데, 건물 앞 불에 탄 차 안에 해당 소총이 불탄 채로 있었다. 실탄은 병사들이 개인별로 소지하지 않고 탄통에 보관하고 있었으므로, 15발의 실탄만 따로 잃어버릴 일은 없다"고 진술했다. 소외 1의 이 부분 서술은 짤막한 상황보고 기록에 의존하고 있는 점, 위 진술은 실제로 해당 방송국의 경계를 맡은 부대 지휘관의 진술로서 그 내용이 상세하고 구체적인 점, 당시 군인이었던 소외 77이 1995년 수사 과정에 이르러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을 허위로 진술할만한 이유를 발견하기 어려운 점 등의 사정을 고려하면, 위 소외 77의 진술은 충분히 믿을 만하다.
따라서 당시 시민들이 병사의 총기 1정을 뺏어 현장에 버려 방치하였을 뿐임에도, 마치 실제로 시민들에 의한 총기 탈취 및 실탄 15발 탈취 행위가 있었다고 서술한 것은 허위라고 봄이 타당하다.
⑷ 원고 5·18단체들과의 개별적 관련성
이 부분 사실적시는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행위와 5·18민주화운동의 성격 자체를 뒤바꾸어 서술한 것이 허위라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개별적 관련성을 따질 것도 없이 위 가.의 2)항(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사실의 적시가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하는 결과를 이어지는 지를 총론적 관점에서 논증한 부분)에서 본 사정만 종합하여 보더라도 명예훼손의 결과 발생을 넉넉히 인정할 수 있다.
⑸ 피고들의 귀책사유(손해배상청구 관련)
살피건대, 이 부분 허위사실의 적시는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 확정판결로 인정된 사실관계를 전도된 형태로 서술하는 모습을 띄고 있는데, 소외 1은 바로 그 대법원 확정판결의 피고인이었으므로 그 판결에서 인정된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이나 광주 시민과 학생들의 행위에 대한 법적 평가를 잘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은 쉽게 상정하기 어렵다(단지 소외 1이 그 진실을 외면하면서 책임을 인정하지도, 반성과 사죄를 하지도 않은 채 끝내 사망하게 되었을 뿐이다). 또한 저자인 소외 1이나 피고 2가 주관적으로는 ‘광주시민들이 무장혁명세력이자 폭도’이고 ‘계엄군은 정당한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라고 믿고 있거나, 그렇게 믿고 싶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믿음이 정당하다고 볼 수 없으므로 위법성이 조각되지 아니 한다. 따라서 저자인 소외 1과 출판자인 피고 2가 위와 같은 적시사실이 허위라는 점을 과실 없이 알지 못하였다고 볼 수 없고, 피고들이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도 어렵다.
⑹ 소결론
원고 5·18단체들의 출판 등 금지청구는 위 ⑴항의 표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각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범위 내에서, 손해배상청구는 해당 부분을 허위사실로 적시하여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범위 내에서 각 받아들일 수 있다.
라) 소외 1 자신의 5·18 관련 책임론에 관한 부분(= 삭제를 명하는 부분은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손해배상액 산정에 포함)
⑴ 이 사건 회고록의 관련 표현들
순번쪽내 용판 단 1-1p.26~27광주사태로 인한 직간접적인 피해와 희생이 컸던 만큼 그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유지(일반론 내지 의견표명) 또 상처와 분노가 남아 있는 한, 그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에 내놓을 제물이 없을 수 없다고 하겠다. 광주사태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원죄가 됨으로써 그 십자가는 내가 지게 되었다.삭제 1-2p.27나를 비난하고 모욕주고 저주함으로써 상처와 분노가 사그라진다면 나로서도 감내하는 것이 미덕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유죄를 전제로 만들어진 5.18특별법과 그에 근거한 수사와 재판에서조차도 광주사태 때 계엄군의 투입과 현지에서의 작전지휘에 내가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집요한 추궁이 전개되었지만 모두 실패했다.삭제 1-5p.382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고 있었으나,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 사이의 그 어느 시간에도, 전남 광주의 그 어느 공간에도 나는 실재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계엄군의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지시하거나 실행하기 위한 그 어떤 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참석한 일이 없다.삭제 1-8p.3845.18사태의 발단에서 종결까지의 과정에서 내가 직접 관여할 일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삭제 1-9p.387그때 내가 중앙정보부장서리와 보안사령관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내가 맡고 있던 그 어느 직책도 군의 작전사항에 관여할 권한과 책무가 근본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유지(직책상 권한과 책임 일반론을 설명한 것임) 1-11p.440~441군부대의 지휘권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상식에 속하는 얘기지만, 지휘계통에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계급이나 직책이 높다고 하더라도 지휘문제에 관여할 수 없다.유지(일반론 내지 의견의 표명) 보안사령관은 육군의 지휘계통에 있는 지휘관이나 참모가 아니므로 나는 보안사령관 재임시 그 어떤 작전지휘모임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참석한 일도 없다.삭제 1-17p.507당시 광주 현장은 물론 일체의 작전지휘 계통에 있지도 않았던 내가 단지 ‘실권자’였고 그 후 대통령이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광주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받는 일 또한 없지 않았을까.삭제 2-3p.381광주사태를 둘러싼 모든 논란의 중심에는 내가 있다. 그러니까 그 모든 시비와 논란을 종결짓고, 비극적 사태의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는 일도 나의 몫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 같다.유지(단순한 소회의 표현) 2-4p.381그러니까 광주사태의 원인과 그 결과가 모두 나의 잘못임을 인정하고 내가 사죄해야 한다는 것이다.유지(단순히 여론의 흐름을 소개) 2-6p.381~382내가 대통령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자 사람들은 역사와 국민의 이름을 앞세운 채 나에게 5.18사태의 진실에 관해 물었다. 묻는데 그치지 않고 추궁과 공격이 이어졌다. 시대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자 나와 5.18은 새삼 사법적 심판대에 서게 되었다. 그 결말은 나 개인의 수형에 그치지 않고 역사의 전도로 나타났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고착화된 것 같다.삭제 2-8p.383지금 와서 되돌아볼 때 정보기관 책임자로서 아쉽기도 하고, 또 책임감을 느끼는 점은 광주사태의 전조를 전혀 알아챌 수 없었다는 것과 5월 19일 이후 상황이 폭동사태로 악화될 때 정보 기능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계엄사의 합동수사본부장인 보안사령관은 상관인 계엄사령관의 참모 중 한 사람으로서 그 어떤 조언을 하거나 건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나는 광주에서 진행되는 작전상황과 관련해 조언이나 건의를 할 수조차 없었다.삭제 2-10p.383당시 5.17시국수습방안은 계엄의 전국 확대 이외에도 국기문란사범과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수사를 포함하고 있어서 나는 그 일에 힘을 쏟아야 했다. 5월 17일 밤 10시부터 관련 혐의자들을 연행하는 등 수사를 본격화했던 것이다. 또 광주사태 초기에는 상황이 그처럼 악화될 것으로 예상할 수도 없었고, 또 5월 20일 상황까지는 부실한 정보 때문에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유지(당시 저자가 처한 상황을 주관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진위 판단의 대상으로 보기 어려움) 5월 21일까지 2개 공수여단과 20사단이 순차적으로 증파되어 작전에 투입됐지만 전투 정보의 수집 및 분석은 작전부대 자체의 정보·작전 기능이 담당하는 일이고 중앙정보부나 보안사 등 일반 정보기관이 관여할 여지는 없는 것이다.삭제 2-11p.384그러나 5.18과 관련된 사실들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한 것이고, 내가 직접 겪은 사실들에 관한 내용은 매우 적다. 그 까닭은 다시 말하지만 5.18사태에 관해 내가 한 일, 직접 겪은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삭제
⑵ 위 표현들 중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표현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관계 요지
일반 독자가 통상의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에서 위 각 서술 부분을 접하는 상황을 전제로, 위 각 표현의 객관적인 내용, 문구의 연결 방법, 글 전체의 취지와 맥락, 그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등을 종합하여 저자가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사실적 주장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일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소외 1은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계엄군의 유혈진압이나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 등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책임이 없다.
▷ 자신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에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에 관하여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필요해졌고, 5·18민주화운동 이후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는 사정 때문에 자신이 그 책임을 억울하게 떠안게 되었다.
⑶ 허위성
앞서 본 인정사실 및 갑 제21, 22, 24 내지 27, 29, 30, 38호증, 을 제35, 48, 49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한 위 사실적 주장들은 모두 허위임이 증명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 자신을 포함한 신군부 세력이 12·12, 5·17 군사반란 및 5·18 관련 내란 행위를 한 것에 있어서 소외 1은 반란수괴 및 내란수괴라는 법적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럼에도 소외 1은 자신이 ‘물리적으로’ 광주에 실재하였다는 증거가 없는 점을 내세워 위와 같은 책임을 애써 부정하기 위해 이 부분 서술을 한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물리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기재 역시 독자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므로 삭제를 명한다). 보안사령관이나 중앙정보부장 서리라는 공식 직함을 떠나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유혈진압 자체가 내란의 수단으로서의 폭행·협박으로 인정되었고, 소외 1 자신은 그 내란의 수괴로 유죄의 확정판결을 받은 이상 이와는 배치되는 방향으로 책임을 부인하는 사실적 주장을 하는 것은 허위라는 판단을 면하기 어렵다.
㈏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에서 인정된 각 피고인들의 범죄사실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은 사실관계를 인정할 수 있는데, 이는 광주에서의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과 관련하여 소외 1의 회의 참석 등 의사결정 과정에의 관여, 그리고 그 실행행위의 분담 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 계획은 1980. 5. 21. 무렵부터 육군본부에서 여러 번 논의를 거친 뒤 최종적으로 신군부 세력의 일원인 소외 24가 5. 25. 오전 소외 55 작전참모부장에게 지시하여 육본작전지침으로 완성되었다. 5. 25. 12:15 국방부 내 육군회관에서 소외 1, 소외 15, 소외 24, 소외 25 등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열려 5. 27. 00:01 이후 위 작전지침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 소외 15는 광주 재진입작전이 논의되던 중인 5. 23. 12:30 무렵 소외 56 전교사 부사령관에게 무장 헬기 및 전차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조속히 진압할 것을 지시하였고, 5. 25. 오후에는 소외 55 작전참모부장과 함께 광주에 내려가 전교사 사령관 소외 46에게 위 작전지침을 직접 전달하였다.
- 소외 26은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의 모체부대장으로서 공수여단에 대한 군수지원, 행정 등의 지원을 하는 한편, 소외 46 전교사 사령관에게 공수여단의 특성이나 부대훈련 상황을 알려 주거나 광주 재진입작전에 필요한 가발, 수류탄과 항공사진 등의 장비를 준비하여 예하부대원을 격려하는 등 광주 재진입작전을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 위 작전지침에 따라 전교사 사령관 소외 46은 공수여단별로 특공조를 편성하여 전남도청 등 목표지점을 점령하여 20사단에 인계하기로 결정하는 등 구체적인 작전계획과 작전준비를 하였고, 이에 따라 공수여단 특공조가 5. 26. 23:00경부터 침투작전을 실시하여 광주 재진입작전을 개시한 이래 5. 27. 06:20까지 사이에 전남도청, 광주공원, ♧☆☆ 건물 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그 특공조 부대원들이 총격을 가하여 소외 47 등 시민 18명을 사망하게 하였다.
㈐ 서울고등법원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 판결에서 "광주 재진입작전을 실시하여 전남도청 등을 다시 장악하려면 위와 같이 무장하고 있는 시위대를 제압하여야 하며, 그 과정에서 이에 저항하는 시위대와의 교전이 불가피하여 필연적으로 사상자가 생기게 되므로, 피고인 소외 1 및 위 피고인들이 이러한 사정을 알면서 재진입작전의 실시를 강행하기로 하고 이를 명령한 데에는 그와 같은 살상행위를 지시 내지 용인하는 의사가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판시하였다. 또한 "재진입작전명령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시위대의 무장상태 그리고 그 작전의 목표에 비추어 볼 때, 시위대에 대한 사격을 전제하지 아니하고는 수행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므로, 그 실시명령에는 그 작전의 범위 내에서는 사람을 살해하여도 좋다는 발포명령이 들어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당시 위 피고인들이 처하여 있는 상황은 광주시위를 조속히 제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바꾸어 말하면 집권에 성공할 수 없는 중요한 상황이었으므로, 광주 재진입작전을 실시하는 데에 저항 내지 장애가 되는 범위의 사람들을 살상하는 것은 내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직접 필요한 수단이었다고 할 것이어서, 위 피고인들은 피고인 소외 1과 공동하여 내란목적살인의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판단하였다. 나아가 "피해자들에 대한 총격행위의 원인으로 공소장에 적시된 자위권 보유천명 또는 자위권발동 지시에 대하여, 피고인 소외 1은 배후에서 자위권 보유천명의 담화문을 발표하도록 지시·관여한 것으로 인정된다"고도 하였다. 대법원은 위 고등법원의 판단을 모두 수긍하였고, 위와 같은 사실관계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확정판결로 인정되었다.
이처럼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시민들이 희생된 것과 관련하여 소외 1이 관여하고 그에 따른 법적 책임도 져야 한다는 것이 명백함에도 소외 1은 이 사건 회고록의 해당 부분에서 교묘한 표현방법을 동원하여 이에 배치되는 사실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 위 다)항의 주제(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이라는 사실적 주장과 관련한 부분)에 관하여 판단하면서 상세히 본 바와 같이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이 위와 같은 각 범죄사실에 관하여 "시위진압행위는 정당행위, 정당방위·과잉방위, 긴급피난·과잉피난에 해당한다"라는 취지의 주장도 하였으나, 모두 배척되었다. 따라서 소외 1이 위와 같은 군사반란 및 내란, 내란목적살인에 관여한 것은 위법성의 측면에서도 정당화할 수 없으므로 그 책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 이 법원은 소외 1이 이 부분 서술에서 적시 또는 암시한 사실 및 진위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실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일반론을 전개하는 부분, 여론의 동향을 단순 전달하는 부분, 자신의 주관적인 상태를 서술한 부분, 당시 상황에 대한 ‘자기변명’에 가까운 부분 등은 모두 제외하고 명백하게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시민들의 희생에 관하여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부정하는 부분만 추려내어 허위성 판단의 대상으로 삼았다.
⑷ 원고 5·18단체들과의 개별적 관련성
살피건대, ①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은 그 당시부터 군부가 벌이는 헌법질서 문란 행위의 배후에 실권자인 소외 1이 있음을 직감하고 "소외 1은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는 등 저항의 대상으로 그를 명확하게 특정하여 왔던 점, ② 이후 원고 5·18단체들의 진상규명 및 참여자 명예회복 활동의 초점은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발포명령을 한 책임자를 찾아내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아 왔고, 그중에서도 소외 1의 책임을 밝혀내는 것에 역량을 집중하였던 점, ③ 그 결과 소외 1을 군사반란 및 내란의 수괴이자 5·18관련 내란목적살인의 범죄자로 인정하는 판결이 확정됨으로써 위와 같은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게 되었던 점, ④ 원고 5·18단체들은 신군부 세력의 군권 및 정권 장악으로 최고 권력자가 된 소외 1을 두려워하지 않고 유·무형의 탄압을 견디며 그의 이른바 ‘학살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기에, 위와 같은 결과를 얻게 된 것을 각 단체들의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는 등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삼고 있는 점, ⑤ 따라서 소외 1이 실제로는 자신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고, 단지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워야 할 필요성 때문에 억울하게 범죄혐의를 뒤집어쓴 것이라는 허위사실을 적시하는 것은 소외 1의 법적 책임을 전제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온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에도 직·간접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위와 같은 허위사실의 적시는 원고 5·18단체들의 법인으로서의 인격권과 밀접한 개별적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⑸ 피고들의 귀책사유(손해배상청구 관련)
소외 1은 자신이 피고인으로 된 형사 확정판결에서 인정된 사실관계와 완전히 배치되는 사실적 주장을 하여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하였고, 피고 2는 위와 같은 내용이 포함된 이 사건 회고록을 그대로 출판하였는바, 피고들이 위와 같은 적시사실이 허위라는 점을 과실 없이 알지 못하는 상황 자체를 쉽게 떠올리기 어렵고, 피고들이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도 어렵다.
⑹ 소결론
원고 5·18단체들의 출판 등 금지청구는 위 ⑴항의 표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각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범위 내에서, 손해배상청구는 해당 부분을 허위사실로 적시하여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범위 내에서 각 받아들일 수 있다.
마)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계엄군 병사 관련 부분(= 일부 삭제, 다만 일부 삭제를 명하는 부분에 대한 피고들의 귀책사유가 인정되지 않아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손해배상액 산정에는 불포함)
⑴ 이 사건 회고록의 관련 표현들
순번쪽내 용판 단 1-12p.470오후 1시경 시위대는 소외 78 지사가 약속했던 시간이 되었음에도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은 데 대해 항의하면서 공수부대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졌다.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 측 장갑차 한 대가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돌진했다.유지(허위라는 점에 대한 입증 부족) 순간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대원들은 돌진하는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지부 건물 등으로 흩어졌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대원 2명이 시위대 장갑차에 치여 1명은 즉사했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삭제
⑵ 위 표현들 중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표현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관계 요지
일반 독자가 통상의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에서 위 서술 부분을 접하는 상황을 전제로, 위 표현의 객관적인 내용, 문구의 연결 방법, 글 전체의 취지와 맥락, 그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등을 종합하여 저자가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사실적 주장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일 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광주시민과 학생들로 구성된 시위군중의 일원인 사람이 운전하여 공수부대 쪽으로 돌진한 장갑차에 치어 계엄군 병사가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⑶ 허위성
앞서 본 인정사실 및 갑 제38, 48, 49, 50호증, 을 제1, 29, 52, 83, 85, 86, 170, 171, 173호증의 각 기재와 당심 증인 소외 80의 증언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한 위 사실적 주장들은 모두 허위임이 증명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 1980. 5. 21. 13:00을 전후하여 광주시민과 학생들로 구성된 시위군중(이하 ‘시위군중’이라 한다)은 ■■빌딩과 ♧◎◎ 건물 사이의 금남로를 점거한 상태에서, 이를 진압하여 해산시키기 위해 당시 전남도청을 등지고 분수대 앞에 포진해있던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 그 위치에 있던 계엄군은 주로 공수부대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계엄군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기준으로 도로 중앙선의 왼쪽에 11공수여단 62대대가, 오른쪽에 11공수여단 61대대가 나란히 도열하고 있었다. 또한 시위진압 지원을 나온 기갑학교 소속 장갑차(무한궤도형 장갑차, 이하 ‘계엄군 장갑차’라 한다) 2대가 위 61, 62대대의 앞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나중에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소외 79 일병은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으로서, 당시 63대대는 61대대 후방에 있었다.
㈏ 위 일시 무렵 시위군중은 위 공수부대의 선두에 배치된 계엄군 장갑차에 화염병을 투척하였다. 불이 붙은 계엄군 장갑차는 급히 뒤로 후진 기동을 하였고, 이어 곧바로 시위군중의 일원인 누군가가 운전한 장갑차(원형 바퀴가 달린 도시형 장갑차, 이하 ‘시위군중 장갑차’라 한다)가 계엄군이 포진한 방향으로 달려 나왔다. 위와 같이 화염병 공격을 받아 불이 붙은 계엄군 장갑차가 후진 기동을 함과 동시에 시위군중 장갑차가 빠르게 다가오자 계엄군의 저지선은 일순 붕괴되어 소속 병사들은 도청 분수대 뒤와 도로 양 옆 방향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63대대 소속의 소외 79 일병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이하 ‘장갑차 사망 사고’라 한다).
㈐ 5·18민주화운동 이후부터 이 사건 변론종결일 현재까지 위 장갑차 사망 사고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진술이 있었다(원문 중 쟁점 판단에 도움이 되는 부분은 재판부가 강조 표시 를 하였다).
㈑ 소외 80은 1999년 잡지 (잡지명 2 생략)에 기고문을 보냈을 때부터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자신이 같은 63대대 병사의 입장에서 소외 79 일병의 장갑차 사망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소외 80의 진술에 관하여 보건대, ① 그가 사망한 소외 89와 같은 대대 소속 사병으로서 보다 가까이서 장갑차 사망 사건을 목격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점(그와 상반되는 진술을 하는 이들은 대개 사병들 속에 섞여 있지 않은 공수부대 장교들이거나 제3자로서 사건을 지켜 본 기자 등으로서 이른바 ‘신용성의 정황적 보장’ 측면에서 위 소외 80의 진술보다는 힘이 약한 편이다), ② 소외 80의 진술 내용이 꽤나 구체적이고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쉽게 묘사하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는 점 , ③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외 80이 본 것에 부합하는 취지로 진술하는 다른 공수부대원들도 있어서 계엄군 측의 증언이 전부 그와 상반되는 것은 아닌 점, ④ 소외 80은 1990년경부터 소외 79 일병이 사망하게 된 원인에 대하여 자신이 기억하는 바를 진술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시점에서 그가 굳이 보지도 않은 일을 거짓으로 말할 특별한 동기를 찾을 수 없는 점 등을 고려하면, 소외 80이 실제로 보았다고 하면서 위와 같이 증언하는 것은 뚜렷한 반증이 없는 이상 장갑차 사망 사고가 계엄군 장갑차에 의해 발생하였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로 삼기에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특히 장교 출신인 소외 81도 위 소외 80과 같은 취지로 진술하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5·18 수사 당시 그가 참고인으로 진술한 것이기는 하나, 5·18 당시 공수부대 중대장으로 현장에서 시위진압작전을 수행하였던 점을 고려하면 진술 여하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소외 89 사망의 원인을 계엄군 장갑차에 의한 사고라고 전해 들었다고 진술하여 위 소외 80의 진술 신빙성을 높여준다.
㈓ 소외 82, 소외 83 등 현장에 있던 장교 중에서는 정확히 어느 장갑차에 의해 사고가 발생하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중립적인 진술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 이유에 관하여 그들은 당시 화염병 때문에 불이 붙은 계엄군 장갑차가 뒤로 후진을 하는 상황에서 시위군중이 운전하는 장갑차와 버스가 연달아 공수부대원들 쪽으로 돌진하여 오는 바람에 병사들이 좌우로 퍼지듯 퇴각을 하고 있었고, 최루탄 연기까지 자욱하여 정확한 상황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묘사는 당시 객관적으로 벌어진 일들과 잘 맞아 떨어진다.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위군중의 바퀴형 장갑차에 치인 것이라고 단언하여 말하는 장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위 소외 83의 경우 수사 단계에서는 잘 모르겠다고 하였는데, 공판 단계에서는 시위군중의 장갑차에 치인 것이라고 진술을 바꾸었는데, 어쩌면 다른 공수부대 장교들이 수사단계에서 그와 같이 진술하였다는 점을 전해 듣고 진술을 고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는 것을 결코 불합리하다고 볼 수 없다.
㈔ 시위군중의 바퀴형 장갑차에 의한 사고라고 단언하는 장교들의 진술에 관하여 보건대, ① 앞서 본 바와 같이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어 후진을 하자 병사들이 좌우로 흩어지듯 퇴각을 하고, 바람이 시위군중이 있는 곳에서 공수부대 쪽으로 불어와 최루탄 연기가 계엄군들 쪽에 자욱했던 당시 상황에서 어떻게 장교인 자신들과 가까운 거리에 있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소외 89 사고 장면을 정확히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인지 의문인 점, ② 사고 발생의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소외 84, 소외 85는 소외 89가 장갑차에 ‘들이받히는(충격형)’ 사고를 당한 것처럼 묘사하였는데 소외 86, 소외 87은 ‘깔리는(역과형)’ 사고를 당한 것처럼 진술하여 시위군중 장갑차에 의한 것이라고 진술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내용이 엇갈리는 점, ③ 공수부대 병사였던 소외 80이 굳이 허위진술을 할 동기를 찾기 어려운 반면, 위 공수부대 장교들은 진술 여하에 따라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피의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른바 신군부의 ‘자위권 발동론’에 맞춰 시위군중이 몰고 온 장갑차에 공수부대 병사가 피해를 입은 것처럼 진술할 이익이 충분히 있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병사로서 가까이서 직접 보았다고 하는 소외 80과 장교 입장에서 분명히 전해 들었다고 하는 소외 81의 상반된 진술에 의해 위 각 장교들의 주장은 충분히 반박이 된다.
㈕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7. 7. 24. 작성한 조사결과보고서(갑 제38호증, 86쪽)와 서울지방검찰청 및 국방부 검찰단이 1995. 7. 18. 작성한 5·18 관련사건 조사결과(을 제1호증, 99쪽)에는 각각 소외 89가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였다고만 기재되어 있을 뿐, 정확히 그것이 계엄군 장갑차인지, 시위군중 장갑차인지는 서술되어 있지 않다. 다만 위 조사결과보고서에는 ‘위원회가 13시 전후의 도청 앞 발포 상황에 대하여 수집한 기록’이라는 내용으로(위원회의 조사 결과가 아니라 단순히 수집한 자료를 전재하는 것이라는 취지이다), "13시경 시위대 선두에 있던 장갑차가 시동을 건 후 불시에 계엄군 대열에 돌진하여 선두에 있던 61, 62대대는 피했으나 후방에 위치한 63대대 병사 1명이 압사"라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기는 하다(갑 제38호증, 87쪽). 그렇지만 이는 5·18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이후 계엄군 입장에서 정리한 ‘육군본부, 광주사태(상황, 경과, 결과)’의 내용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당시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희생이 불가피하였다는 것을 강변하려던 신군부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고, 과연 어떤 뒷받침 자료나 증거를 바탕으로 위와 같이 상황을 정리하였는지는 알 수 없어, 위와 같은 기록의 존재만으로 소외 80과 소외 81의 진술 신빙성을 뒤집기에는 부족하다. 오히려 당시 63대대 간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진압작전 수기(갑 제49호증의 5, 3쪽)’에는 "후진하는 APC 에 뒤에 있던 63대대 병력 1명이 깔렸으며"라고 기재되어 있는 자료도 있다.
㈖ ♧▽일보 주재기자 소외 88의 진술은 당시 상황에 관하여 아래와 같은 중요한 부분에 오류가 있어, 위와 같이 대립되는 진술 중 어느 한 쪽의 신빙성을 분명하게 높여주는 정도의 증거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없다. 즉,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결과나 5·18 수사결과 발표 등에서 객관적으로 확인된 당시 상황에 의하면, 우선 계엄군 장갑차에 대한 화염병 투척이 있고, 그와 동시에 혹은 그 직후에 시위군중의 일원이 운전한 도시형 장갑차가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하였으며, 그 뒤를 ♧□여객 버스가 따라 붙어 전남도청 방향으로 진출한 것이었다(시위군중 장갑차에 의한 사고라고 설명하는 장교들의 경우에도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위와 같이 진술한다). 그럼에도 소외 88은 위 선후관계를 반대로 진술하고 있다. 심지어 위와 같은 오류를 바탕으로 구체성의 살까지 붙여서 매우 자세히 상황을 묘사하고 있기까지 하다. 기억의 일부 오류가능성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추가적인 근거가 있지 않는 한 위 소외 80, 소외 81의 각 진술에 따른 사실관계의 확정을 방해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한다.
⑷ 원고 5·18단체들과의 개별적 관련성
위 표현의 요지는 광주 시민과 학생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장갑차를 운전하여 계엄군에 돌진하는 과정에서 그 장갑차에 계엄군 병사가 깔려 사망하였다는 것으로서, 광주 시민과 학생들의 저항 방식이 과격하였고, 심지어 계엄군 병사의 희생까지도 아랑곳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위와 같은 사실적 주장이 허위인 이상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 및 그 유족들로 구성된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시키는 것이라고 봄이 상당하다.
⑸ 피고들의 귀책사유(손해배상청구 관련)
그러나 앞서 든 증거들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 및 사정, 즉 ① 장갑차에 치여 계엄군 병사가 사망한 일은 그 사건만 놓고 보면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체 5·18민주화운동 전개 과정을 통틀어서 보았을 때 군이나 경찰,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 중 어느 주체도 그것을 주요 사건으로 기억할 정도라고는 보기 어려운 점, ②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압작전 당시 보안사령관이자 신군부 세력의 수장이라는 지위에 있던 소외 1이 위와 같은 사건의 세부 사항에 대해서까지 세세하게 챙겨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점(이는 ‘북한군 남파 여부’나 ‘계엄군에 의한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 여부’ 등과 같이 굵직한 사실관계들에 관하여는 정보가 집중되는 지위에 있었던 점을 불리한 간접사실로 반영한 것과 반대되는 측면이다), ③ 당시 공수부대 소속으로 장갑차에 치여 사망하는 현장을 목격하였다고 하는 소외 80의 진술이 위와 같이 허위라고 보는 유력한 증거가 되기는 하였지만, 그의 진술은 원고 5·18단체들의 주장에 의하더라도 1999년 (잡지명 2 생략)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는 것인바, 소외 1이 위 잡지의 내용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단할 수 있는 사정은 나타나지 않는 점, ④ 위 잡지에 소개된 위 소외 80의 진술이 2010년 발간된 ‘(도서명 6 생략)’이라는 단행본의 한 문단 정도로 압축되어 인용된 것을 제외하고는 소외 1이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사회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고 보기 어렵고,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을 집필할 당시까지도 비록 계엄군 중심의 진술이기는 하나 위 소외 80과 반대되는 입장의 진술도 없지 않았던 점, ⑤ 소외 80이 ‘계엄군 병사를 치여 사망하게 한 장갑차는 계엄군 소속의 무한궤도를 장착한 장갑차였다’는 취지로 진술하는 사실확인서는 2019. 3. 25.자로 작성된 것이고, 이 법원에서 그가 증언한 것은 2021. 9. 15.이라서, 이 사건 회고록 집필 당시에 소외 1이 위 사실관계를 정확히 인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 점, ⑥ 원고 5·18단체들이 이 사건 회고록 출간 이전부터 계엄군 병사가 장갑차에 치어 사망한 사건을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있어 중요한 사실관계 중 하나로 널리 쟁점화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는 자료도 딱히 제출되지 않은 점 등에 비추어 보면, 갑 제37, 38, 48, 49호증의 각 기재 등 원고들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저자인 소외 1과 출판자인 피고 2가 이 사건 회고록 집필 및 출판 당시 위 적시사실이 허위임을 알았다거나, 알지 못한 데에 과실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⑹ 소결론
원고 5·18단체들의 이 부분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는 피고들의 귀책사유를 요하지 않으므로 위 ⑴항의 표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각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범위 내에서 이를 받아들이되, 손해배상청구는 해당 부분이 허위라는 점에 대한 소외 1의 고의 또는 과실이 인정되지 않으므로 손해배상액 산정 대상에서는 제외한다.
바) ‘암매장’은 유언비어라고 한 부분(= 삭제를 명하고,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손해배상액 산정에 포함)
⑴ 이 사건 회고록의 관련 표현들
순번쪽내 용판 단 2-28p.485광주사태 당시에 나돌았던 유언비어 가운데 계엄군이 광주시민들을 마구 학살해 여기저기 암매장했다는 내용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의혹은 국회 청문회에서도 제기됐고 그 뒤 5.18특별법에 따른 검찰의 조사 때에도 거론되었다. ●●대학 뒷산에 묻었다는 주장 또 암매장하기 위해 시청 청소차에 시체를 대량으로 실어 어디론가 갔다는 소문들도 있었다. 암매장 장소로 지목된 곳을 실제로 파헤쳐보기도 했지만 그런 주장들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삭제
⑵ 위 표현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관계 요지
일반 독자가 통상의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에서 위 서술 부분을 접하는 상황을 전제로, 위 표현의 객관적인 내용, 문구의 연결 방법, 글 전체의 취지와 맥락, 그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등을 종합하여 저자가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사실적 주장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일 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계엄군이 희생당한 광주시민의 시신을 여기저기 암매장했다는 것은 유언비어이고, 나중에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⑶ 허위성
앞서 본 인정사실 및 갑 제21, 22, 38, 44, 46, 54, 55호증, 을 제140, 160, 161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한 위 사실적 주장은 허위임이 증명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 소외 1의 위 표현에 대한 허위성 증명이 갖는 중층적인 구조(‘암매장설은 유언비어이다’라는 말이 허위임을 밝혀야 하기 때문에 증명해야 할 명제가 이중부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를 감안하면, 위 표현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원고 5·18단체들이 주장 증명하고 이 법원이 판단하여야 하는 내용은, ‘계엄군이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어딘가에 암매장하였다는 구체적인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5·18민주화운동 이후 장기간에 걸쳐 광주 지역 곳곳에서 정상적인 장사를 지내지 않고 매장된 것이 분명한 상태로 발견된 여러 시신들, 그리고 여전히 행방이 묘연한 희생자들이 있는 이유가 (원고 5·18단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계엄군의 암매장에 기인하였을 개연성이 충분한지로 모아져야 한다. 만약 그럴 개연성이 충분하다면, 그러한 주장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근거 없는 유언비어’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마치 원고 5·18단체들이 어떤 ‘유언비어’에 현혹되어 암매장 시신 수습활동이나 행방불명자를 찾는 활동 등을 전개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어, 결국 허위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광주 시민과 학생들에 대하여 곤봉, 대검, 총기 등을 이용하여 잔혹한 유혈진압을 감행한 사실과 그로 인해 여지껏 정확한 숫자를 다 파악하지 못한 많은 광주 시민과 학생들이 사망하게 된 사실, 계엄군은 그중 일부의 시신을 확보하고도 유족을 찾아 인계하지 않고 광주교도소 뒤편 나무 부근에 매장하기도 한 사실(다만 소외 1 등은 이를 ‘가매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등은 객관적으로 밝혀졌고, 소외 1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관계이다. 또한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차원에서 관계 법률에 따라 국가가 설치 및 관리하는 국립 5·18민주묘지에는 별도로 ‘행불자 묘역’을 만들어 현재까지 69명가량을 공식적으로 ‘행불자’로 인정하여 그들의 시신을 찾을 때까지 가묘 상태로 원혼을 모시고 있기도 하다. 위와 같은 사실관계를 논리적으로 조합하면 지금까지 행방을 찾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계엄군에 의해 희생된 뒤에 어딘가에 암매장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론하는 것은 충분한 개연성이 있고, 이러한 추론의 결과를 두고 ‘근거 없는 유언비어’라고 할 수는 없다.
㈐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보고서에는 ‘▼▼동 미니버스 총격 사건 발생 후 ♧◁마을 여단 상황실로 이송된 부상자 중 2명을 병사들 3명이 인근 야산 중턱으로 데려가 사살한 뒤 암매장하였다’는 기재가 있고, 당시 광주광역시청 ♧▷과 직원 소외 90이 위 2명의 시신을 수습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위와 같은 일부 사실관계에 의해 ‘계엄군에 의해 광범위한 암매장이 벌어졌다’는 점까지 증명된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암매장 관련 진술들이 단순한 유언비어로 치부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라는 점이 충분히 뒷받침된다.
㈑ 5·18특별수사본부는 1996. 1. 23. 광주 현지 조사 후 "13개 사체 암매장 가능 지역에 관하여 현장조사를 시행하였으나 자료를 찾을 수 없어 현재로서는 발굴이 어렵다"라는 취지의 발표를 한 사실이 있다. 그렇지만 위 발표 자체에 의하더라도 암매장 행위가 없었다는 취지가 아니라, 단지 현재로서는 발굴이 어렵다는 것일 뿐이다. 2018. 3. 13. 법률 제15434호로 제정된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하 ‘5·18진상규명법’이라 한다)에서 남은 진상규명 대상의 하나로서 ‘실종·암매장 사건’을 규정하고(2021. 1. 5. 법률 제17886호로 개정되기 전의 구 5·18진상규명법 제3조 제1호), 그에 따른 조사를 지속하고 있다. 암매장설이 사실무근이라는 결론이 공인된 국가기관에 의해 내려진 바 없고 오히려 국가 주도로 법령에 따른 관련 진상규명 절차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주장이 유언비어에 불과하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사실관계 조사가 결여된 심히 경솔한 표현으로서 허위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⑷ 원고 5·18단체들과의 개별적 관련성
원고 5·18단체들은 그동안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 중에는 계엄군의 암매장으로 인하여 한동안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거나 유족을 찾지 못해 무연고자로 남은 이들이 많고 심지어 아직까지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이들도 있다"고 호소해왔다. 이러한 호소는 앞서 본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서도 일부 그럴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단서가 발견되는 등 상당한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현재는 국가 차원의 행방불명자 시신 찾기 및 암매장 추정지역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소외 1은 이 사건 회고록에 ‘암매장은 근거 없는 유언비어’라는 요지의 표현을 하였다. 만약 소외 1의 주장이 진실하다면, 5·18단체들은 그동안 유언비어에 현혹되어 나라의 힘까지 빌려가며 행방불명자 찾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 되고 만다. 이를 보통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원고 5·18단체들이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유언비어’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부분 허위사실의 적시는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하는 것으로서 해당 원고들과 개별적 관련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⑸ 피고들의 귀책사유(손해배상청구 관련)
살피건대, ① 원고 5·18단체들은 임의단체로 있을 무렵부터 행방불명자 소재 파악 활동을 주요한 진상규명 활동의 하나로 꾸준히 전개해왔던 점, ② 암매장 가능성에 대한 국방부 차원의 조사도 이뤄져 일부 그 주장에 부합하는 사실관계가 확인되기도 한 점, ③ 소외 1을 도와 ‘책임정리’를 맡았다고 하는 소외 74의 진술에 의하면 5·18민주화운동 관련 서술 부분은 광범위한 자료들을 참조했고, 그중 터무니없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제외하고 내용을 구성하였다고 하는바(을 제169호증 참조), 그 과정에서 이 사건 회고록의 출간 이전에 이미 나와 있던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보고서 등도 입수하여 검토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하고, 나아가 국립 5.18민주묘지의 행불자 묘역에는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행불자 69명가량의 묘역이 설치되어 있는 사실이 여러 차례 언론에 보도되어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쉽게 확인이 가능했던 점, ④ 만약 위와 같은 자료를 확인하지 않은 채 혹은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암매장은 근거 없는 유언비어’라고 심히 경솔하게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이라면 어느 경우든 허위사실 적시에 관한 과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아야 하는 점 등을 종합하면, 저자인 소외 1과 출판자인 피고 2가 이 부분 표현이 허위라는 점을 과실 없이 알지 못하였다고 볼 수 없고, 피고들이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도 어렵다.
⑹ 소결론
원고 5·18단체들의 이 부분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 및 해당 부분을 허위사실로 적시하여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취지의 손해배상청구는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
사) 광주교도소 습격 관련 부분(= 북한군 등의 개입설을 암시하는 부분만 삭제하고 , 그 범위 내에서만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손해배상액 산정에 포함)
⑴ 이 사건 회고록의 관련 표현들
순번쪽내 용판 단 2-33p.5185.18사태 때 계엄군은 광주시내는 물론 광주시 외곽 등 여러 곳에서 흉기 또는 총기를 든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공격 양상이 가장 집요했던 것은 광주교도소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곳은 모두 여섯 차례나 무장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 170명, 강력범 300여 명을 포함해 총 2,64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2-33p.518수용자들을 자극해 교도소 내 폭동을 유발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북한이 광주에 있는 여러 고정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시키라"는 지령을 내리는 것이 우리 정보당국에 의해 포착되었다.삭제 2-34p.519~520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처음 습격한 것은 5월 21일 12시경이었다. 당시 교도소는 31사단 병력이 경비하고 있었는데 무장시위대는 총을 난사하며 공격해 왔다. 그러자 전교사는 교도소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3공수여단을 긴급증파했었다. 시위대는 이날 저녁 7시 20분경 교도소 주변에 매복해 있다가 31사단 병력과 교체된 3공수여단 병력에게 기습 총격을 가해왔다. 3여단 15대대장의 임무 교대 중 바로 옆에 있던 무전병이 저격을 당했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권총을 차고 한눈에 고위 지휘관인 것을 알고 잠복해 있던 무장시위대가 저격을 한 것인데 빗나가서 바로 곁에 있던 무전병이 맞은 것이다.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는 그처럼 대담하게 나오기 어렵다.삭제 2-35p.520다음날인 22일에는 새벽 4시경 LMG(경기관총)를 탑재한 차량으로 공격해오는가 하면 10시 20분경에는 소방차를 몰고와 총격을 가하는 등 공격 양상이 매우 집요했다. 23일에는 소방차를 몰고와서 3공수여단 병력을 공격하던 중 시위대 4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이날 저녁 7시경에도 총격을 가하며 교도소를 습격해와 교전을 벌였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2-36p.521~522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했다는 사실은 광주사태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교도소를 습격해 수감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은 전쟁 수행 중의 점령군 또는 혁명적 상황에서 혁명군이 취하는 교과서적인 작전이다. 5.18 당시 그들은 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까지 그처럼 교도소 공격에 집착했을까.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미전향 장기수들, 엄중한 정치범들, 간첩들을 해방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고 단언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삭제 2-37p.5225.18사태가 수습된 뒤, 특히 ‘민주화’ 이후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진술을 담은 기록물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때의 활약상에 따라 적지 않은 ‘민주화 유공 보상금’도 지급되었다. 그런데 자신이 교도소를 공격했다고 나선 사람은 없다고 한다.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사살된 사람들이야 죽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살아 도망간 사람들도 있을 텐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그렇다면 교도소 습격을 주도하고 참여했던 사람들은 왜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우리 국민 앞에 나설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삭제
⑵ 위 표현들 중 ‘판단’란에 ‘유지’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표현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관계 요지(위 표현들 중 ‘판단’란에 ‘삭제’로 표기한 부분은 북한군 개입설과 연관된 표현으로 분류하여 앞에서 별도로 판단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적시 또는 암시 사실에서 제외하고 그 나머지 부분만 판단한다.)
일반 독자가 통상의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에서 위 각 서술 부분을 접하는 상황을 전제로, 위 각 표현의 객관적인 내용, 문구의 연결 방법, 글 전체의 취지와 맥락, 그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등을 종합하여 저자가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사실적 주장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일 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저항세력은 광주교도소를 집요하다고 할 정도로 여러 차례 공격했다.
▷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음을 밝히면 국가로부터 다양한 보상을 받게 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광주교도소 습격에 가담하였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⑶ 허위성
앞서 본 인정사실 및 갑 제21, 22호증, 을 제1, 140, 161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에 비추어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적시 또는 암시한 위 사실적 주장들을 허위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 대법원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확정판결에서 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 방향으로 여러 차례 총격을 가한 사실이 있다는 전제에서, 그러한 총격에 대응하여 광주교도소를 방어하기 위해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것은 정당행위에 해당하여, 그 부분에 한해서는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에게 국헌문란의 목적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 서술한 표현들의 허위성을 판단할 때 위 대법원 전원합의체 확정판결에서 인정한 사실관계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 주제에 대한 판단에 관해서만 그와 배치되는 사실관계를 내세워 소외 1의 표현을 허위라고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다만, 교도소 방향을 공격한 것의 동기를 북한과 연결시키는 부분에 관해서는 ‘북한군 개입설’의 일부로 보아 허위로 판단하였음은 앞서 본 바와 같다).
㈏ 위 대법원 확정판결의 원심에 해당하는 서울고등법원 판결에서도 "3공수여단 11대대 병력이 1980. 5. 21.부터 5. 23.까지 광주교도소의 방어임무를 수행하던 중 무장 시위대로부터 전후 5차례에 걸쳐 공격을 받았는데, 5. 22. 00:40경에는 차량 6대에 분승하여 광주교도소로 접근하여 오는 무장 시위대와 교전하고, 5. 22. 09:00경에는 2.5톤 군용트럭에 엘엠지(LMG) 기관총을 탑재한 상태에서 광주교도소 정문 방향으로 접근하면서 총격을 가하여 오는 무장시위대에 응사하는 등 2차례의 교전"이 있었던 사실을 인정하였고, 대법원은 위와 같은 사실인정을 모두 수긍하였다. 소외 1이 교도소 부근 교전과 관련하여 서술한 내용은 위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인정된 사실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고, 원고들이 제출한 증거들을 모두 믿는다고 하더라도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벌어진 교전의 횟수나 동원된 무기의 규모, 참여한 시민저항세력의 숫자 등에서 일부 차이가 있을 뿐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양측의 총격전이 있었던 사실 자체는 번복되지 아니 한다.
㈐ 원고들은 설령 총격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시민저항세력에게 교도소를 습격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교도소가 광주시 외곽으로 연결되는 고속도로와 국도 부근에 있었는데, 교도소를 수비하는 계엄군이 광주에서 나가거나 광주로 들어오는 시민들의 차량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바람에 거기에 응사하는 과정에서 일부 총격전이 있었을 뿐이고, ‘집요한 공격’이라고 할 정도의 횟수도 아니었으며, 계엄군의 중화기에 비하면 칼빈 소총 몇 자루 정도에 불과하여 휴대한 무기도 보잘 것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교도소 부근 총격전’의 전말에 관한 원고들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이는 객관적으로 벌어진 사태를 주관적으로 어떻게 받아 들여 평가하고 해석하는가의 문제에 그칠 뿐이다. 소외 1은 그것을 ‘교도소에 있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구출하기 위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집요한 공격을 가한 것’이라는 해석을 가미하였고, 그중 ‘북한군 개입설’을 암시하는 부분은 별도로 허위사실로 판단하였으므로, 이를 제외한 나머지 객관적 사실관계는 주요한 부분에서 진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⑷ 소결론
그렇다면 이 부분 표현에 관해서는 그것이 허위라는 점에 대한 증명이 없으므로, 이와는 다른 전제에서 하는 원고 5·18단체들의 청구는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
아) 그 밖의 사실관계에 관한 부분
⑴ 큰 주제로 한데 묶기 어려운 아래 각 표현들이 허위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과 그 이유, 근거는 아래 표에서 보는 바와 같다.
순번쪽내 용판 단이 유근 거 2-1p.380도청 지하실에 설치된 엄청난 분량의 폭약을 해체하려다 피살된 학생의 희생은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삭제계엄군이 작성한 자료에 등장하는 ‘폭약 해체 작업에 참여하였다가 희생당한 사람’으로 기재된 소외 91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확정판결에서 인정한 사실관계에 따르면 사망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폭약관리반 중 사망한 사람은 소외 92로 보이는데 그 조차도 같은 시민저항세력에 의해 희생된 것이 아니라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작전 과정에서 특공조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종합하면 마치 시민저항세력 중 강경파가 온건파 시민을 직접 사망케한 것처럼 기술한 위 부분은 허위라고 볼 수 있다.갑22, 갑38 2-24p.434지하실로 들어가 폭발물에 장착되어 있던 뇌관 제거 작업을 하던 중 강경파 학생들에게 폭발물 해체작업에 협조하던 온건파 학생이 발각되어 총격으로 사망했다.삭제 2-12p.390주변에 돌을 주을만한 곳이 없었던 점에 비추어 학생들은 돌을 미리 가방에 담아왔던 것이다.유지당시 주변의 상황을 전제로 자신이 나름대로 추론한 내용을 소개하는 것에 불과하고, 굳이 진위 여부를 가려야 정도로 단정적인 사실관계를 표현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학생들이 계엄군에 항의하며 투석전을 전개한 것은 사실이므로 그 돌을 주변에서 주웠는지, 아니면 미리 가방에 담아왔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2-15p.395유언비어들은 날조된 사실에 근거한 악랄한 내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유포 과정이 매우 조직적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소외 93라는 여인이 확성기를 단 차량을 이용해서 벌인 가두 선동이었다. 5월 20일 밤 9시가 지났을 무렵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은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시체 두 구를 싣고 와서는 광주 시가지를 누비고 다녔다.삭제소외 93이 가두방송을 시작한 것은 1980. 5. 21. 새벽부터이므로 기본적인 사실관계에 오류가 있는 점, 5·18 진압작전 당시 505보안부대의 내부보고 자료에 의하더라도 소외 93이 가두방송을 시작할 무렵인 5. 21. 02:00경 계엄군의 곤봉 구타로 사망한 사람이 2명 발생하였던 점, 그중 한 명은 소외 94으로서 망치 등 둔기로 인한 우측 두정골 열상 및 대검 등 예기로 인한 좌측 전두부 자상으로 사망한 점, 소외 93이 트럭 또는 리어카에 싣고 다녔다고 하는 시신은 정체불명의 시신이 아니라 위와 같이 계엄군의 구타로 사망한 희생자들의 시신인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이 부분 표현은 허위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갑38 2-23p.431계엄군이 철수한 후 무장시위대에 의한 강도 사건이 잇따르자삭제2건의 강도사건 발생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나, 당시 시민저항세력이 상당한 규모의 총기를 보유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위와 같이 평시에도 있을법한 수준의 사건·사고가 있었던 것에 그치고 치안이 대체로 양호하였던 것을 보면, 마치 강도 사건이 빈발하여 치안이 좋지 않았던 것처럼 묘사한 것은 허위라고 볼 수 있다.갑37 2-27p.475♧▲▲협의회의 자료(1987년)는 "이동 중 음주운전 및 과속으로 인한 전복 충돌 등의 교통사고를 일으켜 3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밝히고 있다.유지위 인용문의 출처는 ♧▲▲협의회가 1987년 발간한 ‘(도서명 4 생략)’의 내용 중 편집자가 "계엄사 발표 광주사태 전문"을 그대로 옮겨 놓은 부분이다. 이를 설명 없이 인용하여 마치 종교계가 파악한 객관적인 내용인양 보이게 한 잘못은 있다. 그러나 해당 문헌에 그러한 문장이 없다거나, 그 내용이 허위라는 점에 대한 증명은 부족하다.갑44-3, 을168 2-32p.511국기문란자로 사법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10.26사태 이후 소외 32 씨의 행적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그는 정권 쟁취를 위해 불법적인 민중혁명을 기도했다.삭제위 인정사실에서 본 5·18민주화운동의 전개 과정에 비추어 보면, 마치 소외 32의 정권 쟁취를 위한 불법적인 민중혁명 기도의 결과로 광주에서 시위가 촉발된 것처럼 암시하는 이 부분 표현은 허위라고 봄이 타당하다.갑21, 갑22
⑵ 원고 5·18단체들과의 개별적 관련성
앞서 가.의 2)항(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사실의 적시가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지를 총론적 관점에서 논증한 부분)에서 본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위 ⑴항의 표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부분에 해당하는 허위사실의 적시는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하는 것으로서 해당 원고들과 개별적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⑶ 피고들의 귀책사유(손해배상청구 관련)
위 허위사실 적시와 관련하여, 저자인 소외 1과 출판자인 피고 2가 위 각 표현들이 허위라는 점을 과실 없이 알지 못하였다고 볼 수 없고, 피고들이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도 어려워, 피고들의 귀책사유 역시 인정된다.
⑷ 소결론
그렇다면, 원고 5·18단체들의 출판 등 금지청구는 위 ⑴항의 표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각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범위 내에서, 손해배상청구는 해당 부분을 허위사실로 적시하여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범위 내에서 각 받아들일 수 있다.
다. 출판 등 금지의 해제조건에 포함시킬 삭제 부분
1) 원고 5·18단체들의 청구에 의한 부분
위와 같은 판단을 종합하면, 별지 2, 3 목록 ‘당심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부분의 표현은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하는 내용으로서 위 각 단체들의 법인으로서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방해배제로써 이 사건 회고록의 일부 표현에 대한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여 출판 등 금지를 명하여 달라고 하는 원고 5·18단체들의 청구는 위 인정범위 내에서 이유 있으므로 받아들인다.
2) 원고 5의 청구에 의한 부분
위와 같은 판단을 종합하면, 별지 2 목록 순번 1-4, 1-14, 1-15 부분의 표현은 원고 5가 일정한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망인과 생전에 밀접한 관계를 맺어오고, 사후에도 망인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설정하여 내세우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삼고 있다고 인정되는 망 소외 2의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원고 5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해시킬 뿐만 아니라 유족으로서 원고 5가 갖는 명예감정, 추모감정 등을 훼손하여 정신적 고통을 가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방해배제로써 이 사건 회고록의 해당 표현에 대한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여 출판 등 금지를 명하여 달라고 하는 원고 5의 청구는 위 인정범위 내에서 이유 있으므로 받아들인다.
라. 각 손해배상액의 산정 이유
1)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손해배상액
가) 유리한 사정
이 사건 회고록의 출간으로 피고들이 거두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경제적 이익이 그리 클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 점(원고 5·18단체들의 신속한 가처분 신청 등으로 이 법원에서 삭제를 명하는 표현이 포함된 이 사건 회고록의 실제 판매 기간은 길지 않았다), 출판자인 피고 2의 경우 저자인 소외 1과 부자 관계인 점을 감안하면 허위사실에 대한 인식 또는 과실이 인정되더라도 가족의 정리(情理)상 아버지의 출간을 저지하거나 문제된 표현의 수정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은 손해배상액 산정에 있어 유리한 사정으로 고려해 볼 수 있다.
나) 불리한 사정
⑴ 이 사건 회고록의 내용 중 이 법원이 허위사실로 판단한 부분은 아래와 같은 측면에서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시키는 정도가 크다.
▷ 소외 1은 5·17 군사반란과 5·18 관련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의 우두머리로서 무기징역형의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장본인이다. 그럼에도 이 사건 회고록을 통해 이미 법적으로 단죄된 부분마저 자신의 책임을 전면 부인하고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게 된 양 피해자 행세를 하면서 진짜 피해자인 민주화운동 세력을 비난하고 있다.
▷ 5·18민주화운동이 소외 1 등의 헌정질서 파괴행위에 맞선 정당행위라는 입법적, 사법적, 정치적,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이를 다시 뒤집어 시위에 참여한 광주시민과 학생들을 ‘폭도’로 몰아가려고 했다.
▷ 실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조차 믿지 않았던 ‘북한군 개입설’을 새삼 끌어들여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논의를 다시 구태의연한 이념 대립의 소용돌이 속에 밀어 넣고자 하였다.
⑵ 소외 1은 심지어 원고 5·18단체들이 마치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에 대한 논의를 특정한 방향으로 성역화하고, 일체의 토론을 봉쇄한다는 식으로 비난하기까지 하였다.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는바, 가해자가 명백한 허위사실로 피해자 단체의 명예를 훼손하는 ‘2차 가해’를 하고 있으면서도 위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손해배상액 산정에 반드시 고려하여야 할 요소이다.
⑶ 역사를 부정하고서는 바른 미래를 세울 수 없으므로,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역사를 올바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은 물론 사회와 국가를 올바른 미래로 이끄는 바탕이 된다. 하물며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를 지낸 사람이라면 그와 같은 책임은 더욱 무겁다고 할 것이다. 소외 1은 전직 대통령이자 그가 서술하는 역사적 사건의 실제 당사자 중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위와 같은 허위사실의 적시가 우리 사회에 미칠 부정적인 파급력이 매우 크고, 그에 대한 비난 가능성 또한 적지 아니하다.
⑷ 명예훼손의 피해자인 원고 5·18단체들은 관련법에서 특별히 그 지위와 활동을 보장받는 법정단체로서 그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는 법으로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
다) 소결
위와 같이 저자 소외 1과 출판자 피고 2에게 각 공통되거나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유·불리한 사정을 종합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 이 사건 기록과 변론에 나타난 제반 사정을 모두 고려하여 저자 소외 1과 출판자 피고 2가 공동하여 원고 5·18단체들에 각각 지급하여야 할 손해배상액은 1,500만 원으로 정함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피고 2는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으로 원고 5·18단체들에게 각 1,500만 원 및 이에 대하여 (원고 5·18단체들이 각 구하는 바에 따라) 2018. 1. 18.부터 이 판결 선고일(2022. 9. 14.)까지는 민법에서 정한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정한 연 12%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이 소외 1의 위 배상책임 중 3/9을 상속하였음은 앞서 본 바와 같다. 그렇다면 피고 2와 공동하여 지급하여야 할 손해배상액 중 피고 1의 상속분은 500만 원(= 1,500만 원 × 3/9)일 것이나, 원고 5·18단체들이 그중 400만 원씩만 청구하고 있으므로 그에 따라,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은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으로 피고 2와 공동하여 위 1,500만 원 중 원고 5·18단체들에게 각 400만 원 및 이에 대하여 (원고 5·18단체들이 각 구하는 바에 따라) 2018. 1. 18.부터 이 판결 선고일(2022. 9. 14.)까지는 민법에서 정한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정한 연 12%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
2) 원고 5에 대한 손해배상액
가) 유리한 사정
위 1)의 가)항에서 보는 바와 같다.
나) 불리한 사정
앞서 ‘가. 총론적 쟁점’의 3)항에서 본 바와 같이 원고 5는 허위사실의 적시 및 심히 모욕적인 표현으로 사자로서의 명예를 훼손당한 소외 2와 생전에 매우 각별한 사이였던 점, 사후에도 그는 소외 2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설정하여 이를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한 요소로 생각하고 살아온 점, 가톨릭 교황으로부터 최고위 사제를 뜻하는 ‘몬시뇰’ 칭호까지 받은 성직자인 소외 2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모욕하는 등 그 불법성의 정도가 작지 아니한 점, 소외 2에 대한 명예훼손이나 그를 향한 심히 모욕적 표현을 접한 원고 5가 입었을 정신적 고통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은 피고들에게 불리한 사정으로 고려하여야 한다.
다) 소결
위와 같이 저자 소외 1과 출판자 피고 2에게 각 공통되거나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유·불리한 사정을 종합하고, 피고들의 사회적 지위, 이 사건 기록과 변론에 나타난 제반 사정을 모두 고려하여 원고 5에게 저자 소외 1과 출판자 피고 2가 공동하여 지급할 손해배상금은 1,000만 원으로 정함이 상당하다.
그렇다면 피고 2는 인격권 침해에 따른 손해배상으로 원고 5에게 1,000만 원 및 이에 대하여 (원고 5가 구하는 바에 따라) 2018. 1. 18.부터 이 판결 선고일(2022. 9. 14.)까지는 민법에서 정한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정한 연 12%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이 피고 2와 공동하여 지급하여야 할 손해배상액은 333만 원(= 1,000만 원 × 3/9, 만 원 미만은 버림)일 것이나, 원고 5는 그중 250만 원만 구하고 있으므로 그에 따라,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은 인격권 침해에 따른 손해배상으로 원고 5에게 피고 2와 공동하여 위 1,000만 원 중 250만 원 및 이에 대하여 (원고 5가 구하는 바에 따라) 2018. 1. 18.부터 이 판결 선고일(2022. 9. 14.)까지는 민법에서 정한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정한 연 12%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
6. 결론
그렇다면 원고들의 피고 2에 대한 청구는 위 인정범위 내에서 이유 있어 인용하고 나머지는 이유 없어 기각하며,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에 대한 청구는 모두 이유 있어 인용하여야 한다. 이 법원이 제1심과 일부 판단을 달리한 부분 외에도, 앞서 본 바와 같이 당심에 이르러 일부 원고 5·18단체들 및 망 소외 1에 대한 소송수계가 이루어졌고, 원고들이 일부 소를 취하하고 청구를 감축하는 등의 사정으로 제1심판결은 결과적으로 부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피고 2의 항소 중 일부 및 원고 5·18단체들의 부대항소 중 일부를 각 받아들여 제1심판결을 주문과 같이 변경한다.
판사 최인규(재판장) 김진환 차기현
판례 · 광주고등법원
손해배상(기)·손해배상(기)
2018나24881, 2018나24898(병합)
선고 2022.09.14
민사
광주고등법원
법원
2022.09.14
선고일
2018나24881, 2018나24898(병합)
사건번호
민사
사건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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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원고, 피항소인 겸 부대항소인
재단법인 5.18기념재단 외 3인원고, 피항소인
원고 5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이우스 외 2인)피고, 항소인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주1)피고, 항소인 겸 부대피항소인
피고 2 (소송대리인 변호사 정주교)제1심판결
광주지방법원 2018. 9. 13. 선고 2017가합55560, 2018가합50128(병합) 판결 변론종결
2022. 5. 25.주 문
1. 제1심판결을 아래와 같이 변경한다.
가. 피고 2는,
1) 2017. 4. 3. 펴낸 ‘(도서명 생략)’ 제1판 제1쇄의 내용 중 별지 2 목록 ‘당심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내용’란 기재 부분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위 도서를 출판, 발행, 인쇄, 복제, 판매, 배포 및 광고하여서는 아니 되고,
2) 2017. 10. 13. 펴낸 위 1)항과 같은 제목의 도서 제2판 제1쇄의 내용 중 별지 3 목록 ‘당심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내용’란 기재 부분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위 도서를 출판, 발행, 인쇄, 복제, 판매, 배포 및 광고하여서는 아니 되고,
3) 원고 재단법인 5.18기념재단, 원고 사단법인 5.18민주유공자유족회의 소송수계인 5·18민주유공자유족회, 원고 사단법인 5.18구속부상자회의 소송수계인 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 원고 사단법인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의 소송수계인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에 각 15,000,000원, 원고 5에게 10,000,000원 및 위 각 돈에 대하여 2018. 1. 18.부터 2022. 9. 14.까지는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12%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나.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은, 피고 2와 공동하여, 위 가.의 3)항 기재 각 돈 중 원고 재단법인 5.18기념재단, 원고 사단법인 5.18민주유공자유족회의 소송수계인 5·18민주유공자유족회, 원고 사단법인 5.18구속부상자회의 소송수계인 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 원고 사단법인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의 소송수계인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에 각 4,000,000원, 원고 5에게 2,500,000원 및 위 각 돈에 대하여 2018. 1. 18.부터 2022. 9. 14.까지는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12%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다. 원고들의 피고 2에 대한 나머지 청구를 기각한다.
2. 소송총비용 중 원고들과 피고 2 사이에 생긴 부분은 원고들이 10%, 피고 2가 90%를 각 부담하고, 원고들과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 사이에 생긴 부분은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이 전부 부담한다.
3. 제1항 중 금전 지급을 명한 부분은 각 가집행할 수 있다.
청구취지, 항소취지 및 부대항소취지
1. 청구취지 2018나24881
○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에 대하여: 주문 제1의 나.항과 같다.
○ 피고 2에 대하여: ① 2017. 4. 3. 펴낸 ‘(도서명 생략)’ 제1판 제1쇄(이하 ‘이 사건 회고록 1판’이라 한다) 중 별지 2 목록 기재 각 표현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이 사건 회고록 1판을 출판, 발행, 인쇄, 복제, 판매, 배포 및 광고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주문 제1의 가. 3)항과 같다.
2018나24898(병합)
○ 피고 2는 2017. 10. 13. 펴낸 위와 같은 제목의 책 제2판 제1쇄(이하 ‘이 사건 회고록 2판’이라 하고, 위 1판과 2판을 특별히 나누어 지칭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위 도서들을 아울러 ‘이 사건 회고록’이라 한다) 중 별지 3 목록의 ‘1심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내용’란 기재 표현을 각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이 사건 회고록 2판을 출판, 발행, 인쇄, 복제, 판매, 배포 및 광고하여서는 아니 된다.
2. 피고들의 항소취지
제1심판결 중 피고 망 소외 1 및 피고 2의 각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그 취소 부분에 해당하는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3. 원고 5·18단체들의 피고 2에 대한 부대항소취지
제1심판결 중 피고 2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금지를 명하는 부분에 해당하는 원고 5·18단체들 패소 부분을 취소한다. 피고 2는 이 사건 회고록 1판 중 별지 2 목록 순번 1-12 기재 표현 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위 도서를 출판, 발행, 인쇄, 복제, 판매, 배포 및 광고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 유
1. 이 법원의 심판 대상 가. 당초 원고들의 청구
제1심에서 원고들은 광주지방법원 2017가합55560 사건으로 피고 2와 피고 망 소외 1에 대하여 ① 별지 2 목록 기재 각 표현들(원고 5는 그중 ‘헬기사격이 있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취지로 표현한 부분 등 자신의 유족으로서 추모 감정이 훼손되는 등의 불법행위 부분에 한정하여)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이 사건 회고록 1판을 각 출판, 발행, 인쇄, 복제, 판매, 배포 및 광고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취지의 청구(이하 같은 취지의 청구를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라 한다) 및 ② 위 해당 표현들로 인한 인격권 등 침해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청구를 하였다.
이어 원고 5·18단체들은 추가로 같은 법원 2018가합50128 사건으로 ③ 별지 3 목록 기재 각 표현들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이 사건 회고록 2판의 출판 등 금지청구와 ④ 위 해당 표현들로 인한 인격권 등 침해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청구를 별도로 하였다.
나. 제1심의 판단
제1심 법원은 원고들의 청구에 대하여, (1) ①, ③에 해당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 중 별지 2, 3 목록 각 ‘1심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기한 항목의 ‘내용’란 기재 각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를 인용하고 나머지 출판 등 금지청구(별지 2, 3 목록의 ‘1심 판단’란에 ‘유지’라고 표기한 부분)는 기각하였고, (2) ②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와 ④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는 중복소송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후소인 ④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 부분의 소를 각하하고, ③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를 일부 인용하였다.
다. 양 당사자들의 불복 범위와 이 법원에서의 청구감축 등
피고들은 ①, ③에 해당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와 ②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 중 각 피고들 패소 부분에 대하여 항소하였다. 다만 항소심 진행 중 원고들이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에 대한 출판 등 금지청구를 모두 취하함에 따라, 피고 2에 대한 ①, ③에 해당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 및 피고들에 대한 ②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 중 각 피고들 패소 부분(원고들이 청구를 감축하고 남은 부분으로만 한정)만 다투는 것으로 되었다.
출판 등 금지청구와 관련하여, 원고들은 항소심에 이르러 앞서 본 바와 같이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에 대한 ①, ③에 해당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의 소를 취하하였다. 원고들은 또, 피고 2에 대한 ①에 해당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 중 제1심에서 청구가 기각된 별지 2 목록 순번 1-12에 해당하는 표현(이른바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계엄군’ 관련 표현 부분) 부분에 대하여 불복하여 부대항소하는 한편, 피고 2에 대한 ③에 해당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 중 제1심에서 청구가 기각된 부분에 대한 소를 취하하였다.
손해배상청구와 관련하여, 원고들은 항소심에 이르러 ②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 중 피고 2에 대하여는 제1심에서 인용된 금액과 그에 대한 지연손해금의 지급을 구하는 것으로,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에 대하여는 상속지분의 범위에서 일부 금액과 그에 대한 지연손해금의 지급을 구하는 것으로 각 청구취지를 감축하였고, 원고 5·18단체들은 중복제소에 해당한다고 하여 제1심에서 각하된 ④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모두 취하하였다.
라. 소결
따라서 이 법원이 심판할 대상은 (1) 피고 2에 대한 ①에 해당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의 당부(제1심에서 인용 또는 기각된 부분 전부), (2) 피고 2에 대한 ③에 해당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 중 제1심에서 인용된 부분의 당부 , (3) 피고들에 대한 ②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청구(당심에서 감축된 청구)의 당부로 한정된다.
2. 기초사실
가. 원고 5·18단체들(그 전신인 임의단체들 포함)과 그 일부 소송수계인들의 지위는 아래 표와 같다. 아래 표 ‘법정단체’란 기재 각 단체는 5·18유공자법 제55조에 따라 설립된 공법상의 특수법인으로서, 위 법(2021. 1. 5. 법률 제17883호로 개정되어 2021. 4. 6. 시행된 것) 부칙 제3조, 제6조에 따라 ‘기존원고’란 기재 각 사단법인의 권리·의무와 회원들을 그대로 승계하였고, 기존 사단법인은 해산 간주되었다.
순번명칭설립 시기목적 1재단법인 5.18기념재단1995. 1. 13.1.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기념사업 및 추모사업 2. 5.18민주화운동 정신의 계승 발전을 위한 학술, 연구 문화사업 3.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기념, 계승하기 위한 장학사업 4. 제1항의 목적사업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수익사업 5. 각호에 관련된 부대사업 2임의단체5.18민주유공자유족회1980. 5. 31.? 기존원고사단법인 5.18민주유공자유족회2004. 6. 18.5.18민주화운동의 위대한 민주정신과 숭고한 대동정신을 기념하고 계승·선양하며 조국통일의 실현에 이바지하고 회원이 상부상조하여 자립과 복지증진에 기여함 법정단체5·18민주유공자유족회2022. 5. 12.? 3임의단체5·18구속부상자회1984. 10. 5.5.18민주화운동의 위대한 민주정신과 숭고한 대동정신을 기념하고 계승, 선양하며 조국통일의 실현에 이바지하고 회원이 상부상조하여 자립과 복지증진에 기여함, 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업을 수행 1.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사업 1. 5.18민주화운동 정신계승 및 선양사업 1. 5.18민주화운동공로자의 상부상조를 통한 친목도모 기존원고사단법인 5.18구속부상자회2004. 8. 19.1. 5.18민주화운동공로자와 그 유족의 복지증진 및 권익신장 법정단체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2022. 3. 4.1. 타 민족민주 운동 단체와의 연대사업 4임의단체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1982. 8. 1.? 기존원고사단법인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2003. 9. 8.5.18민주화운동의 위대한 민주정신과 숭고한 대동 정신을 기념하고 계승·선양하며 조국 통일의 실현에 이바지하고 회원이 상부상조하여 자립과 복리증진에 기여함 법정단체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2022. 3. 2.?
나. 원고 5는 가톨릭 신부이고, 2016. 9. 무렵 사망한 고(故) △△△ 신부(가톨릭 세례명 ‘□□’, 이하 사회 일반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소외 2’라 한다)의 조카이다. 소외 2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성당에서 봉직하였는데, 1989. 2. 3. 방영된 ♧■■ 다큐멘터리 ‘(제목 생략)’에 출연해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하였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였고, 이어 1989. 2. 22. 열린 제13대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이하 ‘국회 5·18특위’라 한다)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자신이 1980. 5. 21. 오후 1시 30분에서 2시 사이에 ◎◎◎성당 부근에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이후 1995년 무렵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에 대한 형사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같은 내용의 진술을 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이 목격한 헬기 사격에 관한 공개 발언을 했다.
다. 피고 망 ○○○(이하 ‘소외 1’이라 한다)은 이른바 12·12, 5·17 군사반란과 5·18 관련 내란 행위 등을 통하여 헌법에 따라 설치된 국가기관의 권능행사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대한민국의 실권을 장악한 뒤, 그 상태에서 유신헌법과 이른바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제11, 12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각 대통령 임기를 모두 마친 뒤인 1996. 12. 16. 서울고등법원에서 위 12·12, 5·17 군사반란과 5·18 관련 내란 행위 등과 관련하여 반란수괴, 내란수괴 등의 죄로 유죄판결을 받아 무기징역형에 처해졌고(96노1892 판결), 위 판결은 1997. 4. 17.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되었다(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이하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이라 한다). 소외 1은 1997. 12. 22.자로 특별사면·복권되었다가 이 사건 항소심 소송계속 중인 2021. 11. 23. 사망하였다.
라. 피고 2는 소외 1의 아들로서 출판사인 (출판사명 생략) 등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사람이다. 소외 1은 별지 2 목록 기재 각 표현들이 포함된 이 사건 회고록 1판을 집필하였고, 피고 2는 출판자로서 이를 발간·배포 및 판매하였다. 이 사건 회고록 1판의 주요 목차는 아래와 같다.
(주요목차 생략)
마. 원고들은 소외 1과 피고 2를 상대로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허위사실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이 사건 회고록 1판의 출판 및 배포금지 가처분을 신청하였다(광주지방법원 2017카합50236호). 위 법원은 2017. 8. 4. 원고들이 삭제를 구한 별지 2 목록 기재 각 표현들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이 사건 회고록 1판을 출판 및 배포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가처분 결정을 하였고, 위 결정은 2017. 8. 12. 확정되었다.
바. 이에 소외 1과 피고 2는 위 가처분 결정에서 출판 등 금지의 해제조건으로 정한 각 표현들이 인쇄된 부분만을 검게 가리는 방식으로 이 사건 회고록 1판을 수정하였고, 피고 2는 2017. 10. 13. 위와 같이 수정한 이 사건 회고록 2판을 발간·배포 및 판매하였다(위와 같이 검게 가린 부분을 제외하고는 목차를 포함하여 이 사건 회고록 1판과 내용이 같다).
사. 원고 5·18단체들은 이 사건 회고록에 대한 추가 검토를 거쳐 이 사건 회고록 2판에도 여전히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허위사실이 담겨 있다는 이유로 다시 소외 1과 피고 2를 상대로 이 사건 회고록 2판에 대한 출판 및 배포금지 가처분을 신청하였다(광주지방법원 2017카합50489). 위 법원은 2018. 5. 14. 별지 3 목록 중 순번 2-29를 제외한 나머지 표현들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이 사건 회고록 2판 역시 출판 및 배포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내용의 가처분 결정을 하였고, 위 결정은 2018. 5. 31. 확정되었다.
아. 검찰은 2018. 5. 3.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 장면을 목격하였다는 소외 2의 말은 계엄군의 진압 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악의적인 주장이고, 소외 2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다’라는 취지의 표현을 하여 사자인 고 소외 2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공소사실로 소외 1을 광주지방법원에 기소하였다. 위 법원은 증거조사 등을 거쳐 인정되는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2020. 11. 30. 위 공소사실을 일부 수정하여 소외 1에 대하여 사자명예훼손으로 유죄를 인정하고, 소외 1을 징역 8개월에 처하되 다만 그 형의 집행을 2년간 유예하는 판결을 선고하였다(이하 ‘관련 형사사건’이라 한다).
자. 위 판결에 대하여 피고인(소외 1)과 검사 모두가 항소하여 광주지방법원에서 항소심(2020노3208 사건)이 진행되었는데, 그러던 중 2021. 11. 23. 소외 1이 사망하였다. 위 법원은 2022. 1. 10. 소외 1에 대한 공소를 기각하는 결정을 하였고, 위 결정은 2022. 1. 18. 확정되었다.
차. 소외 1의 사망 당시 유족은 별지 1 기재와 같다. 그중 자녀 4명(피고 2, 소외 3, 소외 4, 소외 5)은 모두 상속을 포기하였다. 이어 배우자 피고 1과 동순위로 상속하게 된 손자녀 11명 중 8명도 상속을 포기하여, 결국 소외 1의 상속인으로는 배우자인 피고 1과 손자녀인 소외 5, 소외 6, 소외 7 등 4명만 남아 망 소외 1의 소송을 수계하게 되었다. 그런데 원고들은 이 사건 변론종결 후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중 손자녀에 해당하는 소외 5, 소외 6, 소외 7에 대한 소를 취하하였다.
위와 같은 상속관계를 종합하면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의 상속재산에 대한 지분은 3/9이다(이하 피고 2와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을 합쳐서 부를 때는 편의상 ‘피고들’이라 한다).
[인정근거] 다툼 없거나 이 법원에 현저한 사실, 공지의 사실, 갑 제13, 14, 15, 21, 22, 33, 36, 39, 45, 56, 57호증, 을 제1호증(가지번호 있는 것은 가지번호 모두 포함, 이하 같다)의 각 기재, 변론 전체의 취지
3. 당사자들의 주장
가. 원고들
1) 원고 5·18단체들
소외 1은 이 사건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① 5·18은 북한군, 공작원, 간첩 등의 개입으로 벌어진 폭동이다, ②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사격은 없었다, ③ 5·18 당시 국군은 폭력시위 등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발포한 것이고 무고한 시민을 향해 총구를 겨눈 것이 아니다, ④ 소외 1 자신은 5·18의 발단에서부터 종결에 이르기까지 관여한 바가 없기 때문에 학살에 대한 책임이 없다, ⑤ 1980. 5. 21. 옛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기 전 시위대가 운전한 장갑차에 계엄군 병사가 치여 사망하였다, ⑥ 5·18 당시 ‘암매장’이 있었다는 것은 유언비어이다, ⑦ 5·18 당시 시위대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비전향 장기수, 좌익사범, 간첩 등을 탈출시키기 위해 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하였다는 내용 등의 허위사실을 포함시켰고, 피고 2는 출판자로서 위와 같은 허위사실이 포함된 이 사건 회고록을 출판 및 배포, 판매하였다.
이로써 소외 1과 피고 2는 5·18민주화운동 관련 희생자들의 유족, 부상자, 공로자 등으로 구성되어 5·18민주화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계승, 선양하려는 목적으로 활동하는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하고 저해하였다.
2) 원고 5
소외 1은 원고 5의 삼촌이자 같은 가톨릭 사제로서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소외 2의 헬기 사격 관련 증언을 두고 ‘계엄군의 진압 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주장’이라고 폄하하고, 심지어 소외 2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모욕함으로써 그 유족인 원고 5의 고인에 대한 추모감정을 훼손하였고, 피고 2는 출판자로서 위와 같은 내용이 포함된 이 사건 회고록을 출판 및 배포, 판매하였다.
3) 구체적인 청구의 내용
가) 각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
따라서 원고들은 이 사건 회고록의 출판자인 피고 2에 대하여 , 인격권에 기한 방해배제청구권의 행사로서 별지 2 목록 기재 각 표현 및 별지 3 목록 기재 각 표현 중 ‘1심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각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원고 5는 그중 헬기 사격 관련 쟁점 표현들에 국한하여 청구원인으로 삼고 있다) 이 사건 회고록의 출판 등 금지를 구한다.
나) 손해배상청구
또한 소외 1과 피고 2는 위와 같은 허위사실과 심히 모욕적인 표현들을 담은 이 사건 회고록을 집필, 출판, 배포함으로써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 등 법인으로서의 인격권을 침해하고, 소외 2의 유족인 원고 5의 추모감정을 훼손하는 등의 정신적 고통을 가하였으므로, 피고들은 공동하여 원고들에게 그에 대한 위자료를 지급하여야 한다.
나. 피고들
피고들은 이 사건 소송에서 ‘어떤 표현행위가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볼 수 있는가’와 관련하여 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쟁점을 망라적으로 거론하며 다투고 있다. 그중에는 원고들의 주장 취지와는 맞아 떨어지지 않는 다분히 교과서적인 주장도 꽤 있다(예컨대 피고들은 "사회로부터 받는 객관적인 평가로서의 명예와 주관적인 명예감정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언급도 하나, 원고 5·18단체들은 단체 결성의 목적, 구성원들의 특성, 저명성, 그리고 5·18민주화운동을 기리기 위해 그동안 벌여 온 활동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이 사건 회고록의 표현이 그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로서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 등을 저해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단순히 그들 단체나 구성원들의 명예감정이 침해되었음을 청구원인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따라서 피고들의 진술 중 법적 쟁점을 형성하지 않는 것까지 하나하나 개별 판단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되, 그 언급의 취지만큼은 아래와 같이 의미 있는 주장들을 형성하는 배경들로 이해하여 반영하기로 한다.
1) 원고들을 특정하여 지칭한 바 없음(이른바 ‘피해자 특정의 문제’)
소외 1은 이 사건 회고록에서 원고들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어떤 표현을 한 사실이 없다.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관하여 일정한 견해를 표명하였을 뿐이다. 특정한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지도 않았는데 공적 사안인 5·18민주화운동에 관하여 원고 5·18단체들과 반대되는 견해를 언급하기만 하면 해당 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연결시킨다면 이는 피해자 특정의 법리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이다.
2) 일정 규모 이상의 집단에 대한 명예훼손은 판례 법리상 인정되지 않고, 법인에 대한 명예훼손에는 이르지 않았음
이 사건 회고록의 5·18관련 표현들이 설령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대법원은 개개인을 특정할 수 없는 큰 집단에 대한 명예훼손은 인정하지 않고 있으므로, 그것의 허위 여부와 관계없이 집단에 대한 명예훼손은 성립할 수 없다. 또한 법인에 대한 명예훼손은 자연인에 비해 성립 요건을 엄격하게 보아야 한다. 이 사건 회고록의 집필과 출간으로 인해 원고 5·18단체들의 목적사업 수행에 어떤 영향을 미칠 정도로 사회적 명성과 신용이 훼손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3) 의견표명과 사실적시는 구별되어야 함
진리의 검증은 자유로운 토론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 소외 1은 5·18민주화운동에 관하여 자신이 확보할 수 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석을 가미하여 일정한 견해를 표명한 것뿐이다. 5·18에 대한 해석을 원고 5·18단체들만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를 법적으로 재단함으로써 역사적 사건을 특정한 방향으로만 해석하여야 하는 제한을 두게 되면 다른 의견이 ‘숨 쉴 공간’이 없어져 표현의 자유가 본질적으로 훼손될 수 있다.
4) 표현이 갖는 의미는 책임주의 원칙에 따라 문언의 범위 내에서 해석하여야 함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 쓴 표현의 허위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해당 표현이 갖는 문언의 통상적인 해석 범위 내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여야 하는데, 원고들과 제1심은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 일정한 방향으로 해석을 가미하여 소외 1이 실제로 하지도 않은 표현을 우회적으로 암시하였다고 단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는 책임주의 원칙에 반한다.
5) 각론의 허위성 관련 주장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 적시한 사실관계는 모두 그가 확보한 객관적인 자료들을 바탕으로 서술한 것으로서 허위라고 보기 어렵다. 설령 일부 과장되거나 사실과 다른 부분이 섞여 있더라도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이를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허위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6) 귀책사유 관련 주장(손해배상청구 관련)
가) 고의·과실 부존재
원고들이 문제 삼는 표현들 중 일부가 설령 허위라고 하더라도 집필자인 소외 1이나 출판자인 피고 2 입장에서 그것이 허위라는 점에 대한 인식이나 과실이 없었다. 원고들이 주장하는 사실관계 중 일부는 이 사건 회고록 집필 이후에 구체적인 증언들이 더 나오면서 밝혀진 것들도 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한 허위의 인식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나) 위법성조각사유
이 사건 회고록의 집필 및 출간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그의 인생 전반, 그리고 그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되돌아보고 후세에 기록으로 남기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는바, 원고들이 문제 삼는 이 사건 회고록의 각 표현들은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서 집필 경위나 참조한 자료의 내용 등을 고려하면 그것이 진실하다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으므로 위법성이 조각된다.
4. 이 사건의 쟁점
가. 총론적 쟁점들
위와 같은 주장을 종합하여 보면, 이 사건에서 원고들의 각 청구의 당부를 가리기 위해서는, 각 주제별로 개별 판단이 필요한 쟁점들(사실의 적시 여부, 허위성, 고의·과실과 위법성 등의 쟁점들) 이외에 모든 주제에 공통되어 그 당부를 우선 일단락지어 놓는 것이 바람직한 성격의 이른바 ‘총론적 쟁점들’이 있다. 그중 일부는 각론에 관련된 세부 판단과 연결해서 살펴보아야 하는 내용도 없지 않으나, 판결 이유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이를 따로 떼어 정리하는 것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것에 해당하는 총론적 쟁점으로는, ①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 서술한 5·18민주화운동 관련 표현들이 ‘원고 5·18단체들에 관한 것’임을 수용자 입장에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인지[이른바 ‘피해자 특정의 문제’로서 그 표현의 내용을 주위 사정과 종합하여 볼 때 그 표시가 피해자를 지목하는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이면 된다고 보는 대법원의 확립된 판례(대법원 2002. 5. 10. 선고 2000다50213 판결 등 참조)에 비추어 이 사건의 경우를 따져보아야 한다], ② 만약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이 사건 회고록의 표현들이 허위사실일 경우, 그것을 출판물에 인쇄하여 배포함에 따라 법인인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 등이 훼손되는 결과가 발생할 것이라고 볼 수 있는지, ③ 이와는 별도로 원고 5의 청구와 관련하여, 만약 ‘계엄군의 헬기사격’과 관련한 이 사건 회고록의 표현들이 허위사실로 인정될 경우, 그것으로써 망인인 소외 2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훼손되거나 또는 유족인 원고 5의 사회적 평가 내지 고인에 대한 명예감정, 추모감정을 침해하게 되어 불법행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는지[서울고등법원 2000. 1. 20. 선고 98나44705 판결은 사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표현과 관련한 인격권 침해의 내용을 위와 같이 정리하여 그 유족이 하는 정정보도 등 청구의 당부를 판단하였고, 대법원은 그러한 원심의 판단 기준을 수긍하고 그대로 유지하였다(대법원 2001. 1. 19. 선고 2000다10208 판결 참조)], ④ 저자인 소외 1과는 별도로 출판자인 피고 2에 대해서도 허위사실 적시에 따른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등으로 정리하여 볼 수 있다.
나. 각 주제별 표현들(각론)과 관련한 쟁점들
이 사건 회고록에 나타난 각 표현행위들로 원고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 또는 유족으로서의 추모 감정 등이 훼손되었는지 여부에 관한 개별적 판단에 관하여는 각각 ① 의견표명이나 단순한 논평에 해당하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표현들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을 무엇으로 확정할 수 있는지, ② 위와 같이 확정한 적시 또는 암시 사실이 각 허위인지, ③ (만약 허위라면) 그 허위사실의 적시가 법인인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 등을 저해하는 것과 개별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는지, ④ ‘계엄군의 헬기 사격’ 관련 표현들에 관해서는 그것이 소외 2의 조카인 원고 5의 유족으로서의 추모감정 등을 훼손하는 내용인지 등을 원고들의 출판 등 금지청구와 손해배상청구의 당부 판단에 공통된 쟁점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와 관련해서는, ⑤ 위 각 표현들이 허위라는 점 및 그 표현으로 각각 원고들의 명예 등 인격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고의 또는 과실이 있었는지, ⑥ 피고들이 주장하는 명예훼손 특유의 위법성조각사유(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서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항변)가 인정될 수 있는지 등을 추가로 판단하여야 한다.
이처럼 원고들은 허위사실 적시로 인한 명예훼손 등을 이유로 출판 등 금지청구와 함께 손해배상청구를 하고 있는바, 출판 등 금지청구의 법적 성격은 인격권에 기한 방해배제청구권이므로 허위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인정되면 해당 표현의 삭제를 명할 수 있고 표현행위자의 고의·과실 또는 위법성은 따로 요하지 않으나(대법원 2013. 3. 28. 선고 2010다60950 판결 등 참조), 이를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려면 위와 같이 고의·과실, 위법성 등의 요건이 추가로 인정되어야 한다.
5. 판단
가. 총론적 쟁점들에 관하여
1) 피해자 특정 여부
공표된 사실적 주장에 의하여 피해를 받은 자라 함은 그 공표내용에서 지명되거나 그 공표내용과 개별적인 연관성이 있음이 명백히 인정되는 자로서 자기의 인격적 법익이 침해되었음을 이유로 그 침해상태의 배제를 구할 이익이 있는 자를 가리킨다(구 언론기본법 및 방송법상의 정정보도명령 청구권자의 범위에 관한 대법원 1986. 1. 28. 선고 85다카1973 판결, 대법원 1991. 1. 15. 선고 90다카25468 판결 등의 취지를 인격권에 기한 방해배제청구권을 행사하는 이 사건에 적용할 수 있도록 가다듬었다).
명예훼손에 의한 불법행위가 성립하려면 피해자가 특정되어 있어야 하지만, 그 특정을 할 때 반드시 사람의 성명이나 단체의 명칭을 명시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사람의 성명이나 단체의 명칭을 명시하지 않거나 또는 두문자나 이니셜만 사용한 경우라도 그 표현의 내용을 주위사정과 종합하여 볼 때 그 표시가 피해자를 지목하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이면 피해자가 특정되었다고 할 것이다(대법원 2002. 5. 10. 선고 2000다50213 판결 등 참조).
앞서 본 기초사실 및 갑 제1 내지 5, 12, 13, 21, 22, 30 내지 34, 36, 37, 38, 45, 48, 53, 56, 57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실 및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원고 5·18단체들의 명칭을 직접 명시하지는 않았더라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표현들은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 사실적 주장의 대상으로 원고 5·18단체들을 묵시적으로나마 지목하고 있다는 점을 이 사건 회고록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특정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가) 소외 1은 이 사건 회고록의 5·18민주화운동 관련 서술에서, "◁◁◁ 공장에 집결해 수백 대의 차량을 끌고 나간 사람들(406쪽)", "시위대는 (중략) 공수부대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졌다(470쪽)", "특수훈련을 받은 게릴라 수준의 공작원들(524쪽)", "총기를 든 시위대의 공격(518쪽)",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520쪽)", "그들은 왜 (중략) 교도소 공격에 집착했을까(522쪽)",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사살된 사람들(522쪽)" 등의 표현을 함으로써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을 (자신의 시각에서 하는 부정적인 평가를 더해) 직접 지목하였다. 또한 "계엄군의 진압 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사람들(480쪽)", "헬리콥터에 장착한 화기의 성능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482쪽)", "광주가 계속 신화의 영역에 있기를 원하며 불편할 수도 있을 진실이 더 이상 드러나길 바라지 않은 세력(541쪽)", "사람들은 (중략) 나에게 5.18사태의 진실에 관해 물었다(381쪽)" 등의 표현을 함으로써 자신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서술하고자 하는 사실적 주장과는 반대되는 사실 인식을 가지고 있는 어떤 한 무리의 사람들을 여러 차례 지목하였다. 소외 1이 지목한 사람들은 대체로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과 그 유족, 관련 연구자, 5·18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등으로 좁혀볼 수 있을 것이다. 그중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과 그 유족들은 원고 5·18단체들의 구성원들이기도 하다. 소외 1이 원고 5·18단체들 개개의 명칭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위와 같이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과 자신의 사실적 주장과 반대되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무리를 포괄적으로나마 언급한 이상, 통상적인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을 접하는 일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그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법인인 원고 5·18단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밖에 없다.
나) 원고 5·18단체들은 소외 1, 소외 9 정권 당시의 임의단체 시절에서부터 정부의 인가를 받은 민법상의 사단법인을 거쳐, 현재는 5·18유공자법에 따라 설립·운영되는 법정단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 1995. 12. 21. 제정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5·18민주화운동법’이라 한다)은 정부로 하여금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하여야 한다(제5조)고 규정하였는데, 원고 5·18단체들은 오랫동안 5·18민주화운동의 책임자 처벌, 진상규명, 참여자들의 명예회복과 관련한 활동을 주도하면서 위 기념사업의 한 축을 담당하여 왔고, 정부도 예산지원 등의 방법으로 원고 5·18단체들을 후원하여 왔기 때문에 원고 5·18단체들의 존재 및 활동에 관한 사실은 우리 사회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다. 비록 개개 단체 명칭까지는 아니더라도 ‘5·18 관련 단체들’로 묶여서는 상당한 수준의 저명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 5·18유공자법 제96조는 5·18민주유공자나 그 유족 또는 가족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영리단체를 조직하거나 그 밖에 단체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제1항), 원고 5·18단체들과 유사한 명칭을 사용하여 오인 우려가 있는 단체를 설립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제2항). 그리고 이러한 취지의 규정은 2002. 1. 26. 법률 제6650호로 5·18유공자법이 제정된 이래 계속 유지되어 왔다(제정 당시의 광주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제68조 등 참조). 이처럼 오래 전부터 아무나 5·18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를 설립하거나 표방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현재의 원고 5·18단체들은 종전 단체의 지위를 승계하여 이제 법정단체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특정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언급은 전부 그 역사적 사실을 기념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들을 지목하는 것으로 평가해야 하는가’라는 피고들의 의문제기는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온당하지 않다. 5·18민주화운동에 관련된 허위사실의 적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원고 5·18단체들을 지목하는 것으로 해석하더라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잠재적인 피해자가 무한정 생길 수 있는 등의 부작용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라) 오히려 앞서 본 여러 사정에다가, 5·18민주화운동 관련 사실관계가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에 미치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고려하면(예를 들어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 속에는 북한군 특수요원이 섞여있었다’라는 사실적 주장은 곧바로 참여자들과 그 유족으로 구성된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직결되는 문제가 된다), 이 사건 회고록에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사실관계를 언급하면서 특별히 5·18단체들의 명칭을 직접 거론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일반 독자들 입장에서는 그 사실관계에 대한 언명 자체가 5·18단체들에 대한 평가를 내포하고 있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2) 5·18민주화운동 관련 허위사실의 적시가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 등을 훼손하는지
민법 제764조에서 말하는 명예란 사람의 품성, 덕행, 명예, 신용 등 세상으로부터 받는 객관적인 평가를 말하는 것이고 특히 법인의 경우 그 사회적 명예, 신용을 가리키는데 다름없는 것으로, 그 명예를 훼손한다는 것은 그 사회적 평가를 침해하는 것을 말한다(대법원 1988. 6. 14. 선고 87다카1450 판결). 법인의 목적사업 수행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법인의 사회적 명성, 신용을 훼손하여 법인의 사회적 평가가 침해된 경우에는 그 법인에 대하여 불법행위를 구성한다(대법원 1999. 10. 22. 선고 98다6381 판결). 표현행위가 명예훼손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할 때에는 사용된 표현뿐만 아니라 발언자와 그 상대방이 누구이고 어떤 지위에 있는지도 고려해야 한다(대법원 2018. 10. 30. 선고 2014다61654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
앞서 본 기초사실 및 위 1)항에서 든 증거들에 의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실 및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은 이 사건 회고록의 집필 과정에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여러 가지 사실을 주장하였는데, 그중 허위사실이 포함되어 있을 경우 그러한 내용이 담긴 이 사건 회고록을 사회 일반에 배포하는 것으로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하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봄이 타당하다.
가) 원고 5·18단체들은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의 유족, 부상자 또는 참가자로서 국가유공자인 사람 등으로 구성된 단체이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임의단체로 결성되어 활동하던 시절을 지나 정부가 인가한 사단법인을 거쳐 5·18유공자법에 의해 설립, 운영되는 법정단체(통상 ‘공법단체’라고 부른다)로서 현재는 일정한 법적,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고 있는 법인들이다.
나) 5·18민주화운동이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 원고 5·18단체들의 구성원이 그동안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로서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이 지체되어 받아 온 각종 불이익과 극심한 정신적 고통 등을 감안하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허위사실의 주장을 널리 유포시키는 것은 위와 같은 지난한 과정을 거쳐 이제 법정단체로서 자리 잡은 5·18단체들의 지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위험이 있는 행위임이 명백하다. 특히 5·18단체들의 역사성과 현재 법정단체로서의 지위를 고려하면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이들 단체를 법적으로 보호하여야 할 필요성과 가치도 충분하다.
다) 원고 5·18단체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소외 1의 대통령 재임 당시 임의단체로 있을 무렵 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군사반란과 내란으로 집권한 소외 1 정권의 치부를 드러내기 위한 활동을 용기 있게 지속해왔고, 그로인해 5·18민주화운동의 실상과 이른바 ‘쿠데타’로 집권한 소외 1 정권의 반헌법적 성격이 우리 사회에 제대로 알려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져 자유민주적 헌법 질서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의 민주정부에서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12·12, 5·17 군사반란과 5·18 관련 내란 행위에 합당한 법적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은 5·18민주화운동 당시는 물론이고 그로부터 1987년 헌법 개정에 이르기까지 원고 5·18단체들(그 전신까지 포함)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지속적으로 위와 같이 군사반란 및 내란 세력에 맞서 싸운 시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 구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수차 개정을 거쳐 현재는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로 시행되고 있다, 이하 ‘5·18보상법’이라 한다) 및 1995년 5·18민주화운동법이 각 제정되어 포괄적인 명예회복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내내 억울하게 ‘폭도’라는 누명을 써왔다. 원고 5·18단체들이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 결과 현재는 상당 부분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이 규명되었고, 관련자들은 그 명예가 회복되어 국가유공자로 등록되거나 일정한 배상과 보상을 받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원고 5·18단체들의 구성, 그동안의 활동 경과 등을 고려하면, 허위사실을 유포함으로써 5·18단체들의 지난한 진상규명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염려가 있는 표현행위는 그 사회적 해악과 위험성이라는 측면에서 통상적인 법인, 단체의 활동에 대한 사실 왜곡 행위와 같은 평면에 놓고 비교할 수 없다.
라) 더군다나 그 표현을 한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라 소외 1이라는 점은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소외 1은 내란이라는 정을 모르는 다수의 계엄군을 이용하여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광주시민과 학생들을 잔혹하게 유혈진압하였다는 범죄사실로 내란수괴죄의 유죄 확정판결을,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상무충정작전)’의 계획, 승인, 실행과 관련해서는 내란목적살인죄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장본인이다. 그러한 범죄전력이 있는 사람이 스스로 허위사실을 적시하여 5·18민주화운동의 성격을 왜곡하는 행위를 한다면, 피해자단체의 성격을 가진 원고 5·18단체들의 구성원들로서는 분노·격정·회한 등의 감정을 느끼고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게 될 것임은 누구라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다만 이 사건은 자연인인 그 구성원들이 직접 원고가 된 사건이 아니라 원고 5·18단체들이 법인으로서 명예훼손을 당하였는지가 쟁점인 사건이므로 구성원들이 받을 정신적 고통을 그대로 단체에 투영할 수는 없겠으나, 만약 법인에게도 자연인의 감정에 비견할 수 있는 어떤 ‘평온함’이라는 상태가 있다면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사실 적시로 그 평온함에 꽤나 격렬한 수준의 동요가 찾아 올 것임은 분명하다. 자연인이 받는 정신적 고통과 유사하게 단체 활동의 평온함에 격렬한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표현행위 역시 직·간접적으로 그 단체들의 이후 상태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해당 단체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마) 법과 정치의 영역에서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5·18민주화운동이 어느 정도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찾게 되었지만, 우리 사회를 동서로 가르는 지역주의와 이념에 따른 극단적 진영주의 등의 영향으로 5·18민주화운동의 입법, 사법, 정치, 역사적 의미에 관한 시민사회의 합의를 부정하고, 이를 폄훼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원고 5·18단체들의 순수성과 정당성, 공공성 등에 대한 부당한 시비와 공격도 늘 뒤따랐다. 소외 1의 5·18관련 표현들을 위와 같은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 놓고 보면,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이라는 형식을 띤 어떤 사실적 주장이 허위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그에 따르는 파장은 만만치 않을 수 있다. 즉 이 사건 회고록의 출간이 일종의 ‘방아쇠’와 같은 역할을 함으로써 그동안 공론의 장에서 합리적 시민들의 상식에 입각한 집단지성 앞에 겉으로 내놓고 표출하지 못하던 5·18단체들에 대한 부당한 시비와 공격, 폄훼가 봇물 터지듯 재발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소외 1의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허위사실 적시는 결코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3) 고 소외 2에 대한 ‘헬기 사격’ 관련 허위사실 적시가 유족인 원고 5에 대한 불법행위가 되는지
진실에 부합하지 아니하는 표현행위를 함으로써 망인의 사회적 평가와 아울러, 그의 유족인 원고 자신의 사회적 평가 내지 고인에 대한 명예감정, 추모감정을 침해하여 명예를 훼손하면 불법행위 책임이 있다(사망한 소외 10 전 대통령이 과거 재임 당시 제주 4·3사건과 관련하여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였다는 내용의 신문 보도를 허위사실 적시로 인정하고, 이 전 대통령의 유족에 대한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한 서울고등법원 2000. 1. 20. 선고 98나44705 판결의 취지 및 이를 그대로 수긍한 대법원 2001. 1. 19. 선고 2000다10208 판결 등 참조).
사람은 생존한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는 것이므로(민법 제3조), 이미 사망한 사람에 관하여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표현이 직접 망인에 대한 불법행위가 된다거나, 그로 인해 이미 사망한 사람에게 어떤 민법상의 권리가 발생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만약 망인과 일정한 혈연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생전의 그 사람과 긴밀한 교류를 바탕으로 망인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설정하여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것을 자신이 갖는 정체성의 한 부분으로 삼아 온 유족이 있다면, 해당 망인에 관하여 허위 사실을 적시하는 행위는 간접적으로나마 유족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해시키고, 유족으로써 마땅히 가져야 할 명예감정이나 추모감정을 침해하여 불법행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다.
앞서 본 기초사실 및 당사자들 사이에 다툼이 없거나 갑 제13, 14, 15, 39, 52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실 및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헬기 사격’ 관련 쟁점과 관련하여 허위사실을 적시하거나 망인이 된 소외 2에 대한 심히 모욕적인 표현을 하였다면, 이는 일정한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망 소외 2와 생전에 긴밀한 교류를 하고 망인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설정하여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삼아 온 원고 5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해시킬 뿐만 아니라, 유족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망인에 대한 명예감정, 추모감정을 부당하게 훼손하여 그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것으로서, 원고 5에 대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것이다.
가) 원고 5는 소외 2의 뒤를 이어 가톨릭 사제가 되어 같은 교구에서 함께 봉직하였다. 광주 남구 ◇◇동 소재 ☆☆자매원이라는 가톨릭 계열 사회복지단체의 대표이사직을 고인으로부터 물려받는 등 직계가족에 버금갈 정도의 밀접한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지내왔다.
나) 사회적인 의미의 혼인을 하지 않는 가톨릭 사제의 특성상 소외 2의 경우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혈족인 자녀를 둘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조카로서 자신의 뒤를 이어 가톨릭 사제가 되어 같은 교구, 같은 사회복지단체에서 함께 일한 원고 5에 대하여 세속적인 자녀 이상의 긴밀한 정서적 감정적 교류를 하여 왔을 것임은 능히 추단할 수 있다.
다) 원고 5는 이 사건 회고록이 출간되자 그중 ‘헬기 사격’과 관련하여 소외 2를 언급한 부분에 관해 친족인 고소권자로서 직접 소외 1을 사자명예훼손으로 수사기관에 고소하는 등 망인의 사후 유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그 사건은 제1심에서 유죄판결이 선고되었으나, 그 항소심에 이르러 소외 1이 사망함에 따라 공소기각으로 종결되었음은 앞서 본 바와 같다).
라) 그 밖에도 원고 5는 소외 2의 생전 또는 사후에 지속적으로 그와의 밀접한 관계를 다수의 언론 매체 등을 통하여 공표하는 등(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소외 2의 아바타"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망인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을 공공연하게 표방하였다.
마) 이 때문에 허위사실로 소외 2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그에 대한 심히 모욕적인 표현을 할 경우, 이것이 원고 5에 대한 사회적 평가의 훼손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추단하기에 무리가 없다. 또한 원고 5의 고인에 대한 명예감정이나 추모감정은 여느 직계비속이 부모에 대하여 갖는 심리상태에 못지않을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수한 형태의 명예감정이나 추모감정도 직계존비속 사이에서 형성되는 것 못지않게 법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
바)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언론중재법’이라 한다) 제5조의2 제3항은 사망한 사람에 대한 언론중재법상의 구제절차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망인의 배우자와 직계비속을 기본적으로 거시하고, 직계비속이 없는 경우에는 형제자매가 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피고들은 원고 5가 위 범위에 속하지 않으므로 소외 2에 대한 명예훼손 또는 인격권 침해에 관하여 이 사건 소를 제기할 자격이 없다는 취지로 주장한다. 그러나 언론중재법에 따른 구제절차를 수행할 자격이 없다고 하여, 망인과의 특별한 관계를 내세워 자기의 고유한 인격권 침해를 이유로 민사상의 권리구제를 청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피고들의 위 주장은 이유 없다.
4) 출판물에 의한 허위사실 적시와 출판자의 책임
아래에서 다시 보는 바와 같이, 원고들의 청구 중 일부 내용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는 인격권에 기한 방해배제청구의 성격을 갖기에 고의·과실, 위법성 등 귀책사유를 요하지 않으므로, 만약 이 사건 회고록의 내용 중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부분이 허위사실로 밝혀질 경우 그 부분을 삭제하지 않고는 출판 등을 하지 말아야 할 의무는 피고 2의 귀책사유와 무관하게 출판자로서 당연히 수인하여야 할 성질의 것이다.
다음으로 손해배상청구에 관하여 살피건대, ① 피고 2는 이 사건 회고록에 ‘펴낸이’로 이름을 올린 사람으로서 그런 경우 통상 직접 또는 자기 아래에 편집자나 감수자를 두어 해당 도서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검토한 뒤 최종적인 출판, 배포, 유통, 판매를 결정하게 되는 지위에 있는 점, ②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저자가 건네 준 글을 그대로 출판하여 허위사실 적시의 결과가 발생하였다면 그 자체로 출판자가 응당 하여야 할 일을 다 하지 않은 과실이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점, ③ 그가 저자인 소외 1의 자녀(장남)인 점을 고려하면 전직 대통령인 아버지가 ‘회고록’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하는 도서의 내용에 관하여는 다른 보통의 출판물에 비해 그 내용이나 진실성, 배포 시 파급효과 등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보아야 하는 점, ④ 통상적으로 출판자가 도서의 배포와 판매를 맡아 하고, 출판자가 수령한 판매수익 중 이른바 ‘인세’라는 명목으로 저자에게 배분하거나 각종 비용에 충당하고 남는 이익은 출판자에게 귀속되는 도서출판 업계의 유통구조상, 피고 2는 출판자로서 이 사건 회고록의 출간에 따른 경제적인 이익을 공동으로 향유하게 되는 사람이기도 한 점 등의 제반 사정을 고려하면, 만약 이 사건 회고록의 내용 중 5·18민주화운동 관련 부분이 일부라도 허위라서 그로 인해 원고들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발생시켰다면, 저자인 소외 1과는 별개로 귀책사유가 부인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피고 2는 저자인 소외 1과 공동으로 원고들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져야 한다.
나. 각 개별표현들(각론)에 관하여
1) 전제되는 법리
개별 표현들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의 확정과 그 허위성 등을 판단함에 있어 기준으로 삼을 법리들은 아래와 같다.
○ 명예훼손이 성립하려면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킬 만한 구체적인 사실의 적시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사실의 적시란 반드시 사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경우에 한정할 것은 아니고,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표현에 의하더라도 그 표현의 전 취지에 비추어 그와 같은 사실의 존재를 암시하고, 또 이로써 특정인의 사회적 가치 내지 평가가 침해될 가능성이 있을 정도의 구체성이 있으면 족하다(대법원 2006. 5. 12. 선고 2004다35199 판결 등 참조).
○ 사실을 적시하는 표현행위뿐만 아니라 의견 또는 논평을 표명하는 표현행위도 그와 동시에 묵시적으로라도 그 전제가 되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면 그에 의하여 민사상의 명예훼손이 성립할 수 있고(대법원 2001. 1. 19. 선고 2000다10208 판결 등 참조), 일정한 의견을 표명하면서 그 의견의 기초가 되는 사실을 따로 밝히고 있는 표현행위의 경우에도 적시된 기초 사실만으로 타인의 사회적 평가가 침해될 수 있는 때에는 명예훼손이 성립할 수 있다(대법원 2009. 4. 9. 선고 2005다65494 판결 등 참조).
○ 책에 쓴 사실적 주장이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이 되려면 적시된 사실이 특정인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것으로서 허위이어야 하는데, 그 허위 여부의 판단에서는 일반 독자가 그 책의 내용을 접하는 통상의 방법을 전제로 그 글의 전체적인 취지와의 연관 아래에서 글의 객관적 내용, 사용된 어휘의 통상적인 의미, 문구의 연결 방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독자들에게 주는 전체적인 인상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하고, 여기에다가 그 책 내용의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속에서 당해 표현이 가지는 의미를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대법원 2012. 11. 15. 선고 2011다86782 판결 등의 취지 참조).
○ 명예는 생명, 신체와 함께 매우 중대한 보호법익이고 인격권으로서의 명예권은 물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배타성을 가지는 권리라고 할 것이므로, 사람의 품성, 덕행, 명성, 신용 등의 인격적 가치에 관하여 사회로부터 받는 객관적인 평가인 명예를 위법하게 침해당한 자는 손해배상(민법 제751조) 또는 명예회복을 위한 처분(민법 제764조)을 구할 수 있는 이외에 인격권으로서 명예권에 기초하여 가해자에 대하여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침해행위를 배제하거나 장래에 생길 침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침해행위의 금지를 구할 수도 있다. 인격권 침해를 이유로 한 방해배제청구권으로서 삭제 청구의 당부를 판단할 때는 그 표현내용이 진실이 아니거나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이 아닌 기사로 인해 현재 원고의 명예가 중대하고 현저하게 침해받고 있는 상태에 있는지를 언론의 자유와 인격권이라는 두 가치를 비교·형량하면서 판단하면 되는 것이고, 피고가 그 표현이 진실이라고 믿은 데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등의 사정은 형사상 명예훼손죄나 민사상 손해배상책임을 부정하는 사유는 될지언정 삭제를 구하는 방해배제청구권을 저지하는 사유로는 될 수 없다(대법원 2013. 3. 28. 선고 2010다60950 판결 등 참조).
○ 법인도 자신들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위법한 표현행위 등에 대하여 부작위청구권을 행사하는 권리주체가 될 수 있다(대법원 2006. 5. 26. 선고 2004다62597 판결 등 참조).
2) 인정사실(=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12·12, 5·17 군사반란 및 5·18 관련 내란과 그에 맞선 광주시민·학생들의 민주화운동 전개 과정)
이 사건 회고록의 집필을 통하여 소외 1이 명시적으로 적시하거나 또는 간접적 우회적인 방법으로 암시한 5·18민주화운동 관련 사실의 허위성 여부를 판단하기에 앞서, 그 판단의 기초가 되는 실제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12·12, 5·17 군사반란 및 5·18 관련 내란 사건(헌정질서 파괴 범죄로 평가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있다)의 개요와 위와 같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맞서 헌법제정권력인 국민들의 저항권 행사라는 입법적·사법적·정치적·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전개 과정을 우선 살펴보기로 한다.
아래 각 사실은 소외 11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피격 사망에서부터 광주시민들의 저항권 행사를 무력으로 제압한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의 실행 및 이에 뒤이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라 한다)를 통한 정권 장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관하여, 당사자들 사이에 다툼이 없거나 이 법원에 현저한 사실,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공지의 사실, 그리고 그동안 여러 대법원 확정판결로 인정된 사실 및 갑 제12, 13, 21, 22, 30, 31, 32, 37, 38, 40 내지 43, 48호증, 을 제1, 121 내지 124, 179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인정되는 사실 중 논란의 여지가 없거나 적은 부분만을 정리한 것이다.
가) 소외 11 전 대통령 시해 사건과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12·12 군사반란
소외 1은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이른바 ‘정규육사’ 1기)로 졸업한 이래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대리 겸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대통령 경호실차장보, 국군보안사령관 등의 직책을 차례로 거치면서 권력의 동향과 정국의 향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앙정보부장 소외 12는 1979. 10. 26. 서울 ▷▷동 안전가옥에서 소외 11 당시 대통령과 연회를 하던 도중 권총으로 소외 11 전 대통령을 쏘아 사망하게 하였다(이하 소외 12에 의한 소외 11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을 ‘10·26 사건’이라 한다).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서거에 따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소외 1은 10·26 사건을 수사할 계엄사령부 소속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이 되었다.
소외 1은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10·26 사건과 관련하여 이재전 대통령경호실 차장을 직무유기혐의로 구속하였는데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소외 13 육군참모총장(이하 ‘소외 13 총장’이라 한다)이 위 사람을 석방하는 등 10·26 사건의 책임자 처벌 범위에 관하여 두 사람의 의견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소외 1이 독단적으로 처리한 일에 대하여 소외 13 총장이 나무라거나 주의를 주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1979. 11. 무렵에는 이른바 ‘정치군인’들을 전역시켜야 한다는 군(軍) 내의 여론과 관련하여, 소외 13 총장이 군인으로서의 품위를 잃은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정리하겠다고 말하는 등 소외 1과 같이 정치와 관련된 보직에서 상당기간 근무한 일이 있는 장교들은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소외 1, 소외 9, 소외 14, 소외 15, 소외 16, 소외 17, 소외 18, 소외 19, 소외 20, 소외 21, 소외 22, 소외 23, 소외 24, 소외 25, 소외 26 등 이른바 ‘신군부 세력(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피고인들 중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이들’로서 이하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이라 한다)은 소외 13 총장을 배제하고 자신들이 군의 실권을 장악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점에 집단적 또는 개별적, 순차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에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자신들을 지지하거나 그에 동조하는 군인, 공무원 등을 규합·확산하고 그에 대한 반대세력을 약화·동요시키기 위해 1979. 12. 12.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또는 보안사령부 소속 군인들을 시켜 소외 13 총장을 군법회의법 등으로 정한 절차를 무시하고 총장 공관 주변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등의 실력행사를 거쳐 위법하게 체포하였다. 소외 27 육군참모차장, 소외 28 수도경비사령관, 소외 29 특전사령관 등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위와 같은 행위를 군사반란으로 인식하고, 이를 저지 또는 진압하기 위해 일선 부대에 정식 지휘계통을 통하지 않은 누군가의 출동명령에는 일절 응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한편, 자신들이 지휘할 수 있는 몇몇 부대들을 출동시켜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소외 18의 사무실인 제30경비단장실에 모여 일종의 ‘지휘부’를 구성한 상태에서 군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자신들의 사사로운 영향력을 이용해 서울 인근, 수도권 등지에서 전격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였다.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 측 병력은 병기를 휴대한 채 서울로 진주하여 소외 27, 소외 28, 소외 29 등 군내 반대세력들을 제압하고, 국방부와 육군본부, 중앙청 등을 모두 점령하였다. 이어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당시 소외 30 대통령이 머물던 공관 주변을 군인들로 에워싸는 등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소외 13 총장 체포에 대한 대통령의 사후 재가를 받아냈다.
나)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등의 군사반란과 내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위와 같이 12·12 군사반란에 성공한 뒤, 소외 9는 수경사령관에, 소외 14는 제3군사령관에, 소외 15는 육군참모차장에, 소외 26은 특전사령관에, 소외 25는 국방부장관에, 소외 24는 육군참모총장에 각 취임하여 군의 지휘권을 명실상부하게 장악하였다. 소외 1은 보안사령관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다시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여 정보기관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군을 포함한 국가권력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1980. 5. 초부터 소외 1의 지시에 의하여 보안사 정보처장 소외 31과 소외 19, 소외 20, 소외 21 등이 비상계엄의 확대, 국회해산, 비상대책기구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을 준비했다. 위 소외 21 등은 소외 1, 소외 9, 소외 14, 소외 15, 소외 16, 소외 26 등과 회동하여 이를 검토하고, 소외 24, 소외 25에게도 이를 설명하여 그들의 협조를 받기로 하였다. 이와 함께 소외 21 등은 예비검속대상자, 권력형 부정축재를 이유로 재산을 몰수할 대상자, 정치활동을 금지할 대상자 등을 선정하였다.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1980. 5. 17.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 그들로 하여금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건의하는 결의를 하도록 하였다. 군부의 의견이 있는 것을 내세워,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상대로 같은 날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강압하고 병기를 휴대한 병력으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한 상태에서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여 국무위원들을 강압·외포시키는 등의 폭력적 불법수단을 동원하여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의결·선포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5. 18. 01:45 무렵부터는 무장한 군인들을 국회의사당에 배치·점거하여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5. 20. 무렵에는 일부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물리력으로 저지하는 등 일련의 군사반란 및 내란 행위를 감행하였다.
다) 5·18민주화운동의 전개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유혈 진압
한편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포함한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의 실행을 모의할 당시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여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진압을 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를 그 진압에 투입할 것을 계획하였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전 미리 전국의 대학과 주요 보안목표에 계엄군을 투입하는 조치를 취해놓았다.
위와 같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계엄군 배치 계획에 따라 특전사 7공수여단 병력들이 1980(이하 이 항에서는 모두 1980년을 의미하므로 연도 기재를 생략한다). 5. 18. 01:10 무렵 M-16 소총 등을 휴대한 채 ♡♡대학교와 ●●대학교를 점거하였다. 5. 18. 10:00 무렵에는 200여 명의 학생들이 공수부대원들의 학생에 대한 구타를 비난하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는 등 시위를 하였다. 그러자 위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의 강제 해산을 시도하며 이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와 머리 등을 무차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하여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5. 18. 10:30 무렵 다른 학생 600여 명과 함께 광주시내 중심지로 이동 집결하여 "계엄 해제, 소외 1 퇴진, 소외 32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경찰 병력과 격렬한 공방을 벌이는 등 시위가 광주 시내 중심가로 점차 확산되었다. 위 공수부대원들은 5. 18. 16:00 무렵 시위대와 맞서고 있는 경찰을 지원하기 위해 금남로 일대로 이동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를 해산시키면서 인근 점포나 골목, 건물 안까지 시위대를 추적하여 체포하고, 그 과정에서 시위에 참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시민들을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심지어 머리를 때리거나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 등을 벗기고 기합을 주기도 하는 등의 과잉진압을 하여 광주시민 405명을 연행함과 동시에 8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5. 19. 00:50 무렵 11공수여단 병력들이 M-16 소총 등을 휴대하고 광주에 증파되었다. 이들은 차량에 탑승하고 배속 받은 장갑차의 선도로 광주시민들 앞에서 위력시위를 하였다. 그런데 청각장애인 소외 33(남, 23세, 최초 사망자)이 전날 계엄군의 진압봉에 맞아 부상을 입고 국군광주통합병원에 후송되었다가 후두부열상 등으로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면서, 5. 19. 10:00 무렵 일반 시민들까지 대규모로 시위 학생들에 가세하여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항의하였다.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은 이들을 소총 개머리판과 진압봉으로 무차별 가격하고 심지어는 일부 부대원들이 착검한 총을 휘두르는 등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광주 시민들이 부상을 입었고, 그중 소외 34(남, 34세)가 전두부열상 등으로 사망하였다(2번째 희생자, 그에 관하여는 실제로 총상으로 사망하였음에도 사망 원인에 관한 검시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5. 19. 16:30 무렵에는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계엄군의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 의해 포위되자 총기를 발포하였고, 그로 인해 당시 고등학생이던 소외 35가 총상을 입었다.
5. 20.에도 오전부터 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와 시민·학생들 사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가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혀진 채 구타를 당하는 등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계속되었고, 이를 목격하고 격분한 택시기사들은 5. 20. 오후 무등경기장 앞으로 일제히 모여 200여 대의 택시에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금남로 방향으로 행진하는 차량시위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흥분한 일부 시민들이 트럭, 버스 등을 타고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기도 하였다. 3공수, 7공수, 11공수여단 병력은 이에 맞서 최루탄과 진압봉을 사용한 강경진압을 계속하였고, 5. 20. 23:00 무렵 광주역 앞에서는 3공수여단 12, 15대대 병력이 시위대의 차량 돌진에 대응, 발포하면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5. 21. 12:00 무렵 3공수여단 병력은 ♡♡대학교 앞에서 차량 돌진 등을 시도하는 시위대에 발포하여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광주시민이 총상으로 사망하였다. 5. 21. 13:00 무렵에는 전남도청 앞에서 11공수여단 병력이 장갑차와 버스를 이용하여 접근해 오는 시위대에 일제 사격을 시작하였다. 이어 인근 건물 옥상에 배치된 병력까지 시위대를 향하여 집단 발포하여 소외 36(남, 26세) 등이 총상으로 사망하는 등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위와 같은 집단 발포 직후에는 전남도청 주변뿐 아니라 전남대 부근에서도 계엄군의 총기 사격이 이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집 앞에 나와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던 소외 37(여, 23세)이 총격을 받고 쓰러져 사망하였다. 이에 따라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광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경찰서, 지소, 파출소 등에서 총기와 실탄을 확보하여 무장 저항을 시작하였다. 공수부대원들은 전남도청 부근 일대에서 이들과 수차례 총격전을 벌였다. 시민과 학생들의 무장 저항이 격해지자 계엄군은 5. 21. 저녁 무렵 병력을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시키되, 광주의 저항 움직임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시 외곽 봉쇄작전에 주력하기로 하였다. 시 외곽 봉쇄 과정에서 계엄군은 아래 표와 같이 시위대뿐만 아니라 시위와 무관한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무차별 총격을 가해 어린이를 포함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부대명 각 생략)일시(장소 각 생략)내용피해 ?5. 21. 22:10 무렵?차량에 나눠 타고 목포 쪽에서 광주 쪽으로 이동하던 시위대에 총격시위대 버스 2대 전복 ?5. 22. 01:00 무렵?외곽으로 빠져나가려는 시위대에 총격소외 38 사망 ?5. 22. 08:30 무렵?그곳을 빠져나가려는 승용차에 총격소외 39 사망 5. 22. 16:00~17:00?시위대에 총격소외 40 등 6명 사망 ?5. 23. 05:30 무렵 10:00 무렵?시위대에 총격소외 41 등 2명 사망 ?5. 23. 09:00 무렵?광주에서 화순 방향으로 향하던 미니버스에 집중사격소외 42 등 7명 사망 ?5. 24. 13:30 무렵?시위대에 총격하고 이어 주변 지역에 무차별 총격놀이터에서 놀던 소외 43(남,11세)와 저수지에서 놀던 소외 44(남,12세) 사망 ?5. 24. 13:55 무렵?공수부대 간 오인사격으로 계엄군 9명이 사망한 것과 관련, 그 일대를 수색하면서 마을 주민들에게까지 총격소외 45 등 사망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전남도청을 근거지로 항쟁 지휘부를 구성하고, 자체적으로 치안 유지 활동을 벌였으며, 여러 차례 시민 궐기대회를 개최하는 등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반민주적인 정권장악 시도와 공수부대의 발포, 강경진압 등에 저항하는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자 소외 1, 소외 24, 소외 25 등은 이를 무력으로 조속히 진압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육본 작전지침으로 광주 재진입작전 계획(소위 ‘상무충정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소외 46 전교사 사령관으로 하여금 이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위 작전계획은 다소간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최대한 신속하게 위 항쟁 지휘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5. 26. 23:00 무렵부터 공수여단 특공조의 침투작전이 시작됐다. 이를 필두로 계엄군 병력은 5. 27. 04:00 무렵 전남도청 후문을 넘어 최후 항쟁을 결의하고 남아 있는 무장 저항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하면서 전남도청 건물에 진입하였고 5. 27. 05:21 이를 완전히 점령했다. 또 다른 병력은 5. 27. 05:06 광주공원을, 5. 27. 04:46 ■■빌딩과 ◆◆호텔을 각각 점령했다. 이어 5. 27. 06:20 ♧☆☆ 건물을 치열한 총격전 끝에 확보하여 모두 295명의 저항 시민을 체포하였다. 그 교전과정에서 소외 47 등 광주시민과 학생 18명이 사망하였다.
라) 국보위를 통한 정권 장악과 소외 1의 두 차례 대통령 재임
위와 같이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제압한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1980. 5. 27. 대통령 자문기구 형식으로 국보위 및 그 산하의 상임위원회를 설치했다. 이어 소외 1은 5. 31. 그 상임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국보위는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등 중요한 국정시책을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과 내각에 통보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국보위는 사실상 국무회의의 기능을 대신하였고, 그 산하 상임위들 역시 행정 각 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직접 수행하였다. 이로써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국보위를 통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행정 각 부를 사실상 무력화시키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소외 1은 1980. 8. 27. 유신헌법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하였고, 이어 개헌을 거쳐 만들어진 이른바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1981. 2. 25.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8. 2. 24.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3) 구체적 판단
가) 북한군, 공작원, 간첩 등 개입설 (= 삭제를 명하는 부분은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손해배상액 산정에 포함)
⑴ 이 사건 회고록의 관련 표현들(‘순번’란의 표시는 별지 2, 3 목록의 각 ‘순번’을 기준으로 한다, 이하에서도 모두 같다).
순번쪽내 용판 단 1-10p.406◁◁◁ 공장에 집결해 수백 대의 차량을 끌고 나간 사람들의 정체에 의문이 가는 것이다. 특히 일반시민이 장갑차를 몰고 이동했다는 건 해명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전개된 일련의 상황들이 지금까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북한 특수군의 개입 정황이라는 의심을 낳고 있는 것이다.삭제 1-16p.485그 험하게 훼손된 시신들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살해된 것인지는 제대로 확인된 바가 없다. 대한민국 국군이 대한민국 국민을 상대로 그처럼 잔인무도한 살인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살인기계로 훈련받은 자들의 소행이라는 의심을 버릴 수 없다.삭제 1-18p.522교도소 습격은 북한의 고정간첩 또는 5.18을 전후해 급파된 북한 특수전 요원들이 개입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삭제 1-19p.5235.18사태의 현장사진 중에는 대한민국의 군인 모습과는 두발 모양은 물론 행동이 전혀 다른 군복 차림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광주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장면이 있다. 얼른 보면 계엄군이 연행되어 온 시위대원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진 속 군복 차림의 사람들은 외모로 볼 때 대한민국 군인이 분명히 아니었다. 장발을 하고 어설픈 군인 복장을 한 그들이 만약 광주 시민군이었다면 왜 같은 광주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가.삭제 1-20p.5245.18사태 기간 중 두드러지게 활동했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그 정체에 의문을 갖게 하는 사람들은 역시 군의 특수장비를 능숙하게 운용하고 군사전문가 같은 작전능력을 보여준 사람들이다. 중화기는 전문적인 훈련이나 교육을 받아야만 다룰 수 있다. 물론 시위자들 중 군대에서 전문병과에 복무한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런 경험을 가진 전역 군인들이 유독 광주지역에만 그렇게 많이 있었을까. 시위대는 ◁◁◁ 공장에서 장갑차를 탈취해 끌고 나왔다. 그 시절은 일반 시민 가운데 차량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적었다. 특히 장갑차는 훈련받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몰고 다닐 수 있는 장비가 아니다.삭제 1-21p.524피살경위를 알 수 없는 참혹한 모습의 시신을 끌고 다니며 계엄군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는 수법 등도 고도의 심리전 훈련을 받은 전문가가 조직적으로 개입되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해준다. 광주 효천역 부근에서 11공수여단 63대대 병력과 보병학교 교도대 간에 벌어졌던 오인 사격 사건에도 특수훈련을 받은 게릴라 수준의 공작원들이 투입되었을 것이라는 증언이 있다.삭제 1-22p.527~528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다음날인 5월 22일 오전,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 등에는 그동안 시위 현장에서 볼 수 없었던 일단의 젊은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추측들은 엇갈리지만 그 시간 그 장소에 수백 명을 헤아리는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나타났던 것만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목격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복면을 하고 나타났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들의 정체에 관해서는 지금까지도 온갖 억측과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그 당시 시민군 측이 방송을 통해 광고했던 내용처럼 광주시민들의 투쟁을 지원하려고 서울서 내려온 ♧●대생이 맞을 거라는 얘기가 있고, 한편으로는 북한의 특수부대원들이라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기도 한다.삭제 1-23p.530당시 북한 간첩들에게 지령하는 무전 교신들은 우리 군당국에 의해 포착되고 있었는데, 북한 공작원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정황들은 여러 곳에서 감지되었다는 진술들이 있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1-24p.530♧●대생으로 소개됐다는 500~600명의 정체, 조직적으로 움직인 수백 명 규모의 집단이 실재했느냐의 여부, 복면한 사람들의 정체 그리고 5.18사태에 북한은 어느 정도 개입했었는가 하는 문제들에 관해 내가 이글에서 확신을 갖고 새삼 강조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다.유지(사실적시 불인정) 1-25p.5315.18사태 때에는 북한의 특수요원들 다수가 무장하고 있는 시위대 속에서 시민으로 위장해 있을 터였다. 군당국이 무전교신을 포착함으로써 북한 간첩들이 시위현장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었지만 그들을 색출하기 위해 병력을 투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민들 속에 섞여 있는 북한 특수부대원들을 찾는다고 대규모 군 병력을 투입한다는 것은 시가전을 한다는 의미다. 내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내전이 벌어진다면 북한에 전면 남침의 초청장을 보내는 것이 된다.삭제 1-26p.532지금 와서 5.18사태 때 북한이 개입한 상황을 왜 밝혀내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니까 하는 얘기일 뿐이지 그 당시에는 내가 아닌 그 누구라 하더라도 정상적인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시민 속에 숨어 있을 것으로 보이는 북한 특수부대원들을 잡기위해 시가전을 각오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계엄군이 치밀한 계획 아래 정교한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광주를 수복할 수 있었는데, 북한의 특수요원들이 그때까지 광주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삭제 1-27p.532북한의 5.18광주사태 개입과 관련한 진상을 규명하는 일은 아쉽지만 미완의 과제로 남겨놓을 수밖에 없었다.유지(사실적시 불인정) 1-28p.5331990년대 이후 탈북자들 가운데에는 광주사태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것은 북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 당시 북한의 특수요원으로 광주에 침투했던 사람에게 직접 얘기를 들었다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2006년에는 자신이 직접 북한의 광주 작전에 참전했던 북한 특수부대원이었다는 사람이 탈북해서 그 사실을 털어놨다는 언론보도도 있었다. 이들의 발언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한 것이어서 지어낸 말로 보기는 어렵다.삭제 1-29p.533~5345.18사태 당시 광주 현장에 있던 군 관계자들의 증언이나 진술, 기자의 목격담 이외에 관련 자료나 정황 증거 등을 들어 ♧●대생으로 알려졌던 600명의 시위대가 북한의 특수군이라는 주장이 몇몇 연구가들에 의해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지난 10여 년간 집중적인 조사와 연구, 출판활동 등을 통해 5.18광주사태와 관련된 진실을 규명해나가고 있는 소외 48 시스템공학 박사는,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 아니고 북한의 특수군을 투입해서 공작한 ‘폭동’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소외 48 박사는 검찰과 국방부의 수사기록, 안기부의 자료, 5.18관련 단체들의 기록물, 북한 측의 관련문서와 영상자료들을 면밀히 조사분석한 결과 그러한 결론을 얻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북한 특수부대원이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탈북군인과 귀순한 북한 요인들의 증언으로 그러한 주장은 뒷받침됐다고 말하고 있다.삭제 1-32p.540~541배후조종에 의한 폭동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배후가 바로 ‘북한’이라고 특정特定하는 또 다른 주장이 있다. 소외 48 시스템공학박사와 재미 역사학자인 소외 49 목사 등은 연구·저술을 통해 광주사태는 북한 특수부대에 의한 도시게릴라 작전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하거나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방대한 양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피해자 측이 만든 자료들, 북한의 문서와 영상자료들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북한의 특수부대원들이 벌인 ‘도시게릴라전’이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탈북한 북한 고위층 인사들과 군인들의 생생한 증언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주장이다.삭제 1-33p.541소외 48 박사는 5.18때 북한의 특수공작원으로 침투했다가 돌아가 그 뒤 북한의 정부와 군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수백 명의 인물을 사진분석을 통해 실명으로 밝히고 있고 그 내용이 특정 보도매체와 출판물, 인터넷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있지만 주요 언론매체들은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고 있다. 독자나 시청자들의 정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언론매체들, 여론의 향배를 좇을 수밖에 없는 정치권은 그렇다 하더라도 학계에서조차 ‘민주화운동’이라는 정통적 역사 인식에 대한 어떠한 ‘수정주의적’접근도 금기禁忌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광주가 계속 신화의 영역에 있기를 원하며 불편할 수도 있을 진실이 더이상 드러나길 바라지 않는 세력이 엄존한다는 것은 뚜렷이 피부로 느끼고 있다.삭제 2-29p.485국군 공수부대 병력은 사람의 살을 도려낼 만큼 예리한 칼을 휴대하지 않았다.삭제 2-33p.5185.18사태 때 계엄군은 광주시내는 물론 광주시 외곽 등 여러 곳에서 흉기 또는 총기를 든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공격 양상이 가장 집요했던 것은 광주교도소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곳은 모두 여섯 차례나 무장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 170명, 강력범 300여 명을 포함해 총 2,64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2-33p.518수용자들을 자극해 교도소 내 폭동을 유발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북한이 광주에 있는 여러 고정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시키라"는 지령을 내리는 것이 우리 정보당국에 의해 포착되었다.삭제 2-34p.519~520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처음 습격한 것은 5월 21일 12시경이었다. 당시 교도소는 31사단 병력이 경비하고 있었는데 무장시위대는 총을 난사하며 공격해 왔다. 그러자 전교사는 교도소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3공수여단을 긴급증파했었다. 시위대는 이날 저녁 7시 20분경 교도소 주변에 매복해 있다가 31사단 병력과 교체된 3공수여단 병력에게 기습 총격을 가해왔다. 3여단 15대대장의 임무 교대 중 바로 옆에 있던 무전병이 저격을 당했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권총을 차고 한눈에 고위 지휘관인 것을 알고 잠복해 있던 무장시위대가 저격을 한 것인데 빗나가서 바로 곁에 있던 무전병이 맞은 것이다.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는 그처럼 대담하게 나오기 어렵다.삭제 2-36p.521~522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했다는 사실은 광주사태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교도소를 습격해 수감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은 전쟁 수행 중의 점령군 또는 혁명적 상황에서 혁명군이 취하는 교과서적인 작전이다. 5.18 당시 그들은 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까지 그처럼 교도소 공격에 집착했을까.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미전향 장기수들, 엄중한 정치범들, 간첩들을 해방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고 단언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삭제 2-37p.5225.18사태가 수습된 뒤, 특히 ‘민주화’ 이후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진술을 담은 기록물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때의 활약상에 따라 적지 않은 ‘민주화 유공 보상금’도 지급되었다. 그런데 자신이 교도소를 공격했다고 나선 사람은 없다고 한다.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사살된 사람들이야 죽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살아 도망간 사람들도 있을 텐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그렇다면 교도소 습격을 주도하고 참여했던 사람들은 왜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우리 국민 앞에 나설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삭제
⑵ 위 표현들 중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표현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관계 요지
일반 독자가 통상의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에서 위 각 서술 부분을 접하는 상황을 전제로, 위 각 표현의 객관적인 내용, 문구의 연결 방법, 글 전체의 취지와 맥락, 그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등을 종합하여 저자가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사실적 주장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일 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다만, 위 표의 ‘판단’란에 ‘유지(사실적시 불인정)’라고 표기한 부분은 단순한 의견의 표명이거나 의문의 제기, 시중에 회자되는 풍문이나 다른 사람의 발언을 단순 소개하는 것으로서 그 내용이 진실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수준에 이르지 않은 것 등에 해당하여 구체적 사실적시라고 보기 어려우므로 공표 사실의 정리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이하 각 주제별 판단에서도 모두 같다].
▷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는 그 무렵 남파된 북한군이나 공작원, 특수요원들이 섞여 있다. 그들은 장갑차 탈취, 고도의 심리전 전개, 직접 시민들을 살해하고 계엄군의 소행으로 전가하는 등의 활동으로 시위를 격화시켜 광주에서의 상황을 악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계엄군의 과잉진압으로 희생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일부 사망자의 경우 사실 계엄군이 아니라 고도로 훈련된 북한군 특수요원이 의도적으로 살해하고서 광주시민과 학생들을 자극하기 위해 계엄군이 한 것처럼 뒤집어씌운 것이다.
▷ 시위대가 유독 광주교도소에 대한 집요한 공격을 감행한 것은 그곳에 수감된 미전향 장기수, 정치범, 간첩들을 구출하라는 북한의 지령에 따른 것이다.
⑶ 허위성
앞서 본 인정사실 및 갑 제1 내지 9, 21, 22, 24, 30, 37, 38, 47, 53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한 위 사실적 주장들은 모두 허위임이 증명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다만, 위 표의 ‘판단’란에 ‘유지(허위성 입증 부족)’라고 표기한 부분은 일응 구체적 사실적시에는 해당하지만, 북한군 개입설 등을 단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기 어렵거나 이 사건에서 원고가 제출한 증거만으로 그것이 허위임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려워 삭제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아래 각 주제별 판단에서도 모두 같다].
㈎ 위와 같은 ‘북한군 개입설’ 관련 사실적 주장은 앞서 인정사실에서 본 5·18민주화운동의 전개 과정과 그에 대한 입법적, 사법적, 정치적, 역사적 평가들과는 양립할 수 없다. 북한은 같은 민족으로서 통일을 지향하는 대상임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무너뜨리고 적화통일을 꾀하는 반국가단체로서의 성격도 엄연히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북한군이 배후에 있는 민주화운동’이라거나 ‘북한 공작원들이 고도의 심리전을 통해 유발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헌정질서를 지키려는 저항권 행사’라는 식의 명제는 그 자체로서 형용모순의 진술이 되고 만다. 만의 하나라도 이 사건 회고록에 기술된 북한군, 공작원, 간첩 등의 개입설이 진실이라면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우리 사회의 확립된 평가는 모두 수정되어야 할 정도이다(5·18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애써 부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북한군 개입설’에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두 사실적 주장이 갖는 위와 같은 모순관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떻게든 5·18민주화운동이 북한과 관련된 것처럼 의혹을 불러일으키면, 그 효과로서 5·18민주화운동을 이념대립의 한 가운데로 끌어다 놓을 수 있고, 그렇게만 하면 오랜 기간 원고 5·18단체들의 노력 등으로 확립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에 균열을 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다. 그 반사적 효과로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에 대한 법적, 역사적 평가까지도 뒤집어보려는 욕망이 깔려 있을 것으로 보이고, 소외 1이 과거에 스스로도 의문을 제기했던 ‘북한군 개입설’을 굳이 회고록에 다시 끌고 온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 그렇지만 위와 같은 배경에서 그동안 ‘북한군 개입설’을 제기했던 사람들은 아래와 같이 모두 허위사실 적시에 따른 민·형사상 책임을 졌다.
- 소외 48은 2002년 무렵 ‘북한군 개입설’을 담은 내용의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였다가 사자명예훼손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형을 선고받았다(광주지방법원 2002고합594). 그에 대한 항소와 상고는 모두 기각되어 위 판결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 소외 48은 2014년 무렵 자신이 운영하는 시스템클럽 웹사이트에 북한군 개입설을 바탕으로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로서 당시 보도사진 등에 나오는 광주시민들을 북한군 특수요원이라고 지목하는 내용(한 사람 한 사람마다 번호를 붙여 ‘♧◆’라고 지칭하는 내용) 등의 게시물을 올렸다가 제1심에서 유죄 판결을 선고받고(서울중앙지방법원 2016고단2095 등), 항소심에서도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2년에 처하는 판결을 선고받은 뒤(서울중앙지방법원 2020노804), 대법원에 상고하여 현재 심리가 진행 중이다(대법원 2022도3281).
- 소외 48과 소외 50 회사는 2015년 무렵 북한군 개입설을 장황하게 설명한 유인물을 발행하였다가 법원으로부터 발행 및 배포금지 가처분결정을 받았고(광주지방법원 2015카합636), 그 가처분이의 사건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가처분결정이 인가되었다(2015카합749).
- 북한이탈주민인 소외 104는 2017년 무렵 비슷한 맥락의 ‘북한군 개입설’을 바탕으로 자신이 5·18민주화운동 당시 남파되었던 탈북군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라면서, 5·18민주화운동을 전후하여 소외 32 전 대통령과 북한의 당시 지도자였던 소외 51 사이에 모종의 내통이 있었고, 그러한 내통의 결과로 북한군 특수부대가 광주에 파견되어 평범한 시위를 폭동으로 바뀌도록 배후에서 조종을 했다는 취지의 글을 ‘(도서명 5 생략)’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가, 사자명예훼손으로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의 형을 선고받았고(서울서부지방법원 2019고단3767), 위 판결에 대한 검사와 소외 104의 항소가 모두 기각된 뒤 그대로 확정되었다(같은 법원 2020노767).
㈐ 소외 1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보안사령관이자 군의 실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군사반란 및 내란 행위자들의 수괴로서 군(軍) 내에서 오가는 대부분의 정보를 언제라도 파악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 그런 소외 1 자신이 2016. 6. 무렵 월간 (잡지명 1 생략)과 가진 인터뷰에서 ‘5·18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침투와 관련된 정보보고를 받은 적이 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전혀(없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어서 북한특수군 600명이 광주현장에 존재하였다는 소외 48의 주장에 대한 소외 1의 태도를 확인하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도 "어디로 왔는데?"라고 반문하면서 "난 오늘 처음 듣는데"라고 말하였다. 이른바 ‘북한군 개입설’을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는 물론 그 이후부터 위 인터뷰 당시까지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는 취지로 발언한 것이다. 그 인터뷰 당시 동석하였던 소외 1의 배우자 피고 1은 "광주사태 때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주장은 소외 48이 한 것인데, 그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 그 주장을 우리와 연결시키면 안 된다"라는 취지의 발언까지 하였다.
㈑ 소외 48 등이 제기하는 ‘북한군 개입설’이 대부분 전제하고 있는 사실은 5·18민주화운동을 전후하여 광주의 상황을 악화시킬 의도로 약 600명 가까이 되는 북한군, 공작원, 간첩 등이 일제히 광주로 잠입하여 시민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 직전에 대부분 다시 광주를 빠져나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수의 북한 사람이 단기간에 광주에 잠입하였다가 단 한 명도 발각되지 않고 소기의 임무를 수행한 뒤 다시 조용히 광주를 빠져나간다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실현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가설이다. 이 사건 회고록을 집필한 소외 1 자신도 위 (잡지명 1 생략) 인터뷰 당시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사건 회고록에 반영된 북한군, 공작원, 간첩 등 개입설의 대부분은 소외 48 등의 위 주장과 매우 흡사한 설명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위와 같은 비합리적인 가설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믿을 만하지 않다.
㈒ 미국 중앙정보국이 2017. 1. 무렵 비밀해제문서로 공개한 미국국가안전보장회의 1980. 5. 9.자 비밀문건에는 ‘현재 북한은 한국의 정치 불안 상황을 빌미로 어떤 군사행동도 취할 기미가 없다’라는 취지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1980. 6. 6.자 문건에도 ‘소외 51은 남한에 위협이 되는 북한의 어떤 행동도 현재의 남한 상황에서 소외 1을 돕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난 한 달 동안 반복된 북한의 입장은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군의 눈에 띄는 어떤 행동도 소외 1로 하여금 북한의 도발위협을 이유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이는 결국 소외 1을 돕는 행위라는 것을 직시하고 있다’라는 취지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1980. 5. 13. ‘우리가 가진 정보에 따르면 북한에서 평소와 다른 부대이동을 볼 수 없으며, 한국에 대한 모종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믿을 만한 움직임이 없다’라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 당시 중앙정보부 ★★이었던 소외 40은 1980. 5. 10. 무렵 "북괴는 최근 한국 내 사태를 결정적 시기로 판단 1980. 5. 15. ~ 1980. 5. 20. 남침을 결정했다"라는 취지의 첩보를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입수하였는데,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실질적인 영향력이 미치고 있던 당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에서는 위와 같은 대북특이동향에 대해 검토를 한 뒤, 해당 첩보는 북한의 일반적 남침 가능성을 제기한 것에 불과하므로 첩보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 국군 보안사령부가 1989년 국회 5·18특위 청문회에 대비해 작성한 ‘검거 및 훈방인원’ 통계에 의하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검거된 인원은 2,699명인데, 당시 검거된 사람 중에 북한 특수군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전남경찰국에서 작성한 이른바 ‘광주사태 진상’이라는 문서에는 북한군 관련 내용이 전혀 없고,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이른바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역시 광주시민과 학생들로 구성된 저항 세력의 활동을 시간대별로 세세하게 기재하면서도 북한군, 공작원, 간첩 등의 활동에 관한 내용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정보수집을 담당한 형사 및 현장 경찰관들은 전남지방경찰청의 5·18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팀에 "당시 관계기관이나 현장 경찰관들 사이에 북한 관련 첩보는 전혀 거론된 바 없었다"라는 취지로 진술하였다.
㈕ 광주에서의 시위 진압과 전남도청 항쟁 지휘부를 공격하는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 과정에서 수많은 우리 국민이 죽거나 다치는 희생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만약 그런 상황에서 당시 위와 같은 정부기관들에 북한군, 공작원, 간첩 등의 활동으로 의심되는 정황에 관한 정보가 있었다면, 이를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이 ‘유혈진압의 불가피성’을 강변하는데 활용하였을 것임에도 그러한 사실이 전혀 없다.
㈖ ‘북한군 개입설’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도 확고하게 그러한 정황조차 전혀 없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2013. 5. 30. ‘5·18 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음’이라는 내용이 담긴 문서를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소외 52 전 국무총리는 2013. 6. 10. 국회에서 ‘5·18 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라는 취지로 발언하였다.
㈗ 칼로 잔혹하게 난도질당한 희생자들과 관련하여 북한군 특수부대 침투설을 제기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아래와 같은 반례들이 있다. 당시 전투교육사령부(이하 ‘전교사’라 한다)에서 작성한 ‘전교사 작전상황일지’ 및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자료에서 ‘7공수여단이 착검하고 시위를 진압했다’라는 취지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7공수여단 소속 중사가 도망가는 시위대를 착검한 채 쫓아가는 사진도 있다. ‘1980. 5. 22.무렵 공수부대원이 연행한 시위대를 칼로 찔렀고, 부상자를 즉시 병원으로 후송했으나 사망하였다’라는 취지의 증언을 한 군인도 있다. 또한 1980. 5. 23. 오전 ▼▼동 1번 버스 종점부근에서 공수부대가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광주지검의 검시 결과 당시 사망자들 중에는 총 11명의 자상 사망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⑷ 원고 5·18단체들과의 개별적 관련성
앞서 본 바와 같이 5·18민주화운동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12·12, 5·17 군사반란과 5·18 관련 내란 등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맞선 헌법제정권력인 시민들의 숭고한 저항으로 법적, 정치적, 역사적 평가가 내려져 있다. 원고 5·18단체들은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과 그 유족으로 구성되어 그 정신을 계승하고 선양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립·운영되는 단체들이다. 소외 1은 출판물을 통해 위와 같이 허위의 ‘북한군 개입설’ 등을 마치 근거가 있는 것인 양 서술하였다. 그러한 허위사실의 적시는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하는 것으로서 해당 원고들과 밀접한 개별적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소외 1은 별지 2 목록 순번 1-33 항목의 표현에서 마치 ‘북한군 개입설’이 민주화운동이라는 정통적 역사 인식에 대한 일종의 수정주의적 접근으로서, 공론의 장에서 상호 경쟁하며 양립할 수 있는 하나의 견해이자 시각인 것처럼 기술하였다. 물론 과거의 어떤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토론은 활발하게 이뤄져야 하고 그와 관련된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겠지만, 그러한 자유에도 일정한 내재하는 한계가 있다. ‘북한군 개입설’은 그동안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법적, 정치적, 역사적 평가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허위이고, 그러한 허위사실의 적시는 표현의 자유의 범위를 명백하게 일탈한 것이다. 소외 1은 이로부터 더 나아가 마치 원고 5·18단체들이 5·18민주화운동 관련 사실에 대한 토론 자체를 봉쇄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기까지 하였다.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드는 것’에 비견할 수 있는 이러한 모습은 소외 1의 허위사실 적시로 인한 불법성의 정도를 평가할 때 반드시 고려하여야 할 요소이다.
⑸ 피고들의 귀책사유(손해배상청구 관련)
살피건대, ① 5·18민주화운동 당시 소외 1은 군 정보기관의 수장이자 군사반란 및 내란 세력의 수괴로서 당시 군이 파악할 수 있었던 정보는 대부분 확보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던 점, ② 미국 정보기관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 군의 정보기관이 수집한 정보에 의하더라도 북한군의 개입 정황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 점, ③ 소외 1 스스로가 앞서 본 (잡지명 1 생략) 인터뷰에서 ‘북한군 개입설’ 등에 대해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였던 점, ④ 이 사건 회고록의 해당 부분에서 인용한 소외 48 등의 견해 역시 여러 차례 허위사실이라는 사법적 판단을 받은 점, ⑤ 소외 1의 배우자 피고 1이 ‘자신들을 소외 48과 연결시키지 말라’는 취지의 언급까지 한 것으로 보아, 소외 1과 그 가족은 소외 48의 북한군 개입 관련 주장이 대부분 허위로 판명난 것을 대체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저자인 소외 1과 출판자인 피고 2가 위 ‘북한군 개입설’ 등이 허위라는 점을 과실 없이 알지 못하였다고 볼 수 없고, 피고들이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도 어렵다.
⑹ 소결론
원고 5·18단체들의 출판 등 금지청구는 위 ⑴항의 표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각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범위 내에서, 손해배상청구는 해당 부분을 허위사실로 적시하여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한 범위 내에서 각 받아들일 수 있다.
나) 계엄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에 관한 부분(= 삭제를 명하는 부분은 원고 5·18단체들 및 원고 5에 대한 손해배상액 산정에 포함)
⑴ 이 사건 회고록의 관련 표현들
순번쪽내 용판 단 1-4p.379헬기를 이용한 기총소사까지 감행했다는 등 차마 말로 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들이 더해져 전해지고 있다.삭제 1-13p.480이러한 주장은 헬리콥터의 기체 성능이나 특성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이거나 아니면 계엄군의 진압 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주장일 뿐이다.삭제 그가 제시한 사진도 가짜였다. 목사라는 사람이 무슨 이유로 가짜 사진까지 가져와서 허위진술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소외 53 목사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그러한 거짓말을 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목사가 아니라 가면을 쓴 사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유지(소외 53 목사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원고들과의 관련성이 없음) 1-14p.482헬리콥터의 기총소사에 의한 총격으로 부상한 사람들을 목격했다는 진술도 헬리콥터가 정착한 화기의 성능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임이 소외 54 항공단장의 진술로 증명되었다.삭제 1-15p.484그러나 소외 2는 그 후에도 자신의 허위주장을 번복하지 않았다. 미국인 목사라는 소외 53이나 소외 2나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일 뿐이다.삭제(심히 모욕적인 표현 포함)
⑵ 위 표현들 중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표현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관계 요지
일반 독자가 통상의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에서 위 각 서술 부분을 접하는 상황을 전제로, 위 각 표현의 객관적인 내용, 문구의 연결 방법, 글 전체의 취지와 맥락, 그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등을 종합하여 저자가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사실적 주장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일 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는 표현 부분은 사실 적시라는 측면보다는 심히 모욕적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아래에서 다시 본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를 이용한 기총소사는 없었다.
▷ 그럼에도 소외 2는 헬기의 성능이나 특성을 잘 몰라서거나 아니면 계엄군의 시위 진압 활동을 왜곡하기 위해 헬기 사격을 목격하였다는 거짓말을 하였다.
▷ 소외 2 이외에도 ‘헬기에 의한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끔찍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⑶ 허위성
앞서 본 인정사실 및 갑 제10, 11, 13 내지 17, 23, 24, 34, 38, 39, 52호증, 을 제21, 24, 73 내지 77, 을 제79호증의 7, 8, 을 제240호증의 22, 23, 24, 132, 145, 149, 165, 166, 168, 172, 175, 186, 190, 192, 207, 208, 210 내지 215, 을 제254 내지 291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한 위 사실적 주장들은 모두 허위임이 증명되었다(소외 2는 국회 5·18특위 청문회에서부터 줄곧 1980. 5. 21. 무렵의 헬기 사격에 관한 목격담만 언급하였으나, 소외 1은 5·18민주화운동 과정 전반에서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취지로 폭넓게 주장한 점, 이 부분 표현의 허위성과 관련해서는 소외 2의 조카인 원고 5 뿐만 아니라 원고 5·18단체들도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허위성 증명의 대상을 1980. 5. 21. 무렵의 헬기사격이 있었는지에만 국한하지 않고,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계엄군의 진압 과정 전반에 헬기사격이 과연 있었던 것인지를 기준으로 허위성 여부를 판단한다).
㈎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피고인이었던 소외 15에 대한 유죄 확정판결에서 인정된 사실 중에는 그가 "1980. 5. 25. 오후 소외 55 작전참모부장과 함께 광주에 내려가 전교사 사령관 소외 46(육군소장)에게 광주 재진입작전 계획을 직접 전달하는 한편, 위와 같이 광주 재진입작전이 논의되던 중인 같은 해 5. 23. 12:30 무렵 소외 56 전교사 부사령관에게 무장 헬기 및 전차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조속히 진압할 것을 지시하였다"라는 부분이 있다. 아래에서 다시 보는 바와 같이 ■■빌딩에 난 총탄 흔적이 헬기 사격에 의한 것이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라 한다)의 감정결과가 있는 것까지 더하여 보면, 적어도 1980. 5. 27. 무렵 실시된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에 무장 헬기가 동원되었고, 그 과정에서 헬기를 이용한 기총소사(이는 하늘을 나는 기체에 장착되거나 거치된 총기로 땅에 있는 표적을 향해 집중 사격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빌딩에 남아 있는 총탄 흔적의 개수와 밀도 등을 고려하면 그것을 ‘기총소사’라고 표현하는 데에 아무런 무리가 없다)가 있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 소외 2는 1989. 2. 2. 방영된 ♧■■ 다큐멘터리 ‘(제목 생략)’에서 최초로 헬기 사격에 대한 목격담을 이야기한 이래, 1989년 국회 5·18특위 진술, 1994년 출간한 자신의 책 ‘(도서명 2 생략)’, 1995년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 수사과정에서의 검찰 진술 등에서 여러 차례 1980. 5. 21. 무렵 헬기 사격을 목격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그 진술 내용들을 보면 내용이 구체적이고 목격 전후의 사정과 연결이 자연스러운 데다, 긴 시간 여러 차례에 걸쳐 자세히 진술하였음에도 모순되거나 오락가락하는 부분이 없다. 그가 생애 동안 별다른 흠결 없이 신도들을 잘 이끌고 사회에 봉사하며 살아 온 성직자이고, 2008년 무렵에는 로마 가톨릭 교황으로부터 최고위 사제를 뜻하는 ‘몬시뇰’의 칭호까지 부여받은 사람인 점, 1989년 무렵은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 규명 노력이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할 무렵으로서(우리 국민 중에는 ♧■■ 다큐멘터리 ‘(제목 생략)’을 통해 1980년 광주에서의 실상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꽤 많다), 그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초기 국면에 굳이 실제 경험하지도 않은 사실까지 거론하여 사실관계에 관한 쟁점만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없는 점, 위와 같은 최초 발언시기에는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은 다른 목격자들의 진술도 아직 나오기 전이고, 반대로 헬기 사격을 부인하는 군인들의 입장도 발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증언이나 반대되는 증언을 의식하면서 일부러 진술을 짜 맞출 이유도 없는 점, 소외 2의 위와 같은 목격 증언이 사실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당시의 헬기 출동 기록, 실탄 보급 기록, 작전 수행 명령 등이 존재하는 점, 소외 2의 진술 내용을 종합하면 당시의 헬기 가격은 시위대를 향한 직접 발포가 아니라 ●●대학교 뒷산 또는 광주천변 방향으로의 위협사격이었을 가능성도 있어서 반드시 그에 따른 희생자가 있을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1980. 5. 21. 무렵의 헬기사격에 관한 소외 2의 목격담은 그 자체로는 허위 개입의 여지가 매우 적고, 충분한 신빙성이 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출동한 공격용 헬기는 AH-1J(일명 코브라), 500MD, UH-1H이다. 각 헬기의 외관과 장착무기는 아래 표와 같다.
㈑ 1980. 5. 21. 무렵 헬기사격을 보았다는 아래와 같은 목격진술이 있는데, 이는 아래에서 다시 보는 바와 같은 이유에서 충분한 신빙성이 있고, 소외 2의 진술과도 부합한다.
성명장소헬기 기종목격내용 소외 53① 광주 시내 ② 광주 남구(이하 생략) 자택 옥상500MD15:15경 광주 영공에서 헬기가 군중들을 향해 사격하는 장면을 목격하였고, 16:30경 집으로 와 옥상에서 헬기 사격을 보았다. 소외 57광주 남구(이하 생략) 소외 53 자택500MD17:00 전후로 소외 53와 함께 헬기가 사격하는 장면을 보았다. ‘드르륵 드르륵’하는 소리가 났고,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하는 것이 아니라 M16 소총을 자동 상태로 놓고 광주천을 향해 위협 사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외 58광주 북구(이하 생략) 자택 마당500MD14:00경 노란색 비표를 한 헬기가 왼쪽에 장착된 7.62㎜ 기관총으로 ‘따다다다다다’하는 소리를 내며 10초에서 20초가량 사격하는 장면을 보았다. 소외 59전남도청 부근 도로불상오후 전남도청 앞 발포가 있은 후 ‘땅땅땅’하는 소리가 나 공중을 보니 헬기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헬기 여러 대가 오르락내리락하였고, 직감적으로 헬기가 사격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나무 밑으로 몸을 숨겼다. 소외 60광주 동구 (이하 생략)부근 도로UH-1H13:00~14:00경 금남로 총격을 피하여 ♠♠♠호텔 통로로 걸어가고 있던 중 헬기가 전남도청 쪽에서 광주공원 쪽으로 가다가 ‘두두두두두’하는 소리와 함께 20초가량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 소외 61광주 동구(이하 생략) ◀◀◀호텔사거리 부근 도로불상14:00~14:30경 헬기 1대가 ‘따르륵 따르륵’하는 소리를 내며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이 ♧◎◎ 쪽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헬기가 내렸다가 뜨는 장면을 보았다. 소외 62광주 동구(이하 생략)자택 옥상500MD13:00~14:00경 헬기가 소총보다는 강한 ‘타타타타’하는 연발음을 내며 사격하는 것을 보고 옥상 물탱크 뒤로 몸을 숨겼다. 소외 63광주 동구 ▶▶▶성당500MD13:00경 피해자와 함께 헬기가 불로교 다리 위에서 광주공원 방향 하천 쪽으로 ‘탕탕탕탕’하는 소리로 사격하는 장면과 불꽃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았다.
- 소외 53은 1990년 발간한 자신의 저서 ‘(도서명 3 생략)’과 1995. 5. 11. 기자회견 및 검찰 진술에서 5. 21. 오후 광주 상공에서 500MD 헬기에 의한 기관총 사격이 있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고, 그 진술은 소외 2의 진술에 부합한다. 소외 53은 목사로서 위와 같은 진술 과정에서 소외 2와 특별한 교류가 있었다거나 그 내용을 상의하였다는 사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당시 찍었다는 사진에도 500MD로 보이는 헬기가 보여 위 진술의 신빙성을 더한다(피고들은 해당 헬기의 기종 특성 등을 거론하며 그 사진을 믿을 수 없다고 하나, 소외 53이 다른 시기에 해당 헬기의 사진을 찍었을만한 특별한 계기를 찾을 수 없는 점, 소외 53도 사격 순간에 발생하는 섬광을 찍지 못하여 실망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는 점, 사진을 찍은 방향이나 프로펠러의 위치에 따라 사진 속 헬기의 모습은 조금씩 다르게 나올 수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피고들이 드는 사정만으로 사진의 증명력이 상쇄된다고 보기 어렵다).
- 위 목격자들이 각 헬기를 보았다는 장소를 현재의 지도에 표시하면 아래와 같은데, 해당 위치는 모두 소외 2가 헬기 사격을 목격하였다는 ▶▶▶성당과 멀지 않은 곳인 점, 현재와 달리 당시에는 위 일대에 ■■빌딩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던 점, 공중에 떠서 돌아다니는 헬기의 특성상 여러 방향, 여러 각도에서 헬기를 목격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점, 군이 헬기 위협사격의 적합 장소로 예시한 광주천변이나 ●●대학교 뒷산 등과도 그리 멀지 않은 점 등을 종합하면 위 목격자들의 진술은 신빙성이 있다.
(지도 생략)
- 목격자 중 소외 58은 5·18민주화운동 기간 전에 502항공대 소속 정비병으로 근무하다 제대한 사람이므로, 그가 500MD 헬기의 사격을 목격하였다고 하는 진술은 더욱 신빙성이 있다(비록 그가 각 항공대별 비표의 종류 등에 관하여 당시의 객관적인 기록과 일부 어긋나는 진술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당시 목격한 헬기의 소속 항공대에 대한 착오로 귀결될 뿐, 헬기 사격을 목격하였다는 그 진술 자체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사정으로 보기는 어렵다).
㈒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계엄군의 진압작전 등으로 광주 상공을 비행하였던 항공기의 조종사, 부조종사 또는 그 부대의 지휘관, 탄약관 등 군인들은 국회 5·18특위의 헬기 사격에 대한 진상규명 시도가 있은 이후부터 줄곧 헬기사격이 있었던 사실을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부 군인들은 기관총, 벌컨포 등에 사용되는 실탄을 헬기에 장착하고 출동한 것은 사실이라는 진술(소외 64, 소외 65, 소외 66, 소외 67, 소외 68, 소외 69 등), 교신 과정에서 ‘위협사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들었으나 이내 끊어져서 정확한 명령권자는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진술(소외 67), 헬기에 쓸 탄약을 불출하였는데 그중 일부가 소비된 상태로 나머지를 회수한 적이 있다는 진술(소외 70) 등을 하였다. 이러한 일부 군인들의 진술을 앞서 ㈎항에서 본 바와 같은 사정(신군부 세력의 일원인 소외 15가 무장헬기 동원을 지시하였고, 육본 작전참모 소외 55가 전교사 사령관 소외 46에게 헬기 사격을 지시한 적이 있다고 진술하는 등의 사정)과 결합하여 보면 당시 계엄군 소속이었던 군인들의 진술에 따르더라도 무장 헬기가 탄약을 싣고 광주로 출동하였고 (적어도 위협사격에 한정하여서는) 명령계통으로 사격 지시가 있었으며, 그중 일부 탄약이 소비된 정황까지 있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 5·18민주화운동 전후로 작성된 군 관련 문서에서 확인되는 아래와 같은 내용들에 의해서도 소외 2와 헬기 사격 목격자들의 진술의 신빙성은 뒷받침된다. 즉, ① 전교사가 작성한 ‘전투상보(충정작전결과)’에 따르면, 당시 광주에 앞서 본 세 가지 종류의 헬기(AH-1J, 500MD, UH-1H)가 모두 무장을 한 상태에서 출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점, ② 상황에 따라 헬기로 ‘광주시내 하천, 임야 및 산’ 등에 위협사격을 실시하여도 좋다는 취지의 지침도 있었던 점, ③ 전교사가 작성한 경고문(안)에도 방송을 종료한 즉시 ‘벌컨위협사격 실시로 양민경고 분리 및 위압감과 공포감 효과 달성’이라는 문구가 있는 점, ④ 5·18민주화운동 이후 군이 작성한 교훈집에도 (최소한 위협사격에 해당하는) 헬기사격이 있었음을 전제로 상황 분석을 시도한 내용이 있는 점 등이 목격자들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한다.
㈔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진행되던 도중인 1980. 5. 22. 소외 71 전교사 사령관의 후임으로 온 소외 46 전교사 사령관은 1994. 12. 12. 검찰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지상으로 총격을 가한 사실이나 화염방사기, 크레모아 등을 사용하여 시위진압을 한 사실이 있는가요"라는 질문에 "당시에는 헬기 사격 보고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국회) 광주특위를 앞두고 각종 자료를 검토해보고 관계자들에게 확인해본 결과 민가나 시민을 향해 기총사격을 한 적이 없고, 다만 ●●대 뒷산에서 위협사격을 한 적은 있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비록 자신이 전교사 사령관으로 임명되기 전의 상황을 그렇게 보고받았다는 취지이기는 하나, 당시 소외 46의 지위나 역할 등에 비추어 볼 때 적어도 헬기를 동원한 위협사격이 있었던 사실은 분명하게 뒷받침된다.
㈕ 광주도시공사는 광주 동구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에 있는 ■■빌딩을 매수하여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총탄흔적을 발견하였다. 광주광역시는 그 총탄흔적 등에 관한 법안전감정을 국과수에 의뢰하였고, 국과수는 2016. 12. 16. 광주광역시에 "■■빌딩 건물 외벽에서 구경 5.56mm 또는 0.3인치 탄환에 의한 탄흔으로 유력한 흔적 35개를 확인함, ■■빌딩 10층에 위치한 ■■방송 내부의 기둥, 천정 텍스, 바닥 등지에서 최소 150개의 탄흔을 식별하며, 발사 위치는 호버링 상태(hovering, 헬리콥터가 공중에 정지해 있는 상태)의 헬기에서 발사되었을 가능성이 유력하게 추정됨"이라는 감정결과를 회신하였다. 그 뒤 광주광역시가 한 추가 감정 의뢰에 대한 국과수의 회신, 관련 형사사건에서 한 국과수 감정결과 등까지 종합하여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정, 즉 ① 국과수가 탄흔을 만들어낸 총격의 방향과 종류를 추정하기 위해 동원한 방법(■■빌딩 10층 바닥 및 기둥의 탄흔 분포가 밀집된 형태인 점에 비추어 보면, 그 탄흔 대부분이 단일한 총격에 의하여 생성되었다고 보이므로, 탄흔의 분포 형태를 분석하여 총격이 내부와 외부 중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 추론하고, 탄흔의 탄도 연장선에 있는 탄흔을 매칭하여 각도를 계산하는 방법)은 충분히 과학적인 접근 방법으로 평가할 수 있고 특별히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거기에 맞춰나간 것이라는 정황은 찾을 수 없는 점, ② ■■빌딩 10층에 밀집되어 있는 탄흔을 평면적으로만 본다면 출입문 쪽에서 지상군에 의한 내부 총격에 의해 발생하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빌딩 내부에서 계엄군과 시민 저항세력 사이의 총격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으므로, 국과수가 분석한대로 외부에서 방사형의 총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게 더욱 설득력이 있는 점, ③ 무엇보다 기둥에 분포하는 탄흔들은 금남로 쪽을 바라보는 방향에만 집중되어 있고 출입문이 위치한 그 뒷면에는 탄흔이 남아 있지 않아 내부 총격전보다는 건물 외부로부터의 총격에 의해 탄흔이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점, ④ 당시 ■■빌딩 주변에 그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으므로 바닥에 남아 있는 탄흔이 위에서 아래로 쏜 것에 의해 발생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면(실제로 국과수의 분석에 의하면 대부분이 하향 탄흔이라는 점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이는 헬기 사격에 의한 것 이외에 다른 가능성을 상정할 수 없는 점, ⑤ UH-1H 헬기에 거치된 M60 기관총의 경우 유효 사격각도가 위로는 6.5°, 아래로는 82°, 좌우로는 ±88°까지 가능하므로 바닥의 탄흔 분포 및 하향 사격각도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데, 5·18민주화운동 당시 해당 헬기가 탄약을 실은 상태에서 광주로 출격한 사실은 군 기록에서도 확인되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빌딩에 남아 있는 총탄흔적의 상당수는 헬기사격에 의하여 발생한 것임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고, 5·18민주화운동 당시가 아니라면 광주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빌딩에 그와 같은 총탄흔적이 생길법한 다른 사건이 있었을 것을 쉽게 상상할 수도 없다.
㈖ 계엄군의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이 실행될 무렵 마지막 저항군 상황실장으로 전남도청에 남아 있던 소외 72는 UH-1H 기종의 헬기가 ■■빌딩을 향해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하였고, 인근 ♥♥교회 부근에 있었던 소외 73도 ■■빌딩과 그 맞은편 ♧☆☆ 쪽으로 향하는 같은 기종의 헬기가 세 번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광주 재진입작전이 실행된 1980. 5. 27.은 비가 오지 않아 육안으로 헬기를 목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점, UH-1H 헬기가 기관총 사격을 할 때의 통상적인 모습(M60 기관총을 진행방향과 수직이 되도록 측면에 거치하여 옆으로 쏘는 모습)과 그들이 묘사한 사격 장면이 대체로 일치하는 점, 두 목격자들이 지목한 헬기 기종이 앞서 본 탄흔 분석에서 호버링 상태에서 ■■빌딩을 향해 하향 사격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추정한 기종(UH-1H 헬기)과 동일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위 진술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
㈗ 1995년 무렵 있었던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당초 수사과정에서 검찰이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에 관한 법원의 공식 판단은 내려지지 않았다. 소외 1의 관련 형사사건에서는 검찰이 그 뒤에 확인된 증거들까지 모두 종합하여 계엄군에 의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전제로 소외 1을 소외 2에 대한 사자명예훼손으로 기소하였다. 해당 사건의 제1심 법원은 다각도의 심리를 거쳐 1980. 5. 21. 무렵과 5. 27. 무렵(이는 공소사실과 직접 관계는 없으나 5. 21. 무렵의 헬기사격이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간접사실로서 판단한 것이다) 적어도 두 시기에 걸쳐 계엄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소외 1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선고하였다. 위와 같은 검찰의 입장 변화와 그에 따른 관련 하급심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이 법원은 당초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수사결과에 굳이 얽매이지 않고 지금까지 나온 모든 소송자료들을 바탕으로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에 관한 심리를 진행한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채증법칙을 위반하거나 자유심증주의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⑷ 심히 모욕적인 표현에 해당하는 부분
소외 1은 위와 같은 허위사실의 적시 이외에 소외 2에 대하여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는 표현도 하였다. 소외 2의 성직자로서의 삶과 생전 가톨릭 내에서의 지위 등은 앞서 본 바와 같은데, 그러한 종교인에 대하여 허위사실에 터잡아 ‘파렴치하다’거나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사실적 주장을 더욱 강조하여 서술하는데 필요한 범위를 넘어 심히 모욕적인 표현으로 상대방을 경멸 또는 조롱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소외 2에 대한 모욕이 된다. 이는 망인인 소외 2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해함과 더불어 앞서 본 바와 같이 망인과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한 특별한 유대를 갖고 그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내세우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삼고 있는 원고 5의 망인에 대한 합당한 명예감정과 추모감정을 침해하였다는 측면에서도 단순한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과는 별개의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⑸ 원고 5와의 관련성
위 ‘가.항 총론적 쟁점’의 ‘3) 고 소외 2에 대한 ‘헬기 사격’ 관련 허위사실 적시가 유족인 원고 5에 대한 불법행위가 되는지’ 부분에서 본 바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면 위와 같은 허위사실의 적시 및 망인에 대한 심히 모욕적인 표현들은 소외 2에 대한 명예훼손 또는 모욕이 됨과 동시에 원고 5의 유족으로서의 명예감정과 추모감정을 훼손하는 것으로서 원고 5와 관련성이 충분하다.
⑹ 원고 5·18단체들과의 관련성
살피건대, ① 소외 1은 이 사건 회고록 중 별지 2 목록 1-4 해당란 기재 표현에서 소외 2 이외에도 헬기에 의한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서술하여 단순히 소외 2만을 지목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5·18 관련자들이 마치 근거 없는 헬기 사격설을 거론하는 것처럼 표현한 점, ② 앞서 총론적 쟁점 중 ‘피해자 특정’과 관련한 부분에서 본 것과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가해자에 해당하는 소외 1이 자신과 다른 사실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전제로 놓고 서술하는 것만으로도 일반 독자들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간접적, 우회적으로 원고 5·18단체들을 지목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은 점(원고 5·18단체들은 법정단체이고 유사한 명칭을 사용하는 단체 설립 자체가 법적인 제한을 받고 있기에, 그 밖에 달리 어떤 다른 사람이나 단체를 겨냥한 발언이라고 상정하여 볼 대상 자체가 마땅치 않다), ③ 원고 5·18단체들은 소외 2가 계엄군의 헬기 사격 관련 증언을 처음 하였던 1989년 무렵부터 현재까지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점을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이른바 ‘자위권 발동론’을 반박하는 중요한 사정으로 들면서 진상규명 노력을 계속하여 왔던 점, ④ ■■빌딩의 리모델링 과정에서 다수의 탄흔이 발견되고 그것의 유래를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원고 5·18단체들은 계엄군에 의한 헬기 사격이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는 전제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던 점, ⑤ 소외 2를 사자명예훼손의 피해자로 하는 소외 1에 대한 관련 형사사건의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도 원고 5·18단체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하였고, 그러한 모습은 언론 매체 등을 통하여 널리 알려져 ‘계엄군에 의한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 여부’가 원고 5·18단체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진상규명 관련 주제임을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계엄군에 의한 헬기 사격이 있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이야기는 헬기의 성능이나 특성을 몰라서 하는 얘기이거나 악의적인 거짓말’이라는 취지의 표현이 앞서 본 바와 같이 허위로 밝혀진 이상, 그러한 허위사실의 적시와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판 사이에는 개별적 관련성이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⑺ 피고들의 귀책사유(손해배상청구 관련)
살피건대, ① 5·18민주화운동 당시 소외 1의 지위는 군 정보기관의 수장이자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의 수장이었으므로 군(軍) 내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정보는 모두 받아볼 수 있는 상태에 있었던 점, ② 앞서 본 바와 같이 군의 공식기록에는 무장 헬기의 출격 기록과 위협사격 등을 지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점, ③ 소외 2가 1989년 무렵부터 계엄군에 의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증언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계엄군 소속 헬기 조종사들이 그 진술에 집단 반발하여 성명서를 내는 등의 소동이 있었으므로, 이 법원이 앞에서 인정한 사실을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 집필 과정에서 무관심이나 착오로 알지 못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한 점, ④ 이 사건 회고록의 ‘책임정리’자로 이름이 올라가 있는 소외 74는, 소외 1이 퇴임 직후 이른바 ‘5공 청산’의 흐름에 휩쓸려 회고록을 준비할 여유를 갖지 못하다가 1997년 사면복권 이후부터 틈틈이 회고록 저술을 위한 구술을 하는 등의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고, 특히 5·18과 관련된 부분은 ‘소외 1이 직접 경험한 바가 없으므로’ 그 때까지 나와 있는 모든 자료들을 망라적으로 살펴보고 그중 터무니없는 것들을 뺀 나머지를 바탕으로 서술한 것이라고 설명한 점(을 제169호증 참조), ⑤ 일단 소외 1이 적시한 사실이 허위라고 이 법원이 판단한 이상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음은 피고들이 증명하여야 하는데, 피고들은 막연히 그 표현이 진실이라고만 주장하고 있을 뿐 적시사실이 허위였음을 전제로 하여서는 별다른 주장과 증명을 하고 있지 않은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저자인 소외 1과 출판자인 피고 2가 위 ‘헬기 사격은 거짓말’이라는 취지의 표현이 허위라는 점을 과실 없이 알지 못하였다고 보기 어렵고, 피고들이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도 어렵다.
⑻ 소결론
원고들의 출판 등 금지청구는 위 ⑴항의 표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각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범위 내에서, 손해배상청구는 해당 부분을 허위사실로 적시하여 원고들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유족으로서의 추모감정을 침해하는 등 정신적 고통을 가한 범위 내에서 각 받아들일 수 있다.
다) 계엄군의 총기 사용 및 비무장 민간인 살상행위 등을 무장 시위대의 폭동에 대한 이른바 ‘자위권 발동’ 차원으로 설명한 부분(= 삭제를 명하는 부분은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손해배상액 산정에 포함)
⑴ 이 사건 회고록의 관련 표현들
순번쪽내 용판 단 1-3p.27더욱이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삭제 1-6p.382우리 국군은 국민의 군대다. 결코 선량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눌 일은 없다.삭제 1-7p.3831980년 5월 광주에서도 계엄군은 죽음 앞에 내몰리기 직전까지 결코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았다.삭제 1-30p.535광주사태에 관한 사실관계를 철저히 검증하고, 그 성격을 재조명할 수 있는 충분한 동력이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1950년 북한의 남침 때 수백만 명의 인명피해를 무릅쓰며 싸웠던 것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이었듯이 5.18사태 당시 정부와 계엄군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던 무장혁명 세력과 맞섰던 일도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정당하고도 불가피한 조치였음이 오래지 않아 명백히 밝혀질 거라 믿는다.삭제 1-31p.539무엇이 진실인가. 헌법적 정통성을 지닌 소외 30 대통령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폭동인가, 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한 폭동인가 아니면 북한 특수부대가 공작한 폭동이었는가?삭제 2-2p.380~381장갑차와 군용 트럭에 수천 정의 총기로 무장한 시민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공수부대의 자위권 발동이었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삭제 2-5p.381광주 문제를 말하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써야 했던 대한민국 군인들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삭제 2-7p.382무엇보다 나는 세상이 나를 단죄하기 위해 ‘무고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눈’ ‘국민을 학살한’ 군대라는 오명을 덧씌운 대한민국 군인들의 명예를 되찾아줘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삭제 2-16p.399광주에서 시위대와 계엄군 간의 충돌이 유혈사태로 번지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원인은 시위대가 무장을 하게 된 데서 찾을 수 있다.삭제 2-17p.3995월 19일 오후 3시 30분경 시위대에 의해 ♧■■를 경비하던 31사단 병력이 M16소총 1정과 실탄 15발을 탈취당했다.삭제 바로 다음날인 20일 밤 11시에는 2,000여 명의 시위대가 광주세무서 별관 무기고를 습격해 카빈 17정을 탈취했다. 광주에서 무기가 대량으로 탈취된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유지(허위라는 점에 대한 입증 부족) 2-18p.403무기고 습격이 5월 21일 오후 1시 이후에 시작됐다고 하는 시민군 측의 주장과 달리 그날 오전부터 이미 무기고 습격이 진행됐다는 기록들이 있다. 소외 75 나주읍 ♣♣파출소장은 1980년 7월 16일 전남합동수사단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5월 21일 10:00경 난동분자 4명이 탄 짚차를 선두로 뒤따라 4~50명이 GMC에 분승하고 파출소앞에 이르러 뒤따라오던 GMC가 파출소 안으로 돌진, 기물을 파괴하고 (중략)" _1980.7.16. 진술조서, 5.18사건 검찰 수사기록 84,527~84,528면유지(단순 인용문 또는 허위라는 점에 대한 입증 부족) 2-19p.403~404전남 영암경찰서 ♧○지서 예비군 무기고가 공격받던 상황에 대해 소외 76 (소속부대 1 생략)대장은 1995년 6월 15일 검찰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5월 21일 10:30경 영암지역으로 들어오자마자 길목에 있는 ♧♧경찰서 ♧○지서 예비군 무기고에 들어가 무기를 탈취한 것입니다… 영암지역에서는 무기가 피탈된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상황이 없었는데 무기가 피탈된 시간과 장소를 순서대로 말씀드리면 5월 21일 10:30경 나주군과 영암군의 경계 지점인 ♧○지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최초로 무기가 피탈되었고 ♧♧경찰서 시종지서 직원들이 인근 야산에 수백 정의 총기를 숨겨놓았는데 시위대들이 5월 21일 11:30경 주민들의 제보를 받아 숨겨놓은 총기를 찾아갔으며 (중략)" _1995.6.15. 진술조서, 5.18사건 검찰 수사기록 30,323~30,325면유지(단순 인용문 또는 허위라는 점에 대한 입증 부족) 2-22p.423엄격하게 말하자면 무장시위대의 공격에 노출된 계엄군에게 ‘자위권 발동’지시는 불필요한 조치다. 각개 병사가 임무 수행상 정당방위 목적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삭제 2-25p.472~473관계법령들이 규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광주에 출동한 계엄군은 계엄사령관이나 상급 작전지휘권자의 자위권 발동지시가 없더라도 당연히 ‘정당방위권’과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것은 경찰관이 경찰관직무집행법 제11조 규정에 따라서 무기를 사용함에 있어 상급 지휘관의 지시나 승인이 필요하지 않은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유지(일반적인 법리를 설명한 것으로 사실적시로 보기 어려움) 따라서 설령 광주에 출동한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이 소외 24 계엄사령관의 지시 이전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 또한 광주에 출동한 각 부대의 자위권 발동 시기가 다른 것은 각 부대가 처했던 상황이 서로 다른 것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소외 24 계엄사령관의 자위권 발동 지시 이전 시점에서 특전사 3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발포한 것은 형법 제21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정당방위권의 행사였으며 상부나 어느 누구의 발포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삭제 2-26p.475학살은 과연 있었는가유지(소제목으로 전후에 관련된 서술이 없어, 사실적시로 보기 어려움)
⑵ 위 표현들 중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표현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관계 요지
일반 독자가 통상의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에서 위 각 서술 부분을 접하는 상황을 전제로, 위 각 표현의 객관적인 내용, 문구의 연결 방법, 글 전체의 취지와 맥락, 그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등을 종합하여 저자가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사실적 주장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일 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계엄군이 집단 발포를 하기 전부터 이미 방송국, 세무서, 경찰서 등 무기가 있을만한 곳을 습격하여 무장을 하였다. 광주에서 많은 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위와 같이 시위대가 먼저 무장을 했기 때문이다.
▷ 위와 같이 무장한 시민과 학생들은 ‘폭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격렬한 시위를 벌였기 때문에 광주에 출동한 계엄군은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곤봉, 대검, 총기 등을 사용한 유혈진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 총기를 탈취하여 계엄군을 공격하는 등의 격렬한 시위를 벌인 사람들은 선량한 국민이라고 할 수 없고 대한민국의 전복을 꾀하는 무장혁명세력이었다. 계엄군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그에 맞서 싸웠을 뿐이다.
⑶ 허위성
앞서 본 인정사실 및 갑 제21, 22, 24, 29, 30, 32, 37, 38, 40, 41, 42호증, 을 제61, 121 내지 124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한 위 사실적 주장들은 모두 허위임이 증명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이 1979. 12. 12.과 1980. 5. 17., 5. 18.을 각 전후해 그것이 군사반란 또는 내란이라는 정을 모르는 일선 부대 병력과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 등 병기를 휴대한 군인들을 이용해서 벌인 일련의 군사반란 및 내란, 내란목적살인 등의 행위는 이미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과 5·18민주화운동법에 의하여 모두 ‘헌정질서 파괴범죄’로 규정되었다. 5·18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광주 시민과 학생들이 위와 같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에 맞서 싸운 일련의 행위는 헌법제정권력인 국민들이 헌정질서 파괴범죄에 대항한 정당한 저항권 행사로 평가되었다. 그런데도 소외 1은 본인 스스로가 그 군사반란과 내란의 수괴였으면서도 위와 같은 우리 사회의 합의된 법적, 정치적, 역사적 평가를 정면으로 거슬러 여전히 광주 시민과 학생들을 무장혁명을 통해 대한민국의 전복을 꾀했던 폭동세력인 것처럼 묘사하고, 계엄군의 유혈진압은 정당한 자위권의 발동이었다는 식의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과 내란 행위에 이용된다는 정을 모르고 광주에 투입되어 뜻하지 않게 ‘손에 피를 묻히게 된’ 일반 계엄군 병사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나, 소외 1은 그러한 차원에서 일선에 투입된 계엄군 병사 개개인의 책임을 부인하는 취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행위에 따른 책임 자체를 광주 시민과 학생들의 무장저항에서 비롯된 것처럼 거꾸로 전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확정판결에서 이미 소외 1 등 신군부 구성원들의 정당행위, 정당방위·과잉방위, 긴급피난·과잉피난 등 위법성조각사유에 관련한 주장(위 적시사실과 비슷한 맥락에서 ‘광주에서의 시위가 폭력적인 양상으로 변하고 일부 시민들이 무기를 드는 등의 상황이 벌어져 군으로서도 이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취지에서 하는 주장)을 명백히 배척하였다. 이로써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무장저항행위에 대한 규범적 판단은 마쳐진 상태이다. 소외 1이 이 부분에서 하는 사실적 주장은 결국 위 대법원 전원합의체 확정판결에서 정립한 사실관계의 기본틀을 반대로 서술하는 것이다.
㈐ 소외 1은 1980. 5. 21. 13:00 무렵 전남도청 앞에서 있었던 집단발포를 기준으로 그보다 앞서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했다는 일부 기록이나 진술이 있는 점에 집착하며, ‘시위대가 먼저 무장을 하여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교묘하게 사안의 전체적인 구도를 바꾸려고 시도한다. 그렇지만 앞서 본 인정사실에 따르면 위 시점 이전에도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곤봉 폭행과 대검 사용, 산발적인 총기 발포로 이미 희생자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앞서 본 대법원 전원합의체 확정판결에서도 ‘계엄군이 난폭하게 광주시민의 시위행위를 진압한 행위’ 그 자체를 내란죄의 구성요건인 폭동의 내용으로서의 폭행·협박에 해당한다고 인정한 바 있다. 따라서 군사반란 및 내란 세력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일선 계엄군의 잔혹행위(그것이 총기를 사용한 것이었는지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를 저지하기 위한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저항행위는, 그 과정에서 설령 총기로 무장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평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인용하고 있는 무기피탈 시각과 관련한 일부 기록과 진술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이 사건 회고록의 표현 중 소외 1이 위와 같은 기록이나 진술을 단순 인용한 부분은 허위성이 명백히 밝혀지지 아니하여 ‘유지’로 판단한 것은 위 표에서 보는 바와 같다), 광주 시민과 학생들의 위와 같은 저항행위가 지닌 정당성 자체가 소멸된다고 볼 수 없다.
㈑ 소외 1의 위 사실적시는 위와 같이 큰 틀에서 군사반란 및 내란 세력과 그에 저항한 광주 시민과 학생들 사이의 관계를 뒤바꾸어 서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5·18민주화운동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과도 어긋나는 부분이 많다.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은 1980. 5. 초 무렵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하였다.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여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 투입을 사전에 계획했다.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대학교 정문 앞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진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곤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시위자들을 가격하여 부상을 입히고, 도망가는 시위자를 점포나 건물 안까지 추격하여 대량으로 연행하는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였다. 이는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이 미리 공수부대를 훈련시키면서 ‘강력한 타격’의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고자 했던 계획과도 맞아 떨어진다. 이와 같은 난폭한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수차례 발포함으로써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자 일부 시민의 무장저항이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을 되짚어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 서술한 것처럼 계엄군이 단순히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유혈진압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 소외 1에 대한 형사 확정판결로 인정된 내란목적살인의 점의 범죄사실의 요지는,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귀중한 국민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시급하게 광주 재진입작전을 강행하지 아니하면 안 될 상황이나 또는 광주시민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있다고 볼 수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위를 조속히 진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계엄군에게 광주 재진입작전을 강행하도록 함으로써 다수의 시민을 사망하게 하였다"라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보면 광주의 비극은 소외 1이 내란목적살인의 범죄를 꾀하고 그 정을 모르는 계엄군을 이용하여 그 범죄를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지, 무장혁명세력의 폭동에 대항하여 어쩔 수 없이 계엄군이 자위권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 앞서 인정사실에서 본 것과 같이 계엄군은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장을 시작한 1980. 5. 21. 무렵 이전에도 총을 쏘아 어린 고등학생에게 총상을 입혔고, 광주역 쪽으로 지원을 나가는 계엄군 병력을 막아선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많은 시민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러한 총격에 의한 부상 외에도, 시민 저항세력의 무장 이전에 이미 공수부대원으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가 사망한 청각장애인 소외 33(최초 희생자), 계엄군이 방망이로 구타하여 사망한 소외 34(2번째 희생자) 등의 시민 희생 사례가 발생하였다.
이어 1980. 5. 21. 13:00 무렵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당시에는 계엄군 쪽으로 돌진해오는 장갑차 또는 버스에 총격을 가한 외에 산발적으로 흩어진 시위대, 피신하였다가 부상자 등을 부축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오던 시위대를 향하여도 사격을 가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그 무렵 집에서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던 임신부가 총을 맞고 사망하는 사례도 발생하였다. 이후 광주 봉쇄작전 과정에서 계엄군은 단순히 버스를 타고 국도로 이동 중인 버스에 총격을 가하거나, 시위대와 관계없는 민가의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시위와 무관한 사람들을 향해서까지 사격을 가함으로써 무장하지 않은 시민이나 어린이까지 희생된 사례가 많이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소외 1은 ‘학살은 없었다’라고 강변하는 서술을 반복하고 있는 바, ‘학살’이라는 단어의 평가적 성격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실제 상황과는 너무 거리가 먼 사실적 주장이라서 허위라고 보기에 무리가 없다.
㈔ 광주 시민과 학생들의 무장과 관련한 사실관계 중 위 표 순번 2-17 중 ‘삭제’로 표기한 부분은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허위로 보고 삭제를 명한다.
당시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대장이었던 소외 77은 1995년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1980. 5. 19. 방송국 경계병이 무기를 빼앗긴 것과 관련하여, "저희 병사들 중 1명이 소총을 뺏겨 시위대가 그 총을 아래로 던져버리는 일이 있었다. 나중에 시위대가 물러간 뒤 잃어버렸던 소총을 아래에서 되찾았는데, 건물 앞 불에 탄 차 안에 해당 소총이 불탄 채로 있었다. 실탄은 병사들이 개인별로 소지하지 않고 탄통에 보관하고 있었으므로, 15발의 실탄만 따로 잃어버릴 일은 없다"고 진술했다. 소외 1의 이 부분 서술은 짤막한 상황보고 기록에 의존하고 있는 점, 위 진술은 실제로 해당 방송국의 경계를 맡은 부대 지휘관의 진술로서 그 내용이 상세하고 구체적인 점, 당시 군인이었던 소외 77이 1995년 수사 과정에 이르러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을 허위로 진술할만한 이유를 발견하기 어려운 점 등의 사정을 고려하면, 위 소외 77의 진술은 충분히 믿을 만하다.
따라서 당시 시민들이 병사의 총기 1정을 뺏어 현장에 버려 방치하였을 뿐임에도, 마치 실제로 시민들에 의한 총기 탈취 및 실탄 15발 탈취 행위가 있었다고 서술한 것은 허위라고 봄이 타당하다.
⑷ 원고 5·18단체들과의 개별적 관련성
이 부분 사실적시는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행위와 5·18민주화운동의 성격 자체를 뒤바꾸어 서술한 것이 허위라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개별적 관련성을 따질 것도 없이 위 가.의 2)항(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사실의 적시가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하는 결과를 이어지는 지를 총론적 관점에서 논증한 부분)에서 본 사정만 종합하여 보더라도 명예훼손의 결과 발생을 넉넉히 인정할 수 있다.
⑸ 피고들의 귀책사유(손해배상청구 관련)
살피건대, 이 부분 허위사실의 적시는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 확정판결로 인정된 사실관계를 전도된 형태로 서술하는 모습을 띄고 있는데, 소외 1은 바로 그 대법원 확정판결의 피고인이었으므로 그 판결에서 인정된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이나 광주 시민과 학생들의 행위에 대한 법적 평가를 잘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은 쉽게 상정하기 어렵다(단지 소외 1이 그 진실을 외면하면서 책임을 인정하지도, 반성과 사죄를 하지도 않은 채 끝내 사망하게 되었을 뿐이다). 또한 저자인 소외 1이나 피고 2가 주관적으로는 ‘광주시민들이 무장혁명세력이자 폭도’이고 ‘계엄군은 정당한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라고 믿고 있거나, 그렇게 믿고 싶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믿음이 정당하다고 볼 수 없으므로 위법성이 조각되지 아니 한다. 따라서 저자인 소외 1과 출판자인 피고 2가 위와 같은 적시사실이 허위라는 점을 과실 없이 알지 못하였다고 볼 수 없고, 피고들이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도 어렵다.
⑹ 소결론
원고 5·18단체들의 출판 등 금지청구는 위 ⑴항의 표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각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범위 내에서, 손해배상청구는 해당 부분을 허위사실로 적시하여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범위 내에서 각 받아들일 수 있다.
라) 소외 1 자신의 5·18 관련 책임론에 관한 부분(= 삭제를 명하는 부분은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손해배상액 산정에 포함)
⑴ 이 사건 회고록의 관련 표현들
순번쪽내 용판 단 1-1p.26~27광주사태로 인한 직간접적인 피해와 희생이 컸던 만큼 그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유지(일반론 내지 의견표명) 또 상처와 분노가 남아 있는 한, 그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에 내놓을 제물이 없을 수 없다고 하겠다. 광주사태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원죄가 됨으로써 그 십자가는 내가 지게 되었다.삭제 1-2p.27나를 비난하고 모욕주고 저주함으로써 상처와 분노가 사그라진다면 나로서도 감내하는 것이 미덕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유죄를 전제로 만들어진 5.18특별법과 그에 근거한 수사와 재판에서조차도 광주사태 때 계엄군의 투입과 현지에서의 작전지휘에 내가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집요한 추궁이 전개되었지만 모두 실패했다.삭제 1-5p.382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고 있었으나,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 사이의 그 어느 시간에도, 전남 광주의 그 어느 공간에도 나는 실재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계엄군의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지시하거나 실행하기 위한 그 어떤 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참석한 일이 없다.삭제 1-8p.3845.18사태의 발단에서 종결까지의 과정에서 내가 직접 관여할 일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삭제 1-9p.387그때 내가 중앙정보부장서리와 보안사령관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내가 맡고 있던 그 어느 직책도 군의 작전사항에 관여할 권한과 책무가 근본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유지(직책상 권한과 책임 일반론을 설명한 것임) 1-11p.440~441군부대의 지휘권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상식에 속하는 얘기지만, 지휘계통에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계급이나 직책이 높다고 하더라도 지휘문제에 관여할 수 없다.유지(일반론 내지 의견의 표명) 보안사령관은 육군의 지휘계통에 있는 지휘관이나 참모가 아니므로 나는 보안사령관 재임시 그 어떤 작전지휘모임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참석한 일도 없다.삭제 1-17p.507당시 광주 현장은 물론 일체의 작전지휘 계통에 있지도 않았던 내가 단지 ‘실권자’였고 그 후 대통령이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광주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받는 일 또한 없지 않았을까.삭제 2-3p.381광주사태를 둘러싼 모든 논란의 중심에는 내가 있다. 그러니까 그 모든 시비와 논란을 종결짓고, 비극적 사태의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는 일도 나의 몫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 같다.유지(단순한 소회의 표현) 2-4p.381그러니까 광주사태의 원인과 그 결과가 모두 나의 잘못임을 인정하고 내가 사죄해야 한다는 것이다.유지(단순히 여론의 흐름을 소개) 2-6p.381~382내가 대통령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자 사람들은 역사와 국민의 이름을 앞세운 채 나에게 5.18사태의 진실에 관해 물었다. 묻는데 그치지 않고 추궁과 공격이 이어졌다. 시대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자 나와 5.18은 새삼 사법적 심판대에 서게 되었다. 그 결말은 나 개인의 수형에 그치지 않고 역사의 전도로 나타났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고착화된 것 같다.삭제 2-8p.383지금 와서 되돌아볼 때 정보기관 책임자로서 아쉽기도 하고, 또 책임감을 느끼는 점은 광주사태의 전조를 전혀 알아챌 수 없었다는 것과 5월 19일 이후 상황이 폭동사태로 악화될 때 정보 기능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계엄사의 합동수사본부장인 보안사령관은 상관인 계엄사령관의 참모 중 한 사람으로서 그 어떤 조언을 하거나 건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나는 광주에서 진행되는 작전상황과 관련해 조언이나 건의를 할 수조차 없었다.삭제 2-10p.383당시 5.17시국수습방안은 계엄의 전국 확대 이외에도 국기문란사범과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수사를 포함하고 있어서 나는 그 일에 힘을 쏟아야 했다. 5월 17일 밤 10시부터 관련 혐의자들을 연행하는 등 수사를 본격화했던 것이다. 또 광주사태 초기에는 상황이 그처럼 악화될 것으로 예상할 수도 없었고, 또 5월 20일 상황까지는 부실한 정보 때문에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유지(당시 저자가 처한 상황을 주관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진위 판단의 대상으로 보기 어려움) 5월 21일까지 2개 공수여단과 20사단이 순차적으로 증파되어 작전에 투입됐지만 전투 정보의 수집 및 분석은 작전부대 자체의 정보·작전 기능이 담당하는 일이고 중앙정보부나 보안사 등 일반 정보기관이 관여할 여지는 없는 것이다.삭제 2-11p.384그러나 5.18과 관련된 사실들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한 것이고, 내가 직접 겪은 사실들에 관한 내용은 매우 적다. 그 까닭은 다시 말하지만 5.18사태에 관해 내가 한 일, 직접 겪은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삭제
⑵ 위 표현들 중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표현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관계 요지
일반 독자가 통상의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에서 위 각 서술 부분을 접하는 상황을 전제로, 위 각 표현의 객관적인 내용, 문구의 연결 방법, 글 전체의 취지와 맥락, 그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등을 종합하여 저자가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사실적 주장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일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소외 1은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계엄군의 유혈진압이나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 등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책임이 없다.
▷ 자신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에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에 관하여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필요해졌고, 5·18민주화운동 이후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는 사정 때문에 자신이 그 책임을 억울하게 떠안게 되었다.
⑶ 허위성
앞서 본 인정사실 및 갑 제21, 22, 24 내지 27, 29, 30, 38호증, 을 제35, 48, 49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한 위 사실적 주장들은 모두 허위임이 증명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 자신을 포함한 신군부 세력이 12·12, 5·17 군사반란 및 5·18 관련 내란 행위를 한 것에 있어서 소외 1은 반란수괴 및 내란수괴라는 법적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럼에도 소외 1은 자신이 ‘물리적으로’ 광주에 실재하였다는 증거가 없는 점을 내세워 위와 같은 책임을 애써 부정하기 위해 이 부분 서술을 한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물리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기재 역시 독자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므로 삭제를 명한다). 보안사령관이나 중앙정보부장 서리라는 공식 직함을 떠나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유혈진압 자체가 내란의 수단으로서의 폭행·협박으로 인정되었고, 소외 1 자신은 그 내란의 수괴로 유죄의 확정판결을 받은 이상 이와는 배치되는 방향으로 책임을 부인하는 사실적 주장을 하는 것은 허위라는 판단을 면하기 어렵다.
㈏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에서 인정된 각 피고인들의 범죄사실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은 사실관계를 인정할 수 있는데, 이는 광주에서의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과 관련하여 소외 1의 회의 참석 등 의사결정 과정에의 관여, 그리고 그 실행행위의 분담 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 이른바 ‘광주 재진입작전’ 계획은 1980. 5. 21. 무렵부터 육군본부에서 여러 번 논의를 거친 뒤 최종적으로 신군부 세력의 일원인 소외 24가 5. 25. 오전 소외 55 작전참모부장에게 지시하여 육본작전지침으로 완성되었다. 5. 25. 12:15 국방부 내 육군회관에서 소외 1, 소외 15, 소외 24, 소외 25 등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열려 5. 27. 00:01 이후 위 작전지침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 소외 15는 광주 재진입작전이 논의되던 중인 5. 23. 12:30 무렵 소외 56 전교사 부사령관에게 무장 헬기 및 전차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조속히 진압할 것을 지시하였고, 5. 25. 오후에는 소외 55 작전참모부장과 함께 광주에 내려가 전교사 사령관 소외 46에게 위 작전지침을 직접 전달하였다.
- 소외 26은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의 모체부대장으로서 공수여단에 대한 군수지원, 행정 등의 지원을 하는 한편, 소외 46 전교사 사령관에게 공수여단의 특성이나 부대훈련 상황을 알려 주거나 광주 재진입작전에 필요한 가발, 수류탄과 항공사진 등의 장비를 준비하여 예하부대원을 격려하는 등 광주 재진입작전을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 위 작전지침에 따라 전교사 사령관 소외 46은 공수여단별로 특공조를 편성하여 전남도청 등 목표지점을 점령하여 20사단에 인계하기로 결정하는 등 구체적인 작전계획과 작전준비를 하였고, 이에 따라 공수여단 특공조가 5. 26. 23:00경부터 침투작전을 실시하여 광주 재진입작전을 개시한 이래 5. 27. 06:20까지 사이에 전남도청, 광주공원, ♧☆☆ 건물 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그 특공조 부대원들이 총격을 가하여 소외 47 등 시민 18명을 사망하게 하였다.
㈐ 서울고등법원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 판결에서 "광주 재진입작전을 실시하여 전남도청 등을 다시 장악하려면 위와 같이 무장하고 있는 시위대를 제압하여야 하며, 그 과정에서 이에 저항하는 시위대와의 교전이 불가피하여 필연적으로 사상자가 생기게 되므로, 피고인 소외 1 및 위 피고인들이 이러한 사정을 알면서 재진입작전의 실시를 강행하기로 하고 이를 명령한 데에는 그와 같은 살상행위를 지시 내지 용인하는 의사가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판시하였다. 또한 "재진입작전명령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은 시위대의 무장상태 그리고 그 작전의 목표에 비추어 볼 때, 시위대에 대한 사격을 전제하지 아니하고는 수행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므로, 그 실시명령에는 그 작전의 범위 내에서는 사람을 살해하여도 좋다는 발포명령이 들어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당시 위 피고인들이 처하여 있는 상황은 광주시위를 조속히 제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바꾸어 말하면 집권에 성공할 수 없는 중요한 상황이었으므로, 광주 재진입작전을 실시하는 데에 저항 내지 장애가 되는 범위의 사람들을 살상하는 것은 내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직접 필요한 수단이었다고 할 것이어서, 위 피고인들은 피고인 소외 1과 공동하여 내란목적살인의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판단하였다. 나아가 "피해자들에 대한 총격행위의 원인으로 공소장에 적시된 자위권 보유천명 또는 자위권발동 지시에 대하여, 피고인 소외 1은 배후에서 자위권 보유천명의 담화문을 발표하도록 지시·관여한 것으로 인정된다"고도 하였다. 대법원은 위 고등법원의 판단을 모두 수긍하였고, 위와 같은 사실관계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확정판결로 인정되었다.
이처럼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시민들이 희생된 것과 관련하여 소외 1이 관여하고 그에 따른 법적 책임도 져야 한다는 것이 명백함에도 소외 1은 이 사건 회고록의 해당 부분에서 교묘한 표현방법을 동원하여 이에 배치되는 사실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 위 다)항의 주제(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이라는 사실적 주장과 관련한 부분)에 관하여 판단하면서 상세히 본 바와 같이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이 위와 같은 각 범죄사실에 관하여 "시위진압행위는 정당행위, 정당방위·과잉방위, 긴급피난·과잉피난에 해당한다"라는 취지의 주장도 하였으나, 모두 배척되었다. 따라서 소외 1이 위와 같은 군사반란 및 내란, 내란목적살인에 관여한 것은 위법성의 측면에서도 정당화할 수 없으므로 그 책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 이 법원은 소외 1이 이 부분 서술에서 적시 또는 암시한 사실 및 진위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실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일반론을 전개하는 부분, 여론의 동향을 단순 전달하는 부분, 자신의 주관적인 상태를 서술한 부분, 당시 상황에 대한 ‘자기변명’에 가까운 부분 등은 모두 제외하고 명백하게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시민들의 희생에 관하여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부정하는 부분만 추려내어 허위성 판단의 대상으로 삼았다.
⑷ 원고 5·18단체들과의 개별적 관련성
살피건대, ①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은 그 당시부터 군부가 벌이는 헌법질서 문란 행위의 배후에 실권자인 소외 1이 있음을 직감하고 "소외 1은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는 등 저항의 대상으로 그를 명확하게 특정하여 왔던 점, ② 이후 원고 5·18단체들의 진상규명 및 참여자 명예회복 활동의 초점은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발포명령을 한 책임자를 찾아내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아 왔고, 그중에서도 소외 1의 책임을 밝혀내는 것에 역량을 집중하였던 점, ③ 그 결과 소외 1을 군사반란 및 내란의 수괴이자 5·18관련 내란목적살인의 범죄자로 인정하는 판결이 확정됨으로써 위와 같은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게 되었던 점, ④ 원고 5·18단체들은 신군부 세력의 군권 및 정권 장악으로 최고 권력자가 된 소외 1을 두려워하지 않고 유·무형의 탄압을 견디며 그의 이른바 ‘학살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기에, 위와 같은 결과를 얻게 된 것을 각 단체들의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는 등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삼고 있는 점, ⑤ 따라서 소외 1이 실제로는 자신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고, 단지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워야 할 필요성 때문에 억울하게 범죄혐의를 뒤집어쓴 것이라는 허위사실을 적시하는 것은 소외 1의 법적 책임을 전제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온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에도 직·간접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위와 같은 허위사실의 적시는 원고 5·18단체들의 법인으로서의 인격권과 밀접한 개별적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⑸ 피고들의 귀책사유(손해배상청구 관련)
소외 1은 자신이 피고인으로 된 형사 확정판결에서 인정된 사실관계와 완전히 배치되는 사실적 주장을 하여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하였고, 피고 2는 위와 같은 내용이 포함된 이 사건 회고록을 그대로 출판하였는바, 피고들이 위와 같은 적시사실이 허위라는 점을 과실 없이 알지 못하는 상황 자체를 쉽게 떠올리기 어렵고, 피고들이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도 어렵다.
⑹ 소결론
원고 5·18단체들의 출판 등 금지청구는 위 ⑴항의 표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각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범위 내에서, 손해배상청구는 해당 부분을 허위사실로 적시하여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범위 내에서 각 받아들일 수 있다.
마)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계엄군 병사 관련 부분(= 일부 삭제, 다만 일부 삭제를 명하는 부분에 대한 피고들의 귀책사유가 인정되지 않아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손해배상액 산정에는 불포함)
⑴ 이 사건 회고록의 관련 표현들
순번쪽내 용판 단 1-12p.470오후 1시경 시위대는 소외 78 지사가 약속했던 시간이 되었음에도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은 데 대해 항의하면서 공수부대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졌다.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 측 장갑차 한 대가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돌진했다.유지(허위라는 점에 대한 입증 부족) 순간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대원들은 돌진하는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지부 건물 등으로 흩어졌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대원 2명이 시위대 장갑차에 치여 1명은 즉사했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삭제
⑵ 위 표현들 중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표현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관계 요지
일반 독자가 통상의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에서 위 서술 부분을 접하는 상황을 전제로, 위 표현의 객관적인 내용, 문구의 연결 방법, 글 전체의 취지와 맥락, 그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등을 종합하여 저자가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사실적 주장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일 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광주시민과 학생들로 구성된 시위군중의 일원인 사람이 운전하여 공수부대 쪽으로 돌진한 장갑차에 치어 계엄군 병사가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⑶ 허위성
앞서 본 인정사실 및 갑 제38, 48, 49, 50호증, 을 제1, 29, 52, 83, 85, 86, 170, 171, 173호증의 각 기재와 당심 증인 소외 80의 증언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한 위 사실적 주장들은 모두 허위임이 증명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 1980. 5. 21. 13:00을 전후하여 광주시민과 학생들로 구성된 시위군중(이하 ‘시위군중’이라 한다)은 ■■빌딩과 ♧◎◎ 건물 사이의 금남로를 점거한 상태에서, 이를 진압하여 해산시키기 위해 당시 전남도청을 등지고 분수대 앞에 포진해있던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당시 그 위치에 있던 계엄군은 주로 공수부대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계엄군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기준으로 도로 중앙선의 왼쪽에 11공수여단 62대대가, 오른쪽에 11공수여단 61대대가 나란히 도열하고 있었다. 또한 시위진압 지원을 나온 기갑학교 소속 장갑차(무한궤도형 장갑차, 이하 ‘계엄군 장갑차’라 한다) 2대가 위 61, 62대대의 앞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나중에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소외 79 일병은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으로서, 당시 63대대는 61대대 후방에 있었다.
㈏ 위 일시 무렵 시위군중은 위 공수부대의 선두에 배치된 계엄군 장갑차에 화염병을 투척하였다. 불이 붙은 계엄군 장갑차는 급히 뒤로 후진 기동을 하였고, 이어 곧바로 시위군중의 일원인 누군가가 운전한 장갑차(원형 바퀴가 달린 도시형 장갑차, 이하 ‘시위군중 장갑차’라 한다)가 계엄군이 포진한 방향으로 달려 나왔다. 위와 같이 화염병 공격을 받아 불이 붙은 계엄군 장갑차가 후진 기동을 함과 동시에 시위군중 장갑차가 빠르게 다가오자 계엄군의 저지선은 일순 붕괴되어 소속 병사들은 도청 분수대 뒤와 도로 양 옆 방향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63대대 소속의 소외 79 일병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이하 ‘장갑차 사망 사고’라 한다).
㈐ 5·18민주화운동 이후부터 이 사건 변론종결일 현재까지 위 장갑차 사망 사고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진술이 있었다(원문 중 쟁점 판단에 도움이 되는 부분은 재판부가 강조 표시 를 하였다).
㈑ 소외 80은 1999년 잡지 (잡지명 2 생략)에 기고문을 보냈을 때부터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자신이 같은 63대대 병사의 입장에서 소외 79 일병의 장갑차 사망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소외 80의 진술에 관하여 보건대, ① 그가 사망한 소외 89와 같은 대대 소속 사병으로서 보다 가까이서 장갑차 사망 사건을 목격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점(그와 상반되는 진술을 하는 이들은 대개 사병들 속에 섞여 있지 않은 공수부대 장교들이거나 제3자로서 사건을 지켜 본 기자 등으로서 이른바 ‘신용성의 정황적 보장’ 측면에서 위 소외 80의 진술보다는 힘이 약한 편이다), ② 소외 80의 진술 내용이 꽤나 구체적이고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쉽게 묘사하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는 점 , ③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외 80이 본 것에 부합하는 취지로 진술하는 다른 공수부대원들도 있어서 계엄군 측의 증언이 전부 그와 상반되는 것은 아닌 점, ④ 소외 80은 1990년경부터 소외 79 일병이 사망하게 된 원인에 대하여 자신이 기억하는 바를 진술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시점에서 그가 굳이 보지도 않은 일을 거짓으로 말할 특별한 동기를 찾을 수 없는 점 등을 고려하면, 소외 80이 실제로 보았다고 하면서 위와 같이 증언하는 것은 뚜렷한 반증이 없는 이상 장갑차 사망 사고가 계엄군 장갑차에 의해 발생하였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로 삼기에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특히 장교 출신인 소외 81도 위 소외 80과 같은 취지로 진술하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5·18 수사 당시 그가 참고인으로 진술한 것이기는 하나, 5·18 당시 공수부대 중대장으로 현장에서 시위진압작전을 수행하였던 점을 고려하면 진술 여하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소외 89 사망의 원인을 계엄군 장갑차에 의한 사고라고 전해 들었다고 진술하여 위 소외 80의 진술 신빙성을 높여준다.
㈓ 소외 82, 소외 83 등 현장에 있던 장교 중에서는 정확히 어느 장갑차에 의해 사고가 발생하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중립적인 진술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 이유에 관하여 그들은 당시 화염병 때문에 불이 붙은 계엄군 장갑차가 뒤로 후진을 하는 상황에서 시위군중이 운전하는 장갑차와 버스가 연달아 공수부대원들 쪽으로 돌진하여 오는 바람에 병사들이 좌우로 퍼지듯 퇴각을 하고 있었고, 최루탄 연기까지 자욱하여 정확한 상황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묘사는 당시 객관적으로 벌어진 일들과 잘 맞아 떨어진다.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위군중의 바퀴형 장갑차에 치인 것이라고 단언하여 말하는 장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위 소외 83의 경우 수사 단계에서는 잘 모르겠다고 하였는데, 공판 단계에서는 시위군중의 장갑차에 치인 것이라고 진술을 바꾸었는데, 어쩌면 다른 공수부대 장교들이 수사단계에서 그와 같이 진술하였다는 점을 전해 듣고 진술을 고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는 것을 결코 불합리하다고 볼 수 없다.
㈔ 시위군중의 바퀴형 장갑차에 의한 사고라고 단언하는 장교들의 진술에 관하여 보건대, ① 앞서 본 바와 같이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어 후진을 하자 병사들이 좌우로 흩어지듯 퇴각을 하고, 바람이 시위군중이 있는 곳에서 공수부대 쪽으로 불어와 최루탄 연기가 계엄군들 쪽에 자욱했던 당시 상황에서 어떻게 장교인 자신들과 가까운 거리에 있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소외 89 사고 장면을 정확히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인지 의문인 점, ② 사고 발생의 구체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소외 84, 소외 85는 소외 89가 장갑차에 ‘들이받히는(충격형)’ 사고를 당한 것처럼 묘사하였는데 소외 86, 소외 87은 ‘깔리는(역과형)’ 사고를 당한 것처럼 진술하여 시위군중 장갑차에 의한 것이라고 진술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내용이 엇갈리는 점, ③ 공수부대 병사였던 소외 80이 굳이 허위진술을 할 동기를 찾기 어려운 반면, 위 공수부대 장교들은 진술 여하에 따라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피의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른바 신군부의 ‘자위권 발동론’에 맞춰 시위군중이 몰고 온 장갑차에 공수부대 병사가 피해를 입은 것처럼 진술할 이익이 충분히 있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병사로서 가까이서 직접 보았다고 하는 소외 80과 장교 입장에서 분명히 전해 들었다고 하는 소외 81의 상반된 진술에 의해 위 각 장교들의 주장은 충분히 반박이 된다.
㈕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7. 7. 24. 작성한 조사결과보고서(갑 제38호증, 86쪽)와 서울지방검찰청 및 국방부 검찰단이 1995. 7. 18. 작성한 5·18 관련사건 조사결과(을 제1호증, 99쪽)에는 각각 소외 89가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였다고만 기재되어 있을 뿐, 정확히 그것이 계엄군 장갑차인지, 시위군중 장갑차인지는 서술되어 있지 않다. 다만 위 조사결과보고서에는 ‘위원회가 13시 전후의 도청 앞 발포 상황에 대하여 수집한 기록’이라는 내용으로(위원회의 조사 결과가 아니라 단순히 수집한 자료를 전재하는 것이라는 취지이다), "13시경 시위대 선두에 있던 장갑차가 시동을 건 후 불시에 계엄군 대열에 돌진하여 선두에 있던 61, 62대대는 피했으나 후방에 위치한 63대대 병사 1명이 압사"라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기는 하다(갑 제38호증, 87쪽). 그렇지만 이는 5·18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이후 계엄군 입장에서 정리한 ‘육군본부, 광주사태(상황, 경과, 결과)’의 내용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당시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희생이 불가피하였다는 것을 강변하려던 신군부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고, 과연 어떤 뒷받침 자료나 증거를 바탕으로 위와 같이 상황을 정리하였는지는 알 수 없어, 위와 같은 기록의 존재만으로 소외 80과 소외 81의 진술 신빙성을 뒤집기에는 부족하다. 오히려 당시 63대대 간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진압작전 수기(갑 제49호증의 5, 3쪽)’에는 "후진하는 APC 에 뒤에 있던 63대대 병력 1명이 깔렸으며"라고 기재되어 있는 자료도 있다.
㈖ ♧▽일보 주재기자 소외 88의 진술은 당시 상황에 관하여 아래와 같은 중요한 부분에 오류가 있어, 위와 같이 대립되는 진술 중 어느 한 쪽의 신빙성을 분명하게 높여주는 정도의 증거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없다. 즉,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결과나 5·18 수사결과 발표 등에서 객관적으로 확인된 당시 상황에 의하면, 우선 계엄군 장갑차에 대한 화염병 투척이 있고, 그와 동시에 혹은 그 직후에 시위군중의 일원이 운전한 도시형 장갑차가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하였으며, 그 뒤를 ♧□여객 버스가 따라 붙어 전남도청 방향으로 진출한 것이었다(시위군중 장갑차에 의한 사고라고 설명하는 장교들의 경우에도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위와 같이 진술한다). 그럼에도 소외 88은 위 선후관계를 반대로 진술하고 있다. 심지어 위와 같은 오류를 바탕으로 구체성의 살까지 붙여서 매우 자세히 상황을 묘사하고 있기까지 하다. 기억의 일부 오류가능성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추가적인 근거가 있지 않는 한 위 소외 80, 소외 81의 각 진술에 따른 사실관계의 확정을 방해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한다.
⑷ 원고 5·18단체들과의 개별적 관련성
위 표현의 요지는 광주 시민과 학생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장갑차를 운전하여 계엄군에 돌진하는 과정에서 그 장갑차에 계엄군 병사가 깔려 사망하였다는 것으로서, 광주 시민과 학생들의 저항 방식이 과격하였고, 심지어 계엄군 병사의 희생까지도 아랑곳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위와 같은 사실적 주장이 허위인 이상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 및 그 유족들로 구성된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시키는 것이라고 봄이 상당하다.
⑸ 피고들의 귀책사유(손해배상청구 관련)
그러나 앞서 든 증거들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 및 사정, 즉 ① 장갑차에 치여 계엄군 병사가 사망한 일은 그 사건만 놓고 보면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체 5·18민주화운동 전개 과정을 통틀어서 보았을 때 군이나 경찰, 5·18민주화운동 참여자들 중 어느 주체도 그것을 주요 사건으로 기억할 정도라고는 보기 어려운 점, ②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압작전 당시 보안사령관이자 신군부 세력의 수장이라는 지위에 있던 소외 1이 위와 같은 사건의 세부 사항에 대해서까지 세세하게 챙겨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점(이는 ‘북한군 남파 여부’나 ‘계엄군에 의한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 여부’ 등과 같이 굵직한 사실관계들에 관하여는 정보가 집중되는 지위에 있었던 점을 불리한 간접사실로 반영한 것과 반대되는 측면이다), ③ 당시 공수부대 소속으로 장갑차에 치여 사망하는 현장을 목격하였다고 하는 소외 80의 진술이 위와 같이 허위라고 보는 유력한 증거가 되기는 하였지만, 그의 진술은 원고 5·18단체들의 주장에 의하더라도 1999년 (잡지명 2 생략)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는 것인바, 소외 1이 위 잡지의 내용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단할 수 있는 사정은 나타나지 않는 점, ④ 위 잡지에 소개된 위 소외 80의 진술이 2010년 발간된 ‘(도서명 6 생략)’이라는 단행본의 한 문단 정도로 압축되어 인용된 것을 제외하고는 소외 1이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사회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고 보기 어렵고,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을 집필할 당시까지도 비록 계엄군 중심의 진술이기는 하나 위 소외 80과 반대되는 입장의 진술도 없지 않았던 점, ⑤ 소외 80이 ‘계엄군 병사를 치여 사망하게 한 장갑차는 계엄군 소속의 무한궤도를 장착한 장갑차였다’는 취지로 진술하는 사실확인서는 2019. 3. 25.자로 작성된 것이고, 이 법원에서 그가 증언한 것은 2021. 9. 15.이라서, 이 사건 회고록 집필 당시에 소외 1이 위 사실관계를 정확히 인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 점, ⑥ 원고 5·18단체들이 이 사건 회고록 출간 이전부터 계엄군 병사가 장갑차에 치어 사망한 사건을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는데 있어 중요한 사실관계 중 하나로 널리 쟁점화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는 자료도 딱히 제출되지 않은 점 등에 비추어 보면, 갑 제37, 38, 48, 49호증의 각 기재 등 원고들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저자인 소외 1과 출판자인 피고 2가 이 사건 회고록 집필 및 출판 당시 위 적시사실이 허위임을 알았다거나, 알지 못한 데에 과실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⑹ 소결론
원고 5·18단체들의 이 부분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는 피고들의 귀책사유를 요하지 않으므로 위 ⑴항의 표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각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범위 내에서 이를 받아들이되, 손해배상청구는 해당 부분이 허위라는 점에 대한 소외 1의 고의 또는 과실이 인정되지 않으므로 손해배상액 산정 대상에서는 제외한다.
바) ‘암매장’은 유언비어라고 한 부분(= 삭제를 명하고,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손해배상액 산정에 포함)
⑴ 이 사건 회고록의 관련 표현들
순번쪽내 용판 단 2-28p.485광주사태 당시에 나돌았던 유언비어 가운데 계엄군이 광주시민들을 마구 학살해 여기저기 암매장했다는 내용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의혹은 국회 청문회에서도 제기됐고 그 뒤 5.18특별법에 따른 검찰의 조사 때에도 거론되었다. ●●대학 뒷산에 묻었다는 주장 또 암매장하기 위해 시청 청소차에 시체를 대량으로 실어 어디론가 갔다는 소문들도 있었다. 암매장 장소로 지목된 곳을 실제로 파헤쳐보기도 했지만 그런 주장들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삭제
⑵ 위 표현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관계 요지
일반 독자가 통상의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에서 위 서술 부분을 접하는 상황을 전제로, 위 표현의 객관적인 내용, 문구의 연결 방법, 글 전체의 취지와 맥락, 그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등을 종합하여 저자가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사실적 주장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일 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계엄군이 희생당한 광주시민의 시신을 여기저기 암매장했다는 것은 유언비어이고, 나중에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⑶ 허위성
앞서 본 인정사실 및 갑 제21, 22, 38, 44, 46, 54, 55호증, 을 제140, 160, 161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한 위 사실적 주장은 허위임이 증명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 소외 1의 위 표현에 대한 허위성 증명이 갖는 중층적인 구조(‘암매장설은 유언비어이다’라는 말이 허위임을 밝혀야 하기 때문에 증명해야 할 명제가 이중부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를 감안하면, 위 표현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원고 5·18단체들이 주장 증명하고 이 법원이 판단하여야 하는 내용은, ‘계엄군이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어딘가에 암매장하였다는 구체적인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5·18민주화운동 이후 장기간에 걸쳐 광주 지역 곳곳에서 정상적인 장사를 지내지 않고 매장된 것이 분명한 상태로 발견된 여러 시신들, 그리고 여전히 행방이 묘연한 희생자들이 있는 이유가 (원고 5·18단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계엄군의 암매장에 기인하였을 개연성이 충분한지로 모아져야 한다. 만약 그럴 개연성이 충분하다면, 그러한 주장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근거 없는 유언비어’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마치 원고 5·18단체들이 어떤 ‘유언비어’에 현혹되어 암매장 시신 수습활동이나 행방불명자를 찾는 활동 등을 전개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어, 결국 허위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광주 시민과 학생들에 대하여 곤봉, 대검, 총기 등을 이용하여 잔혹한 유혈진압을 감행한 사실과 그로 인해 여지껏 정확한 숫자를 다 파악하지 못한 많은 광주 시민과 학생들이 사망하게 된 사실, 계엄군은 그중 일부의 시신을 확보하고도 유족을 찾아 인계하지 않고 광주교도소 뒤편 나무 부근에 매장하기도 한 사실(다만 소외 1 등은 이를 ‘가매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등은 객관적으로 밝혀졌고, 소외 1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관계이다. 또한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차원에서 관계 법률에 따라 국가가 설치 및 관리하는 국립 5·18민주묘지에는 별도로 ‘행불자 묘역’을 만들어 현재까지 69명가량을 공식적으로 ‘행불자’로 인정하여 그들의 시신을 찾을 때까지 가묘 상태로 원혼을 모시고 있기도 하다. 위와 같은 사실관계를 논리적으로 조합하면 지금까지 행방을 찾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계엄군에 의해 희생된 뒤에 어딘가에 암매장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론하는 것은 충분한 개연성이 있고, 이러한 추론의 결과를 두고 ‘근거 없는 유언비어’라고 할 수는 없다.
㈐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보고서에는 ‘▼▼동 미니버스 총격 사건 발생 후 ♧◁마을 여단 상황실로 이송된 부상자 중 2명을 병사들 3명이 인근 야산 중턱으로 데려가 사살한 뒤 암매장하였다’는 기재가 있고, 당시 광주광역시청 ♧▷과 직원 소외 90이 위 2명의 시신을 수습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위와 같은 일부 사실관계에 의해 ‘계엄군에 의해 광범위한 암매장이 벌어졌다’는 점까지 증명된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암매장 관련 진술들이 단순한 유언비어로 치부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라는 점이 충분히 뒷받침된다.
㈑ 5·18특별수사본부는 1996. 1. 23. 광주 현지 조사 후 "13개 사체 암매장 가능 지역에 관하여 현장조사를 시행하였으나 자료를 찾을 수 없어 현재로서는 발굴이 어렵다"라는 취지의 발표를 한 사실이 있다. 그렇지만 위 발표 자체에 의하더라도 암매장 행위가 없었다는 취지가 아니라, 단지 현재로서는 발굴이 어렵다는 것일 뿐이다. 2018. 3. 13. 법률 제15434호로 제정된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하 ‘5·18진상규명법’이라 한다)에서 남은 진상규명 대상의 하나로서 ‘실종·암매장 사건’을 규정하고(2021. 1. 5. 법률 제17886호로 개정되기 전의 구 5·18진상규명법 제3조 제1호), 그에 따른 조사를 지속하고 있다. 암매장설이 사실무근이라는 결론이 공인된 국가기관에 의해 내려진 바 없고 오히려 국가 주도로 법령에 따른 관련 진상규명 절차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주장이 유언비어에 불과하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사실관계 조사가 결여된 심히 경솔한 표현으로서 허위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⑷ 원고 5·18단체들과의 개별적 관련성
원고 5·18단체들은 그동안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 중에는 계엄군의 암매장으로 인하여 한동안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거나 유족을 찾지 못해 무연고자로 남은 이들이 많고 심지어 아직까지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이들도 있다"고 호소해왔다. 이러한 호소는 앞서 본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서도 일부 그럴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단서가 발견되는 등 상당한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현재는 국가 차원의 행방불명자 시신 찾기 및 암매장 추정지역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소외 1은 이 사건 회고록에 ‘암매장은 근거 없는 유언비어’라는 요지의 표현을 하였다. 만약 소외 1의 주장이 진실하다면, 5·18단체들은 그동안 유언비어에 현혹되어 나라의 힘까지 빌려가며 행방불명자 찾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 되고 만다. 이를 보통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면 결국 원고 5·18단체들이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유언비어’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부분 허위사실의 적시는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하는 것으로서 해당 원고들과 개별적 관련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⑸ 피고들의 귀책사유(손해배상청구 관련)
살피건대, ① 원고 5·18단체들은 임의단체로 있을 무렵부터 행방불명자 소재 파악 활동을 주요한 진상규명 활동의 하나로 꾸준히 전개해왔던 점, ② 암매장 가능성에 대한 국방부 차원의 조사도 이뤄져 일부 그 주장에 부합하는 사실관계가 확인되기도 한 점, ③ 소외 1을 도와 ‘책임정리’를 맡았다고 하는 소외 74의 진술에 의하면 5·18민주화운동 관련 서술 부분은 광범위한 자료들을 참조했고, 그중 터무니없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제외하고 내용을 구성하였다고 하는바(을 제169호증 참조), 그 과정에서 이 사건 회고록의 출간 이전에 이미 나와 있던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보고서 등도 입수하여 검토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하고, 나아가 국립 5.18민주묘지의 행불자 묘역에는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행불자 69명가량의 묘역이 설치되어 있는 사실이 여러 차례 언론에 보도되어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쉽게 확인이 가능했던 점, ④ 만약 위와 같은 자료를 확인하지 않은 채 혹은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암매장은 근거 없는 유언비어’라고 심히 경솔하게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이라면 어느 경우든 허위사실 적시에 관한 과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아야 하는 점 등을 종합하면, 저자인 소외 1과 출판자인 피고 2가 이 부분 표현이 허위라는 점을 과실 없이 알지 못하였다고 볼 수 없고, 피고들이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도 어렵다.
⑹ 소결론
원고 5·18단체들의 이 부분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출판 등 금지청구 및 해당 부분을 허위사실로 적시하여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취지의 손해배상청구는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
사) 광주교도소 습격 관련 부분(= 북한군 등의 개입설을 암시하는 부분만 삭제하고 , 그 범위 내에서만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손해배상액 산정에 포함)
⑴ 이 사건 회고록의 관련 표현들
순번쪽내 용판 단 2-33p.5185.18사태 때 계엄군은 광주시내는 물론 광주시 외곽 등 여러 곳에서 흉기 또는 총기를 든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공격 양상이 가장 집요했던 것은 광주교도소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곳은 모두 여섯 차례나 무장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 170명, 강력범 300여 명을 포함해 총 2,64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2-33p.518수용자들을 자극해 교도소 내 폭동을 유발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북한이 광주에 있는 여러 고정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시키라"는 지령을 내리는 것이 우리 정보당국에 의해 포착되었다.삭제 2-34p.519~520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처음 습격한 것은 5월 21일 12시경이었다. 당시 교도소는 31사단 병력이 경비하고 있었는데 무장시위대는 총을 난사하며 공격해 왔다. 그러자 전교사는 교도소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3공수여단을 긴급증파했었다. 시위대는 이날 저녁 7시 20분경 교도소 주변에 매복해 있다가 31사단 병력과 교체된 3공수여단 병력에게 기습 총격을 가해왔다. 3여단 15대대장의 임무 교대 중 바로 옆에 있던 무전병이 저격을 당했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권총을 차고 한눈에 고위 지휘관인 것을 알고 잠복해 있던 무장시위대가 저격을 한 것인데 빗나가서 바로 곁에 있던 무전병이 맞은 것이다.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는 그처럼 대담하게 나오기 어렵다.삭제 2-35p.520다음날인 22일에는 새벽 4시경 LMG(경기관총)를 탑재한 차량으로 공격해오는가 하면 10시 20분경에는 소방차를 몰고와 총격을 가하는 등 공격 양상이 매우 집요했다. 23일에는 소방차를 몰고와서 3공수여단 병력을 공격하던 중 시위대 4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이날 저녁 7시경에도 총격을 가하며 교도소를 습격해와 교전을 벌였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2-36p.521~522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했다는 사실은 광주사태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교도소를 습격해 수감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은 전쟁 수행 중의 점령군 또는 혁명적 상황에서 혁명군이 취하는 교과서적인 작전이다. 5.18 당시 그들은 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까지 그처럼 교도소 공격에 집착했을까.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미전향 장기수들, 엄중한 정치범들, 간첩들을 해방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다고 단언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삭제 2-37p.5225.18사태가 수습된 뒤, 특히 ‘민주화’ 이후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진술을 담은 기록물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때의 활약상에 따라 적지 않은 ‘민주화 유공 보상금’도 지급되었다. 그런데 자신이 교도소를 공격했다고 나선 사람은 없다고 한다.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사살된 사람들이야 죽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살아 도망간 사람들도 있을 텐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유지(허위성 입증 부족) 그렇다면 교도소 습격을 주도하고 참여했던 사람들은 왜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우리 국민 앞에 나설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삭제
⑵ 위 표현들 중 ‘판단’란에 ‘유지’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표현이 적시 또는 암시하는 사실관계 요지(위 표현들 중 ‘판단’란에 ‘삭제’로 표기한 부분은 북한군 개입설과 연관된 표현으로 분류하여 앞에서 별도로 판단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적시 또는 암시 사실에서 제외하고 그 나머지 부분만 판단한다.)
일반 독자가 통상의 방법으로 이 사건 회고록에서 위 각 서술 부분을 접하는 상황을 전제로, 위 각 표현의 객관적인 내용, 문구의 연결 방법, 글 전체의 취지와 맥락, 그 배경이 된 사회적 흐름 등을 종합하여 저자가 직접적으로 적시하거나 간접적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사실적 주장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일 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저항세력은 광주교도소를 집요하다고 할 정도로 여러 차례 공격했다.
▷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음을 밝히면 국가로부터 다양한 보상을 받게 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광주교도소 습격에 가담하였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⑶ 허위성
앞서 본 인정사실 및 갑 제21, 22호증, 을 제1, 140, 161호증의 각 기재에 변론 전체의 취지를 더하여 알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에 비추어 보면,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서 적시 또는 암시한 위 사실적 주장들을 허위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 대법원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확정판결에서 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 방향으로 여러 차례 총격을 가한 사실이 있다는 전제에서, 그러한 총격에 대응하여 광주교도소를 방어하기 위해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것은 정당행위에 해당하여, 그 부분에 한해서는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에게 국헌문란의 목적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소외 1이 이 사건 회고록에 서술한 표현들의 허위성을 판단할 때 위 대법원 전원합의체 확정판결에서 인정한 사실관계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 주제에 대한 판단에 관해서만 그와 배치되는 사실관계를 내세워 소외 1의 표현을 허위라고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다만, 교도소 방향을 공격한 것의 동기를 북한과 연결시키는 부분에 관해서는 ‘북한군 개입설’의 일부로 보아 허위로 판단하였음은 앞서 본 바와 같다).
㈏ 위 대법원 확정판결의 원심에 해당하는 서울고등법원 판결에서도 "3공수여단 11대대 병력이 1980. 5. 21.부터 5. 23.까지 광주교도소의 방어임무를 수행하던 중 무장 시위대로부터 전후 5차례에 걸쳐 공격을 받았는데, 5. 22. 00:40경에는 차량 6대에 분승하여 광주교도소로 접근하여 오는 무장 시위대와 교전하고, 5. 22. 09:00경에는 2.5톤 군용트럭에 엘엠지(LMG) 기관총을 탑재한 상태에서 광주교도소 정문 방향으로 접근하면서 총격을 가하여 오는 무장시위대에 응사하는 등 2차례의 교전"이 있었던 사실을 인정하였고, 대법원은 위와 같은 사실인정을 모두 수긍하였다. 소외 1이 교도소 부근 교전과 관련하여 서술한 내용은 위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인정된 사실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고, 원고들이 제출한 증거들을 모두 믿는다고 하더라도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벌어진 교전의 횟수나 동원된 무기의 규모, 참여한 시민저항세력의 숫자 등에서 일부 차이가 있을 뿐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양측의 총격전이 있었던 사실 자체는 번복되지 아니 한다.
㈐ 원고들은 설령 총격전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시민저항세력에게 교도소를 습격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교도소가 광주시 외곽으로 연결되는 고속도로와 국도 부근에 있었는데, 교도소를 수비하는 계엄군이 광주에서 나가거나 광주로 들어오는 시민들의 차량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바람에 거기에 응사하는 과정에서 일부 총격전이 있었을 뿐이고, ‘집요한 공격’이라고 할 정도의 횟수도 아니었으며, 계엄군의 중화기에 비하면 칼빈 소총 몇 자루 정도에 불과하여 휴대한 무기도 보잘 것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교도소 부근 총격전’의 전말에 관한 원고들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이는 객관적으로 벌어진 사태를 주관적으로 어떻게 받아 들여 평가하고 해석하는가의 문제에 그칠 뿐이다. 소외 1은 그것을 ‘교도소에 있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구출하기 위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집요한 공격을 가한 것’이라는 해석을 가미하였고, 그중 ‘북한군 개입설’을 암시하는 부분은 별도로 허위사실로 판단하였으므로, 이를 제외한 나머지 객관적 사실관계는 주요한 부분에서 진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⑷ 소결론
그렇다면 이 부분 표현에 관해서는 그것이 허위라는 점에 대한 증명이 없으므로, 이와는 다른 전제에서 하는 원고 5·18단체들의 청구는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
아) 그 밖의 사실관계에 관한 부분
⑴ 큰 주제로 한데 묶기 어려운 아래 각 표현들이 허위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과 그 이유, 근거는 아래 표에서 보는 바와 같다.
순번쪽내 용판 단이 유근 거 2-1p.380도청 지하실에 설치된 엄청난 분량의 폭약을 해체하려다 피살된 학생의 희생은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삭제계엄군이 작성한 자료에 등장하는 ‘폭약 해체 작업에 참여하였다가 희생당한 사람’으로 기재된 소외 91은 소외 1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및 내란 사건의 확정판결에서 인정한 사실관계에 따르면 사망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폭약관리반 중 사망한 사람은 소외 92로 보이는데 그 조차도 같은 시민저항세력에 의해 희생된 것이 아니라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작전 과정에서 특공조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종합하면 마치 시민저항세력 중 강경파가 온건파 시민을 직접 사망케한 것처럼 기술한 위 부분은 허위라고 볼 수 있다.갑22, 갑38 2-24p.434지하실로 들어가 폭발물에 장착되어 있던 뇌관 제거 작업을 하던 중 강경파 학생들에게 폭발물 해체작업에 협조하던 온건파 학생이 발각되어 총격으로 사망했다.삭제 2-12p.390주변에 돌을 주을만한 곳이 없었던 점에 비추어 학생들은 돌을 미리 가방에 담아왔던 것이다.유지당시 주변의 상황을 전제로 자신이 나름대로 추론한 내용을 소개하는 것에 불과하고, 굳이 진위 여부를 가려야 정도로 단정적인 사실관계를 표현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학생들이 계엄군에 항의하며 투석전을 전개한 것은 사실이므로 그 돌을 주변에서 주웠는지, 아니면 미리 가방에 담아왔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2-15p.395유언비어들은 날조된 사실에 근거한 악랄한 내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유포 과정이 매우 조직적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소외 93라는 여인이 확성기를 단 차량을 이용해서 벌인 가두 선동이었다. 5월 20일 밤 9시가 지났을 무렵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은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시체 두 구를 싣고 와서는 광주 시가지를 누비고 다녔다.삭제소외 93이 가두방송을 시작한 것은 1980. 5. 21. 새벽부터이므로 기본적인 사실관계에 오류가 있는 점, 5·18 진압작전 당시 505보안부대의 내부보고 자료에 의하더라도 소외 93이 가두방송을 시작할 무렵인 5. 21. 02:00경 계엄군의 곤봉 구타로 사망한 사람이 2명 발생하였던 점, 그중 한 명은 소외 94으로서 망치 등 둔기로 인한 우측 두정골 열상 및 대검 등 예기로 인한 좌측 전두부 자상으로 사망한 점, 소외 93이 트럭 또는 리어카에 싣고 다녔다고 하는 시신은 정체불명의 시신이 아니라 위와 같이 계엄군의 구타로 사망한 희생자들의 시신인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이 부분 표현은 허위사실을 적시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갑38 2-23p.431계엄군이 철수한 후 무장시위대에 의한 강도 사건이 잇따르자삭제2건의 강도사건 발생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나, 당시 시민저항세력이 상당한 규모의 총기를 보유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위와 같이 평시에도 있을법한 수준의 사건·사고가 있었던 것에 그치고 치안이 대체로 양호하였던 것을 보면, 마치 강도 사건이 빈발하여 치안이 좋지 않았던 것처럼 묘사한 것은 허위라고 볼 수 있다.갑37 2-27p.475♧▲▲협의회의 자료(1987년)는 "이동 중 음주운전 및 과속으로 인한 전복 충돌 등의 교통사고를 일으켜 3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밝히고 있다.유지위 인용문의 출처는 ♧▲▲협의회가 1987년 발간한 ‘(도서명 4 생략)’의 내용 중 편집자가 "계엄사 발표 광주사태 전문"을 그대로 옮겨 놓은 부분이다. 이를 설명 없이 인용하여 마치 종교계가 파악한 객관적인 내용인양 보이게 한 잘못은 있다. 그러나 해당 문헌에 그러한 문장이 없다거나, 그 내용이 허위라는 점에 대한 증명은 부족하다.갑44-3, 을168 2-32p.511국기문란자로 사법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던 10.26사태 이후 소외 32 씨의 행적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그는 정권 쟁취를 위해 불법적인 민중혁명을 기도했다.삭제위 인정사실에서 본 5·18민주화운동의 전개 과정에 비추어 보면, 마치 소외 32의 정권 쟁취를 위한 불법적인 민중혁명 기도의 결과로 광주에서 시위가 촉발된 것처럼 암시하는 이 부분 표현은 허위라고 봄이 타당하다.갑21, 갑22
⑵ 원고 5·18단체들과의 개별적 관련성
앞서 가.의 2)항(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사실의 적시가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지를 총론적 관점에서 논증한 부분)에서 본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위 ⑴항의 표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부분에 해당하는 허위사실의 적시는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하는 것으로서 해당 원고들과 개별적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⑶ 피고들의 귀책사유(손해배상청구 관련)
위 허위사실 적시와 관련하여, 저자인 소외 1과 출판자인 피고 2가 위 각 표현들이 허위라는 점을 과실 없이 알지 못하였다고 볼 수 없고, 피고들이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도 어려워, 피고들의 귀책사유 역시 인정된다.
⑷ 소결론
그렇다면, 원고 5·18단체들의 출판 등 금지청구는 위 ⑴항의 표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항목의 해당 ‘내용’란 기재 각 표현의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는 범위 내에서, 손해배상청구는 해당 부분을 허위사실로 적시하여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범위 내에서 각 받아들일 수 있다.
다. 출판 등 금지의 해제조건에 포함시킬 삭제 부분
1) 원고 5·18단체들의 청구에 의한 부분
위와 같은 판단을 종합하면, 별지 2, 3 목록 ‘당심 판단’란에 ‘삭제’라고 표시한 부분의 표현은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하는 내용으로서 위 각 단체들의 법인으로서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방해배제로써 이 사건 회고록의 일부 표현에 대한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여 출판 등 금지를 명하여 달라고 하는 원고 5·18단체들의 청구는 위 인정범위 내에서 이유 있으므로 받아들인다.
2) 원고 5의 청구에 의한 부분
위와 같은 판단을 종합하면, 별지 2 목록 순번 1-4, 1-14, 1-15 부분의 표현은 원고 5가 일정한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망인과 생전에 밀접한 관계를 맺어오고, 사후에도 망인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설정하여 내세우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삼고 있다고 인정되는 망 소외 2의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원고 5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해시킬 뿐만 아니라 유족으로서 원고 5가 갖는 명예감정, 추모감정 등을 훼손하여 정신적 고통을 가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방해배제로써 이 사건 회고록의 해당 표현에 대한 삭제를 해제조건으로 하여 출판 등 금지를 명하여 달라고 하는 원고 5의 청구는 위 인정범위 내에서 이유 있으므로 받아들인다.
라. 각 손해배상액의 산정 이유
1) 원고 5·18단체들에 대한 손해배상액
가) 유리한 사정
이 사건 회고록의 출간으로 피고들이 거두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경제적 이익이 그리 클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 점(원고 5·18단체들의 신속한 가처분 신청 등으로 이 법원에서 삭제를 명하는 표현이 포함된 이 사건 회고록의 실제 판매 기간은 길지 않았다), 출판자인 피고 2의 경우 저자인 소외 1과 부자 관계인 점을 감안하면 허위사실에 대한 인식 또는 과실이 인정되더라도 가족의 정리(情理)상 아버지의 출간을 저지하거나 문제된 표현의 수정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은 손해배상액 산정에 있어 유리한 사정으로 고려해 볼 수 있다.
나) 불리한 사정
⑴ 이 사건 회고록의 내용 중 이 법원이 허위사실로 판단한 부분은 아래와 같은 측면에서 원고 5·18단체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를 훼손시키는 정도가 크다.
▷ 소외 1은 5·17 군사반란과 5·18 관련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의 우두머리로서 무기징역형의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장본인이다. 그럼에도 이 사건 회고록을 통해 이미 법적으로 단죄된 부분마저 자신의 책임을 전면 부인하고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게 된 양 피해자 행세를 하면서 진짜 피해자인 민주화운동 세력을 비난하고 있다.
▷ 5·18민주화운동이 소외 1 등의 헌정질서 파괴행위에 맞선 정당행위라는 입법적, 사법적, 정치적,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이를 다시 뒤집어 시위에 참여한 광주시민과 학생들을 ‘폭도’로 몰아가려고 했다.
▷ 실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조차 믿지 않았던 ‘북한군 개입설’을 새삼 끌어들여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논의를 다시 구태의연한 이념 대립의 소용돌이 속에 밀어 넣고자 하였다.
⑵ 소외 1은 심지어 원고 5·18단체들이 마치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에 대한 논의를 특정한 방향으로 성역화하고, 일체의 토론을 봉쇄한다는 식으로 비난하기까지 하였다.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는바, 가해자가 명백한 허위사실로 피해자 단체의 명예를 훼손하는 ‘2차 가해’를 하고 있으면서도 위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손해배상액 산정에 반드시 고려하여야 할 요소이다.
⑶ 역사를 부정하고서는 바른 미래를 세울 수 없으므로,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역사를 올바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은 물론 사회와 국가를 올바른 미래로 이끄는 바탕이 된다. 하물며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를 지낸 사람이라면 그와 같은 책임은 더욱 무겁다고 할 것이다. 소외 1은 전직 대통령이자 그가 서술하는 역사적 사건의 실제 당사자 중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위와 같은 허위사실의 적시가 우리 사회에 미칠 부정적인 파급력이 매우 크고, 그에 대한 비난 가능성 또한 적지 아니하다.
⑷ 명예훼손의 피해자인 원고 5·18단체들은 관련법에서 특별히 그 지위와 활동을 보장받는 법정단체로서 그들의 명예, 신용, 사회적 평가는 법으로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
다) 소결
위와 같이 저자 소외 1과 출판자 피고 2에게 각 공통되거나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유·불리한 사정을 종합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 이 사건 기록과 변론에 나타난 제반 사정을 모두 고려하여 저자 소외 1과 출판자 피고 2가 공동하여 원고 5·18단체들에 각각 지급하여야 할 손해배상액은 1,500만 원으로 정함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피고 2는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으로 원고 5·18단체들에게 각 1,500만 원 및 이에 대하여 (원고 5·18단체들이 각 구하는 바에 따라) 2018. 1. 18.부터 이 판결 선고일(2022. 9. 14.)까지는 민법에서 정한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정한 연 12%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이 소외 1의 위 배상책임 중 3/9을 상속하였음은 앞서 본 바와 같다. 그렇다면 피고 2와 공동하여 지급하여야 할 손해배상액 중 피고 1의 상속분은 500만 원(= 1,500만 원 × 3/9)일 것이나, 원고 5·18단체들이 그중 400만 원씩만 청구하고 있으므로 그에 따라,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은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으로 피고 2와 공동하여 위 1,500만 원 중 원고 5·18단체들에게 각 400만 원 및 이에 대하여 (원고 5·18단체들이 각 구하는 바에 따라) 2018. 1. 18.부터 이 판결 선고일(2022. 9. 14.)까지는 민법에서 정한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정한 연 12%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
2) 원고 5에 대한 손해배상액
가) 유리한 사정
위 1)의 가)항에서 보는 바와 같다.
나) 불리한 사정
앞서 ‘가. 총론적 쟁점’의 3)항에서 본 바와 같이 원고 5는 허위사실의 적시 및 심히 모욕적인 표현으로 사자로서의 명예를 훼손당한 소외 2와 생전에 매우 각별한 사이였던 점, 사후에도 그는 소외 2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설정하여 이를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한 요소로 생각하고 살아온 점, 가톨릭 교황으로부터 최고위 사제를 뜻하는 ‘몬시뇰’ 칭호까지 받은 성직자인 소외 2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모욕하는 등 그 불법성의 정도가 작지 아니한 점, 소외 2에 대한 명예훼손이나 그를 향한 심히 모욕적 표현을 접한 원고 5가 입었을 정신적 고통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은 피고들에게 불리한 사정으로 고려하여야 한다.
다) 소결
위와 같이 저자 소외 1과 출판자 피고 2에게 각 공통되거나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유·불리한 사정을 종합하고, 피고들의 사회적 지위, 이 사건 기록과 변론에 나타난 제반 사정을 모두 고려하여 원고 5에게 저자 소외 1과 출판자 피고 2가 공동하여 지급할 손해배상금은 1,000만 원으로 정함이 상당하다.
그렇다면 피고 2는 인격권 침해에 따른 손해배상으로 원고 5에게 1,000만 원 및 이에 대하여 (원고 5가 구하는 바에 따라) 2018. 1. 18.부터 이 판결 선고일(2022. 9. 14.)까지는 민법에서 정한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정한 연 12%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이 피고 2와 공동하여 지급하여야 할 손해배상액은 333만 원(= 1,000만 원 × 3/9, 만 원 미만은 버림)일 것이나, 원고 5는 그중 250만 원만 구하고 있으므로 그에 따라,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은 인격권 침해에 따른 손해배상으로 원고 5에게 피고 2와 공동하여 위 1,000만 원 중 250만 원 및 이에 대하여 (원고 5가 구하는 바에 따라) 2018. 1. 18.부터 이 판결 선고일(2022. 9. 14.)까지는 민법에서 정한 연 5%, 그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정한 연 12%의 각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
6. 결론
그렇다면 원고들의 피고 2에 대한 청구는 위 인정범위 내에서 이유 있어 인용하고 나머지는 이유 없어 기각하며, 피고 망 소외 1의 소송수계인 피고 1에 대한 청구는 모두 이유 있어 인용하여야 한다. 이 법원이 제1심과 일부 판단을 달리한 부분 외에도, 앞서 본 바와 같이 당심에 이르러 일부 원고 5·18단체들 및 망 소외 1에 대한 소송수계가 이루어졌고, 원고들이 일부 소를 취하하고 청구를 감축하는 등의 사정으로 제1심판결은 결과적으로 부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피고 2의 항소 중 일부 및 원고 5·18단체들의 부대항소 중 일부를 각 받아들여 제1심판결을 주문과 같이 변경한다.
판사 최인규(재판장) 김진환 차기현